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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1부 세전(世典) 제7장 세계(世界) 2. 인류의 도
우리 인류는 온 인류가 함께 잘 살고 함께 번영할 길로 다 같이 합심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니, 그 도를 강령으로써 말하자면 첫째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다 같이 종파의 울을 벗어나 이 세상 모든 도리가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고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리고 한 울안 한 이치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요, 둘째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다 같이 종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종족이 한 집안 한 겨례임을 알고 한 집안 한 겨레임을 알리고 한 집안 한 겨레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요, 세째는 세계의 모든 사업인들이 다 같이 사업의 편견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일이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고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리고 한 일터 한 사업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니라. |
[심층제자]
오늘 함께 공부하실 내용은 세전 제7장 세계 중 인류의 도입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지금 정산종사님의 인류의 도가 어느 때 보다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인류의 도는 삼동윤리의 내용을 인류에 국한 시켜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삼동윤리의 동기연계에서는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임을 자각하라고 되어있는데 인류의 도에서는 모든 인종과 민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국한하고 있습니다. 삼동윤리가 인류의 도를 포함하고 있고 삼동윤리에 있는 것이 인류의 도에는 없는 것도 있습니다. 인류의 도는 인간 중심으로 풀어놓은 것이고 삼동윤리는 인간뿐 아니라 생령까지 포함하고 있는 윤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도는 크게 세 가지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알고, 알리고, 합심한다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로 동원도리라고 한다면 모든 종교, 모든 이치가 하나인 것을 알고 그것을 알리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 합력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도 세 가지가 이렇게 알고 알리고 협력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가 동원도리라고 할 수 있는데 종파의 울을 벗어나서 이 세상 모든 도리가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고, 알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순서적으로 먼저 모든 종교와 그 근본이 하나임을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것을 굉장히 쉽게 생각했습니다. 원불교인은 특히 예비교역자로 수학을 받은 사람은 모든 종교의 근본 이치는 하나라고 아주 귀가 따갑게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특별히 의심을 갖지 않았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대종사님께서 대종경에 유교의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과 도교의 자연 혹은 도, 불교의 청정 법신불,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종사님이 깨치신 일원상 자리와 같은 자리라고 말씀하셔서 별다른 의심 없이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무종교인들이나 이웃 종교인들을 만나도 그렇게 모든 종교의 근본은 하나라고 자동적으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열린 사람이다. 약간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무종교인들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웃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진리, 종교의 근본은 하나라고 말했을 때 거부감을 보이는 이웃 종교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아직 종교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종교가 편협하지, 배타적이지. 그러면서 제 스스로를 위안하고 합리화했었는데, 제가 철이 들고 보니까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제가 실제로 모든 종교의 근본이 하나인 자리를 알지 못하면서 앵무새처럼 너무 오랫동안 우리 원불교에는 모든 종교는 하나다, 화합한다는 DNA가 뿌리 깊게 있어서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사실은 앵무새처럼 내가 이야기한 것이지 실제로 모든 종교의 이치가 하나인 줄은 자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확신이 없는데,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주위 사람에게 공허하게, 영혼 없이 들렸을까 생각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웃 종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제대로 깨치지 못한 내가 문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대종경을 읽다가 대종경 전망품 14장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대종경 전망품 14장을 보면서 참 대종사님이 대단하시다, 어떻게 종교인으로서 이렇게 유연하시고 국이 넓을까? 이웃 종교인들과 모든 종교의 진리는 하나라는 말은 제가 우월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부딪힘이 있었는데 대종사님은 기독교 장로분을 한방에 원불교로 돌리게 되셨죠. 그것도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나서요.
전망품 14장 |
조 송광이 처음 와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보통 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어 보이니 어떠한 믿음이 있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여러 십년 동안 하나님을 신앙하온 예수교 장로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다 하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던가.] 송광이 사뢰기를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사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늘 하나님을 뵈옵고 말씀도 듣고 가르침도 받았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아직까지는 뵈온 일도 없사옵고 말하여 본 적도 없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아직 예수의 심통(心通) 제자는 못 되지 아니하였는가.] 송광이 여쭙기를 [어떻게 하오면 하나님을 뵈올 수도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그리할 수 있나니라.] 송광이 다시 여쭙기를 [성경에 예수께서 말세에 다시 오시되 도둑 같이 왔다 가리라 하였고 그 때에는 여러 가지 증거도 나타날 것이라 하였사오니 참으로 오시는 날이 있사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성현은 거짓이 없나니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심령(心靈)이 열리고 보면 예수의 다녀가는 것도 또한 알리라.] 송광이 사뢰기를 [제가 오랫동안 저를 직접 지도하여 주실 큰 스승님을 기다렸삽더니, 오늘 대종사를 뵈오니 마음이 흡연(洽然)하여 곧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그러하오나, 한 편으로는 변절 같사와 양심에 자극이 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 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송광이 일어나 절하고 제자되기를 다시 발원하거늘, 대종사 허락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
기독교 장로인 조송광 선진이 대종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의 감동을 받아서 대종사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마음속으로 기독교 장로까지 하셨으니까 양심에 변절한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 동원도리에 핵심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고 하시며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시죠. 그러자 조송광 선진님이 이 말씀을 듣고 더 감동이 되어 다시 제자 되기를 청하자 대종사님께서는 나의 제자가 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이런 말씀이 종교의 교조가 할 수 있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상담자, 어떤 분보다도 포용력이 있고 국한이 넓고 간격 없이 하신 말씀이신데, 제가 이야기했던 것은 동원도리에 대한 이론적인 이야기이고, 예수의 심통제자가 되면 나의 심통제자가 된다. 이것이 동원도리의 궁극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심통제자가 되면 나의 심통제자가 되고 나를 믿으면 예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두터워지는 것, 이것이 동원도리의 극치 아닐까 합니다. 종교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데, 표층종교를 믿는 것이 있고 심층 종교를 믿는 것이 있습니다. 표층종교를 믿는 것은 문자, 글 이런 것들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래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말씀하신 것 그 자체에 집착을 해서 다른 것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표층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은 서로 부딪히겠죠. 표층 종교 층에 있는 사람은 기독교에도 있겠고, 원불교에도 있겠죠. 원불교에 법신불 사은을 믿는데 그것을 인격적으로 믿으면 그것도 표층적일 수 있고, 내것과 남의 것을 찾거나 우리 종교의 세력이나 조직 같은 걸 많이 따지면 표층 종교로서의 신앙을 하는 사람이고 심층 종교로서 하는 것은 영성적으로 만나는 것이죠. 이것이 심통제자입니다. 표층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싸우겠죠. 하지만 심통제자들은 서로 만나게 되겠죠. 양쪽 종교의 표층 신도들은 서로 다르지만, 양쪽 종교의 심층 신도들은 안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이웃 종교의 성직자들과 많이 만나는데 신부님을 만나면 형님같이 편하고 어떤 나이가 어린 스님들은 동생 같기도 하고 하면서 뭔가 말하지 않아도 만나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나 교화를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말꼬리를 잡거나 약점을 잡아서 승부를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표층 종교로서 믿고 있는 사람들이죠. 말과 글과 세력과 신도 수와 조직과 제도에 집착하는 거죠. 심층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대종사님의 심통제자, 예수님의 심통제자이죠. 그러면 우리가 모든 종교의 교리는 하나라는 말이 심층 종교에서 심통제자가 되어야 하죠. 내가 다른 종교인과 만났을 때 불편함이 있거나, 대질리거나, 기운이 부딪힌다면 심통제자가 되지 못해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심통제자끼리 만나면 서로 하나의 자리에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성자들의 근본 뜻은 다 모르지만 이런 희망은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보신 진리와, 예수님이 보신 진리와, 부처님이 보신 진리와, 공자님이 보신 진리가 과연 다른 진리일까? 같은, 하나의 진리를 보셨을 텐데 그 후대의 제자들이 성자들의 본의를 잘 보지 못해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성자들의 마음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것이 종교이고, 가장 잔혹한 일을 한 것도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의 본의를 제자들이 파악하는 것이 참 중요하고, 그래서 심통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동원도리에서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원불교는 오해의 여지가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전을 대종사님께서 직접 집필하셨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위험성이 적습니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경우에는 제자들이 들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결집되는 과정에서 힘이 작용합니다. 최근에 도마복음 같은 부분들. 도마복음은 영지주의라고 해서 역사적인 예수보다는 예수님의 어록을 중심으로 불교의 성품 자리와 같은 부분들을 많이 밝힌 복음서인데 이 복음서가 결집과정에서 제외되었죠. 기독교나 불교에 경전이 결집하는 과정에 힘과 정치력이 작용합니다. 그 당시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서 영지주의,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성직자의 권위를 중요시하지 않거든요. 네가 곧 하나님이다 해버리니까 성직자가 필요가 없어져 버리죠. 직접 하나님과 만나니까요. 중간에 성직자가 있어야 종교적으로는 통솔이 되겠죠. 정치적인 입장에서 봐도 훨씬 다스리기 편한 건데 그런 종교가 정치나 권력, 힘과 영향을 받아서 약간의 왜곡과 변질이 모든 종교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꼭 특정 종교가 아니라요. 그 교조가 직접 경전을 내지 않는 이상 그런 왜곡과 변화, 부정적인 영향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역사도 왜곡되는데 어떻게 종교의 경전이 왜곡되지 않을까 분명히 왜곡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왜곡된 것을 가지고 경전은 무결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되면 성경 문구 하나 가지고 싸우게 되는 것이죠. 성자의 본의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시다가 1992년 감리교 교단으로부터 목사 자격과 신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유명하신 변선환 목사님이십니다. 최근에 변선환 목사님의 다원주의적인 입장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분이 원불교 총부에 와서도 한번 강연을 하셨지만 크게 잘 알려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이런 발표를 하셨습니다. “신은 중심이 도처에 있는 주변이 없는 중심, 주변이 도처에 있는 하나의 원, 일원상입니다. 신은 비대상적인 무상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거나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거나 우리 밑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런 강의를 1980년도에 하셨었습니다. 대학원 학장까지 하셨었는데 제명을 당하십니다. 이분의 말씀이 해석에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원상의 진리와 다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큰 성인의 심통제자는 서로 만난다는 것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원도리 모든 종교의 근본 이치는 하나라고 말하려면 우리가 대종사님의 심통제자가 되어야합니다. 깊어지면 만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얕아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동원도리의 이치를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리고 세 번째는 한 이치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하는 것이 인류의 도인데, 저는 두 번째 한울안 한이치임을 알리는 것은 종교 간의 대화, 그리고 세 번째는 종교연합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 경험을 말씀드렸듯이 종교 간의 대화는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선거가 있었습니다. 최근 선거에서 보수와 진보의 색이 더 강해졌습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도 서로 대화하기가 힘든데,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도 대화의 접점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러하냐면 가치의 문제,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더하죠. 종교는 목숨까지 바치기 때문에 종교 간의 대화는 진보와 보수 간의 대화보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념을 버리고 가치관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앞장서온 폴 닛터에 의하면 우리가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하면 4가지 태도를 가진 분들과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가 대체론입니다. 대체론은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그러니 네가 믿는 종교를 우리의 종교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타주의자들입니다. 절대 다른게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분들 하고는 대화가 어렵고 일방적인 선교를 당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저 사람 종교를 우리 종교로 바꿔줘야겠다는 생각. 가장 강성이 되겠죠? 두 번째는 충족론자입니다. 충족론자라는 것은 이웃 종교에도 부분적으로 진리가 있지만 불충분하다. 그래서 그 모자란 부분을 내가 가지고 있는 참 종교로 채워줘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저기는 뭔가 신앙이나 교리가 불완전하니 내가 가진 교리로 채워줘야겠다. 이것이 충족론 모델입니다. 대체론자들보다는 덜 강성이겠죠? 세 번째는 상호론입니다. 종교 간에 서로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이 있는데 저기도 이런 신앙이 있네? 우리한테 이런 교리가 있는데 저기한테도 이런 교리가 있네? 하는 공통점을 발견해서 서로 찾아가는 것이 상호론이 되겠고, 마지막 네 번째는 수용론입니다. 수용론은 다른 종교를 완벽하게 인정합니다. 부족하거나 바꿔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인정하고 그 다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입장에서 접근합니다. 대종사님이 그러셨죠. 예수교 사람을 만나면 예수교를 배우고, 천도교 사람을 만나면 천도교를 배우고, 유교 사람을 만나면 유교를 배우셨습니다. 끊임없이 배우셨죠. 그러니까 대종사님은 수용론이셨죠. 우리가 종교 간에 대화에 있어서 수용론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지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아까같이 대체론 충족론 이런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이 느껴서 결국에는 싸움이 되겠죠. 수용론과 공통론을 합쳐서 종교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여기에 또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이 다원주의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다원주의가 세 가지 있습니다. ‘일원적 다원주의’, ‘다원적 다원주의’, ‘실천적 다원주의’. 우리 원불교는 일원적 다원주의인 것 같습니다. 일원적 다원주의라는 것은 종교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진리를 말한다. 산이 있으면 하나의 정상에서 만난다는 것이 일원적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적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이것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냥 서로 끝까지 다르다. 이것이 다원적 다원주의. 실천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교리가 다르지만 코로나19 사태 때 약자들을 도와주고 국가의 방역지침을 지키자는 공통점이 있죠? 이 부분에서는 서로가 하나가 되죠.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실천적 다원주의입니다. 도덕적 실천의 차원에서는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일원적 다원주의인데, 길희성 교수 같은 경우에는 결국에는 만난다.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다원적 다원주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일원적 다원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은 하나다. 모든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 힘이 없는 상태에서 외치면 상대방한테 무례가 될 수 있습니다. 니가 우리 종교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쉽게 하나라는 말을 외치나? 모든 종교는 하나다, 모든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할 때에는 상당히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그것을 마음으로 증득하고 제대로 알고 나서 그 말을 해야지 그 말을 너무 쉽게 던지면 그 신앙을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말이 될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 다원주의에 대해 우리가 원불교 사람들은 너무 쉽게 모든 종교는 하나다, 진리는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조금 더 무게 있게, 대종사님의 심통제자가 되어서 해야 한다. 그래야 공허한 소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공통의 조상]
인류의 도 두 번째는 종족의 울을 넘어서 한 집안 한 겨레임을 알고 알리고 한 집안 한 겨레인 자리에서 하나의 세계 건설하는 것입니다. 동기연계에 대한 설명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동기연계는 생령까지 포함하지만 여기는 인간만 포함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제가 있습니다. 이 전제가 해결이 되어야 한 울안 한 집안을 삼을 수 있습니다. 세전 원문에 나와 있습니다. 아까 동원도리라는 것도 대종사님의 심통제자가 되어야 그것이 동원도리가 되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었죠? 동기연계 종족의 울을 넘어서 한 집안 한 겨례가 되기 위해서는 정산종사님께서 천지를 부모 삼고 우주를 한집 삼는 사람한테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앞에 전제를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된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이 한 동포다.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무이지만 더 넓게는 원불교인이고 더 넓게는 종교인이고 더 넓게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더 넓게는 아시아인이고 더 넓게는 세계시민이고 더 넓게는 지구인이고 더 넓게는 우주의 한 생명체입니다. 어떤 자리에 기점을 두느냐에 따라 나의 국한은 달라집니다. 성자들은 나는 우주의 한 생명체라고 넓게 집안을 보시는 거고요, 우리가 누구랑 싸울 때는 되게 좁아지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동포인 우한 교민들 받아들일 때에 데모도 하고 그랬었죠. 그것도 수용이 안 되는 것이죠. 한 민족도. 그러니 우리가 뭔가 두려움에 빠지거나, 욕심이 생기면 내 가족도 수용이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폭이 내가 기점을 삼고 있는 가족의 품이 천지를 부모 삼고 우주를 한 집 삼는 정도가 되어야 한 동포 한 형제가 되는 것이죠. 혹시 LUCA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이는 ‘최후의 우주 공통의 조상(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를 말합니다.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DNA에 들어있죠? 그리고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최초 생명체가 있고, 이 최초생명체의 중간에 35억에서 40억년 동안 진화를 거쳐서 현재의 우리 DNA가 있죠. 그래서 진화론자들이나 과학자들은 우리 DNA에 최초 생명체의 DNA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요. 우리가 사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최초 인류에 대한 DNA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DNA가 변화를 겪어서 내가 만들어진거 거든요. 나에 대한 정보는 모든 생명체의 정보가 이 안에 포함되어 나라는 DNA가 형성이 된거죠. 어떻게보면 나라는 존재는, 그리고 여기에 계신 분들, 모든 인류들은 서로 공통조상을 가지고 있고, 공통의 DNA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한 기운으로 되어있다고 하죠. 그럼 우리가 DNA는 최초생명체가 진화하고 변화해서 현재의 DNA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35억년의 정보가 이 DNA에 들어있습니다. 우리 사람이라는 것이 수소와 산소와 탄소와 기타 등등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원자는 그럼 어디서 온 것인가. 이 원자라는 것. 우주의 시작에는 수소와 헬륨 원자가 주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원자들이 밀도가 높아지면서 빅뱅을 일으키죠. 처음에 최초의 별이 있었다가 폭발하면서 우주가 확장되면서 태양도 생기고 지구도 생긴 것인데, 최초의 별에 있는 원소의 한부분이 지구가 되었겠죠? 그 지구의 원소가 결국 나라는 생물체가 된 것이고요. 그러면 우리는 최초의 생명체와도 연결되어 있지만 우주 최초의 별과도 우리는 원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크게 다르게 보이지만 지구에 있는 최초 생명체의 DNA를 공유하고 있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초의 우주, 최초의 별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기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한 기운이죠.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서 국가들이 장벽을 높이고 국가간에 배타적이고 인종간의 차별이 생기고 폭동도 일어나죠. 이렇게 인종차별이 생기고 차별이 심해지고 국가이익에 몰두하는 이 시대에 인류의 도 두 번째 한 기운으로 얽혀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이 장벽을 놓고 함께 살 수 있는 공생의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세계 사업]
인류의 도 세 번째는 이 세상 모든 일이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사업이 궁극적으로 그 목적은 같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야만큼 목적이 보이거든요. 수준이 높은 사람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은 궁극적인 목표가 보이는데 우리가 지금 나 살리기 바쁜 사람, 욕심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번뇌망상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은 그 궁극의 목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핵심정신이 세전 원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사회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세계의 일이 결국 한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도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심통제자가 되어서 깊이가 있어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 기운임을 아는 것이죠? 세 번째는 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대의를 저버림 없이 소를 운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과 세계의 일은 둘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한 개인이 방역수칙 잘 지키는 일이 가정을 사회 국가 세계를 지키는 일임을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슈퍼전파자 한 명이 나라 전체를 힘들게 할 수 있음을 경험했죠. 이것이 결국은 한 일이다. 개인의 일과 국가의 일과 세계의 일은 한 일이다. 나는 항상 대 속의 소지 대를 떠나서 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를 저버림 없이 소를 운용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대를 저버림 없이 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모든 일이 한 일임을 아는 것이며, 내가 사은의 공물 임을 아는 것이며, 연기적 세계관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상호 연결돼 있고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고, 두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 세계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전망품 11장에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전망품 11장 |
그 청년이 다시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이라야 이 세상이 길이 잘 교화 되리라고 생각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나 오직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리라. 가령, 큰 들 가운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사 방법도 잘 알고 일도 또한 부지런히 하여 그 수확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우월하다면, 온 들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연히 본받아 갈 것이나, 만일 자기 농사에는 실적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로만 권한다면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은 물론이니, 그러므로 나는 늘 말하되 내가 먼저 행하는 것이 곧 남을 교화함이 된다 하노라.] 청년이 사뢰기를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통달하신 법으로 세상을 교화 하시거니와, 그 교는 좋지 못한 행동으로 백성을 도탄(塗炭) 가운데 넣사오니 세상에 없어야 할 존재가 아니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 교도 세계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대들도 곧 세계 사업을 하고 있나니라.] 청년이 또 여쭙기를 [어찌하여 그 교가 세계 사업을 한다 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 교는 비하건대 사냥의 몰이꾼과 같나니 몰이꾼들의 몰이가 아니면 포수들이 어찌 그 구하는 바를 얻으리요. 지금은 묵은 세상을 새 세상으로 건설해야 할 시기인 바 세상 사람들이 그 형편을 깨닫지 못하고 발원 없이 깊이 잠들었는데, 그러한 각색 교회가 사방에서 일어나 모든 사람의 잠을 깨우며 마음을 일으키니, 그제야 모든 인재들이 세상에 나서서 실다운 일도 지내보고 헛된 일도 지내보며, 남을 둘러도 보고 남에게 둘리기도 하여 세상 모든 일의 허실과 시비를 알게 되매 결국 정당한 교회와 정당한 사람을 만나 정당한 사업을 이룰 것이니, 이는 곧 그러한 각색 교회가 몰이를 해 준 공덕이라, 그들이 어찌 세계 사업자가 아니라 하리요.] 청년이 또 여쭙기를 [그것은 그러하오나 저희들은 또한 어찌하여 세계 사업자가 된다 하시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모든 교회의 행동을 보아, 잘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드러내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또한 비평을 주장하므로, 누구를 물론하고 비난을 당할 때에는 분한 마음이 있을 것이요, 분한 마음이 있을 때에는 새로 정신을 차려 비난을 면하려고 노력할 것이니, 그대들은 곧 세계 사업자인 모든 교회에 힘을 도와주고 반성을 재촉하는 사업자라, 만일 그대들이 없으면 모든 교회가 그 전진력을 얻지 못할 것이므로 그대들의 공덕도 또한 크다 하노라.] 청년들이 감복하여 절하고 사뢰기를 [선생님의 말씀은 두루 통달하여 하나도 막힘이 없나이다.] |
대종사님이 남산에 가 계시는데 어떤 젊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사이비종교를 박멸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대종사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여쭤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대종사님께서 그 사이비종교도 세계 사업을 하고 있고 당신들도 세계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 사이비종교가 세계 사업을 하고 있고 우리가 세계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신흥 사이비종교 때문에 참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참 종교를 알려주는 세계 사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번에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면서 어떤 것이 참 진리이고 어떤 것이 참 종교인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이것도 세계 사업이고, 당신들도 세계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을 하는 종교들을 비판하고 없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종교가 비판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좋은 종교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사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세계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훈품 34장 |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선으로 세상을 가르치고, 악한 사람은 악으로 세상을 깨우쳐서, 세상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데에는 그 공이 서로 같으나, 선한 사람은 자신이 복을 얻으면서 세상 일을 하게 되고, 악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 세상 일을 하게 되므로,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하나니라.] |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세상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를뿐이죠. 법대로 하는 사람은 복을 지으면서 세상일을 하는 것이고 순리에 거스르는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 괴롭게 세상일을 한다는 것을 깨우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으면 전체를 보지 못하고 관계를 보지 못하고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고 잠깐 이득을 보는 것을 영원한 이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 단면만 보기 때문에 마지막 세 번째 모든 일이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아는 것이 이로운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세상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일은 하나다. 개인의 일과 세계의 일은 모두 하나다. 그래서 대를 상하지 않는 상태에서 대를 저버리지 않고 소를 해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인류의 도 핵심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첫 번째로 깊이 있는 심통제자가 되고, 두 번째로 우리가 한기운인 것을 알고 세 번째로 모든 것이 세계 사업을 하고 있다. 다만, 복을 받으면서 세계 사업을 하느냐, 죄를 지으면서 세계 사업을 하느냐를 잘 깨달아서 인류의 도를 통해 하나의 진리 하나의 인류 하나의 세계 사업을 하시길 바라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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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은혜롭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