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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고학 스터디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말 그대로 앞은 네모낳고 뒤는 둥근 형태의 고분을 말하며 위에서 내려다보면 흡사 열쇠구멍을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방후원분은 3세기 무렵, 일본열도 각지에서 청동제 제기들이 돌연히 소멸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고훈시대[古墳時代]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야요이시대의 묘제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전방후원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시기, 분구묘들이 지방마다 특색을 갖추고 각종 의례도 정비하는데 이 모든 것이 수장의 정치적인 결속을 확인하는 제사행위인 장송의례를 통해서 시행되었고, 이를 통해 봤을때 일본열도 내의 지역적인 결속과 정치적인 결합 양상이 고분으로 표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훈시대의 전체적인 편년은 3세기 후반~4세기를 전기로, 5세기는 중기, 6세기는 후기로 보고 7세기 이후는 종말기로 구분하고 있다. 본래 야요이시대때는 적갈색 연질토기인 하지키[土師器]를 사용했는데 이 시로 접어들면서 수에키[須惠器]라고 하는 새로운 경질토기를 사용하게 된다. 이는 한반도에서 직접 건너온 것도 있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의 손에 의해서 일본에서 제작된 것들도 상당수다. 그렇게 봤을때 고훈시대의 등장을 도래인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실제, 전기와 중기만 보더라도 고분 내 부장품의 성격이나 고분의 규모 등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도래인들이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던 것으로 이해된다. 덧붙여 말하면 중기 고훈시대인 5세기 무렵에는 동북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는데 바로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이라는 걸출한 군주의 등장이 그것이다. 동서남북 전방위 확장전쟁을 시도한 고구려는 이시기 영토만 몇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시스템 자체가 제국적 시스템으로 바뀔 정도로 크게 변화한다. 광개토호태왕이 할아버지인 고국원태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크게 타도하리라 마음먹은 대상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모용선비(후연)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백제였다.
광개토호태왕비에 기록된 백잔과 잔국에 대해서 이견이 많이 있는데 주인장은 그 주체를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로 이해한다. 오늘날 영산강 유역에 무수히 많은 옹관과 전방후원분을 남기고 있는 집단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광개토호태왕은 모용선비에 대해서는 정복을 완수했지만 백제에 있어서는 그러하지 못 했다. 하지만 4달만에 40여개의 성을 공파할만큼 적극적인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측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며 비류백제의 주력은 이때 일본으로 건너오게 됐다고 본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일본서기』의 15세 응신천황조 기록이며 4세기 말의 이 대사건 중 일부를 각색해 새로 만든 것이 1세 신무천황조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개로왕이 전사하고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한성백제(=온조백제)는 비류백제가 빠져나간 공백지에 대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 여례(餘禮)'다.
장수태왕 무렵까지 고구려의 남진 경영은 상당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실제『일본서기』에는 5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에서 엄청난 숫자의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와 맞물려 등장하는 것이 바로 중기 고분인 셈이다. 이 시기 가장 큰 고분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세계 최대라고 언급되는 인덕능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하다. 실제, 이 고분들을 일본에서는 유적 보호를 위해서 발굴허가를 내지 않고 있는데 과거에 무덤이 훼손되면서 쏟아져나온 유물들이 전부 한국계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고 있다는 소리도 있다. 실제 당시 공개된 유물의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야 유물들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이후 도래인들은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오고『일본서기』를 보면 4세기 말~5세기 초만 해도 일본 전토가 통일된 정부 아래 지배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로 (비류)백제에서 도래한 세력들은 기내 일대에서 주로 터를 잡았는데 이미 큐슈 일대에는 강력한 정치체가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1세 신무천황조를 보면 당시 일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日本書紀』券3,「神日本磐余彦天皇 神武天皇」조.
猶未霑於王澤, 遂使邑有君, 村有長, 各自分彊用相凌躒.
원격한 지방은 아직 왕택에 젖지 않았다. 읍에는 군이 있고, 촌에는 장이 있어, 각각 지경을 나누고 서로 능가하려고 싸움을 한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신무천황으로 대표되는 집단은 소위 동정(東征)을 실시한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금강 유역이 쑥대밭이 되자 비류백제인들은 대규모로 일본에 도착하게 되고 전국의 소국들이 전쟁을 통해 정치적 통합을 일으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당시의 일본은 여기저기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며 이런 혼란한 상황은 고고학적 근거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미 중국측 문헌에 왜국이라는 표현과 함께 야마타이국이라는 정치집단이 확인되는 때가 기원전후~3세기 초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노츠지, 우키쿤덴, 히라바루, 미쿠모, 수쿠오카모토, 다테이와 유적 등을 통해 당시 존재했던 소국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방어를 위한 환호취락과 고지성취락의 등장, 거점취락과 주변취락의 확연히 구분되는 상황등을 확인한다면 당시 일본 열도가 굉장한 긴장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청동기시대-철기시대 순으로 문화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도래인에 의해 청동기와 철기가 동시에 유입됐다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야요이시대 전기 말~중기 초(B.C 1~A.D 1C)에 집중적으로 선진문물이 도입되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제 큐슈 사가[佐駕]현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옹관묘 안에서 두개골만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고, 또한 화살촉이나 철검이 뼈에 박힌채 죽은 유골도 많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본보다 선진문물을 보유하고 있던 그들이 큐슈에 정착하지 않고 동정을 실시한 것은 눈여겨볼만한 것이 사실이다. 동정 중에 신무천황 일행은 장수언(長髓彦)이 이끄는 집단과 전투를 벌였고 오뢰명(五瀨命)이라는 장군이 유시에 맞는 등 고전을 면치 못 하고 후퇴하게 된다. 결국 오뢰명은 전사하게 되고 이후에도 신무천황 일행은 토전현(菟田縣)에서 형활(兄猾), 제활(弟猾) 형제의 군대와, 국견구(國見丘)에서 팔십효사(八十梟師)와 형기성(兄磯城)의 군대 등과 싸워가면서 동정을 완수한다. 특히 장수언은 끝까지 토벌되지 않다가 후에 일본에 귀순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기록을 보면 두 집단이 상당히 대등한 존재였다고 보인다. 아마도 장수언으로 대표되는 구주의 집단은 야요이시대때 이미 터를 잡은 한반도 도래인 집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정 중에 기내 지방에 도착한 도래인들은 그 곳의 원주민, 지금은 훗카이도 근처에만 일부 살고 있는 아이누족을 섬멸하는데 그 장면이 가히 유럽인들의 인디언 사냥과 맞먹을 정도다.
『日本書紀』券3,「神日本磐余彦天皇 神武天皇」조.
又高尾張邑有土蜘蛛, 其爲人也身短而手足長, 與侏儒相類, 皇軍結葛網而掩襲殺之, 因改號其邑曰葛城.
고미장읍에 지방민이 있었다. 그 사람됨이 단신인데다 수족이 길어서 난장이와 비슷하였다. 황군이 칡으로 그물을 만들어 엄습하여 죽였다. 그래서 그 읍을 고쳐서 갈성이라 하였다.
마치 제국주의 시절 서양인들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다루듯이 도래인들은 일본의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듯 하다. 앞서 존재하던 집단들은 어느정도 정치체를 이루고 상당히 문명화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누족에 대해서는 사냥하듯이 그물을 이용해 죽인 것으로 봐서 도래인들에 비해 문화적 이질감이 상당히 컸던 것 같다.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기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탁문화권은 이들 재지 세력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큐수 지역에 비해 도래인의 비율이 적었고 문화적인 전파도 늦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실제 야요이시대 큐슈 지역에 비해 기내 지역의 문화 양상은 전쟁과는 크게 거리가 멀었던 듯 싶다.
그리고 신무천황으로 대표되는 비류백제의 도래인들은 기내지역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이후 한반도 내의 잔여 세력과의 알력 다툼이 계속 되었던 듯 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왜오왕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군주와 한성백제의 왕이 서로 중국측에 책봉사를 요구한 일이다. 이는 백제라고 하는 나라의 정통성을 외부에서 획득하려는 양자간의 외교전으로 파악되는데 이런 양국의 대립은 무령왕 6년(506), 왕이 국내의 문제를 정리하고 외부로 동생을 파견해 일본을 점령해버려 왜(倭)가 사라지기까지 계속된다.
『日本書紀』卷16,「小泊瀨稚鷦鷯天皇 武烈天皇」조.
夏四月, 百濟王遣期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非百濟國主之骨族也, 故謹遣斯我奉事於朝, 遂有子, 曰法師君, 是倭君之先也.
여름 4월, 백제왕이 사아군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먼저번에 조공을 간 사신 마나는 백제국왕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를 보내어 천황을 섬기게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후에 자식을 두어 법사군이라 하였다. 이가 곧 왜군의 선조다.
실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 백제의 일본 지배를 증언해주고 있는데 백제 무령왕이 일본에 있는 동생이 천황이 되자 동생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503년에 만들어 보낸 청동 거울, 한때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 이라고 불렸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현재 일본의 국보)' 이 바로 그것이다. 그 곳에 적힌 내용은 대강 이렇다.
癸末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紗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令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早, 作此竟.
503년 8월 10일 대왕(무령왕)시대, 남제왕(계체천황)이 오시사키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나서 '사마-섬'라는 이름을 가졌다)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 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는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이처럼 일본이 하나의 단일된 정권으로 등장한 시기는 상당히 후기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바로 거대한 전방후원분인 셈이다. 실제 전방후원분은 7세기 이후에는 사라지는데 이는 그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본에 안정적인 정권이 들어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의자왕은 40여세라는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그의 정치적 입지가 약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태자가 되었고 다음 왕위를 잇는다. 아마 신라와 관계있는 여인(선화공주일 가능성도 있다)에게서 난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출신성분은 평생 그를 목죄었다고 보는데 그 결과, 그는 태자로서 무난히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무력충돌에서 승리함으로써 왕이 되었다.
『日本書紀』卷24,「豐財重日足姬天皇 皇極天皇」조.
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 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冊餘被放於嶋.
그 라이벌이 바로 둘째왕자였던 부여교기(夫餘翹岐)였다. 부여교기는 의자왕에게 패해 어머니(무왕의 백제출신 새왕비), 무왕의 공주 4인, 수상으로 서열 1위인 대좌평 사택지적, 내무부 장관으로 서열 2위인 내좌평 기미(岐味) 등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대신, 장군들(유명인사만 40여명)과 함께 왜국으로 추방된다. 그리고 부여교기는 중신겸자련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소아마자 등을 죽이고 왜국의 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644년에 벌어진 大化改新이며 그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일본사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할때 일본에서 지원군을 보내준 것은 단순히 문화를 전파해주던 고마운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천지천황(부여교기)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일본이 백제에서 떨어져나가 독립국이 되고 다음의 천무천황은『일본서기』를 써서 일본만의 역사서를 만들어낸다. 이 책을 쓸때 백제삼서라고 불리는 백제의 역사서가 참고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 이 책에서 도래인(특히 백제인)과의 관계 설정에서 조작이 가해진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런 시기적 상황과 맞물려 일본은 내부적으로 안정을 맞이하게 되고 이후 당과의 교류 속에서 국가 시스템이 정비된다. 이제 더이상 권력자의 위엄을 거대한 고분으로 과시할 필요는 없어졌다. 이미 일본은 단일정권 아래 통일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일본의 고분은 평면형태를 기준으로 대체로 전방후원분, 전방후방분, 쌍방중원분, 복립패식분(가리비조개형), 쌍원분, 원분, 방분, 상원하방분의 8종류로 구분되는데 분구의 주위에는 주호와 주제를 두른 것들이 많다. 이 중에서 전방후원분과 원분은 고훈시대에 각지에서 조영되었으나 나머지 분형은 한정된 시기와 지역에서만 보이는 것들이라 연속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럼 고분들이 시기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겠다.
먼저 전기고분의 경우 기내를 중심으로 쇠토우치(瀨戶內海) 주변과 규슈 북부, 동부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개 산 정상부나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구릉 말단부에 자리잡고 있다. 매장시설은 수혈식석실이 주이며 점토곽에 할죽형, 주형 등의 목관을 매장하는 경우도 있다. 원통형 하니와[植輪]가 고분 주변에 둘러지며 부장품으로는 거울, 검, 구슬, 팔찌, 철제 농공구 등 주술적 성격을 지닌 의기와 농구류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의 고분은 위에서 내려봤을때 전방부의 단부 너비가 후원부의 직경보다 작아서 정확히 열쇠구멍처럼 생겼다. 거기다가 전방부의 높이가 후원부보다 낮고 전방부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평탄하게 축조했다. 명확한 단축이 확인되는 것 또한 특징이다.
특히 전기고분의 경우 중국 거울을 그대로 묻거나 중국 거울을 모방한 거울을 묻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동범경(同笵鏡) 분유에 따른 의제적동족관계(擬制的同族關係)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방후원분 체제'다. '전방후원분 > 전방후방분 > 원분 > 방분'의 순서대로 크기와 종류에 따라 고분의 위계질서화가 이뤄지는데 이것이 고훈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밑바탕인 셈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하고 가장 부장품이 많이 들어가있는 전방후원분이 곧 이어 다가올 중기 고훈시대때 전국적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정형 전방후원분이 성립할 시기의 유형으로는 3가지가 있는데 원형분구에 그 직경의 1/2 정도 하는 길이의 방형돌출부가 부설된 '마키무쿠형'이 그 하나이고, 그것에 기반하여 생겨난 것이 4단의 단축으로 높은 후원분을 만들고 전방부도 보다 규모가 커져 278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등장하니 이를 '하시하카형'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이 '키나이형'인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전기고분의 유형이다. 정립된 분구형태, 장대한 할죽형목관(통나무형목관), 중국경의 대량매장이라는 특징을 가진 것이 바로 이것이며 전기 고분 220여기 중 57%를 차지하고 있다.
중기 고훈시대가 되면 훗카이도와 오끼나와를 제외한 전국에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조성되는데 이전 시기와 달리 평지에 입지한다. 앞선 시기의 수혈식석실과 점토곽이 약간 쇠퇴하고 장지형석관이나 가형석관 등이 직접 매납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큐슈 등 일부 지역에서는 횡혈식석실도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원통형 하니와만 쓰이던 이전과 달리 형상 하니와와 인물형 하니와도 제작되어 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분을 꾸미는데 특히 형상 하니와 중 말모양의 하니와는 당대 마구 연구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부장품으로는 칼, 검, 갑주, 마구, 철제 농공구 등 무구류가 주를 이루며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전방부 단부의 너비가 후원부의 직경과 비슷해져서 위에서 봤을때 전방부가 사다리꼴 모양으로 커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방부와 후원부의 높이도 비슷해지면서 전체적으로 규모가 상당히 거대해진다. 대신 전방부 및 후원부 정상의 평탄면이 약간 좁아지는데 이는 단축해서 고분을 축조하면서 높이가 높아지는데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주호와 주제대인데 주호(周濠)는 말 그대로 고분 주변을 두르는 해자이며 주제대(周堤帶)는 주호를 두른 둑을 말한다. 덧붙여 이때는 조출부(造出部)라 하여 전방부와 후원부의 연결부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는 특징도 확인된다.
또한 가야 고분들처럼 철정이 대량으로 부장된 고분도 확인되는데 이 모든 것은 당시 지배자가 주술이 아닌 실질적인 권력으로 사람 위에 군림하게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들이다. 오사카후 후지이데라시에서 하비키노에 걸친 동서 3km, 남북 4km 사이의 나라분지에 분구 길이가 200m가 넘는 전방후원분 7기를 포함하여 대소 100기 전후의 고분군이 산재하고 있는데 이 '후루이찌[古市] 고분군'에는 길이 425m의 응신릉으로 불리는 곤다고뵤야마 고분도 있다. 그리고 후루이찌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져있는 곳에 '모즈[百舌鳥] 고분군'에는 인덕릉으로 추정되는 다이센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봉분의 길이만 486m를 넘고 주호와 주제대가 3중으로 조성되어 있어 총 길이가 800m, 폭이 630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며 그 주변에는 물건들을 묻은 배총들까지 자리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바로 앞서 언급한 회청색 경질토기인 수에키 토기가 오사카[大阪府]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말 관련 문화가 급증하게 된다. 말의 사육과 순장, 승마 풍습이 시작됨은 물론이요 마구와 기마전술 등이 도입되는데 이를 토대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이다. 그리고 금공예품 제작기술의 발달과 함께 본격적으로 철 생산이 시작되었고 더불어 도래인들에 의해 각종 문화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후기에 가면 전방후원분은 쇠퇴기를 맞이한다. 기내 지역에서는 6세기 말, 지방에서는 7세기 전반에 소멸되는데 워분과 방분의 규모도 덩달아 축소되고 대신 작은 고분들이 밀집한 형태로 조성되는 군집분(群集墳)이나 횡혈묘군이 성행하게 된다. 그리고 종래에는 팔각분이 천황릉으로 대형 방분이 유력자의 무덤으로 채택되는 등 전방후원분 체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횡혈식석실에 가형석관(집모양석관)이나 도관 등을 안치했으며 큐슈에서는 장식고분도 성행하게 된다. 그리고 시기가 더 흐르면 횡구식석곽묘가 성행하게 되고 기내에서는 벽화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관동 지방과 큐슈 지방에서는 형상하니와가 계속해서 성행하지만 기내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종래에는 완전히 소멸한다. 그리고 토기 등의 일상생활품의 부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데 안정된 국내 정세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 시기 도래인들의 일본 정권내에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 시기 되면 전방후원분의 모양도 우스꽝스러워져서 전방부 단부의 길이가 오히려 후원부보다 커지고 규모도 작아지는데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이 이런 모양을 갖고 있어서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6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길이 318m의 미세마루야마 고분을 끝으로 더이상 전방후원분은 축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야마토시대 최대의 고분으로 추기 전방후원분으로서는 월등한 규모지만 이미 하니와가 공반되지 않는 등 이전에 비해 허술한 면이 없지 않다. 소위 대왕묘(大王墓)라 불리는 전방후원분의 조성이 끝나고 7세기 초에는 모든 전방후원분 체제가 종지부를 찍는데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화장묘가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화장묘 출현 이전의 마지막 고분이 바로 그 유명한 다카마츠츠카 고분이다. 고구려 문화의 일본내 영향에 대해서 설명할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벽화가 그려져있는 다카마츠츠카 고분인데 규모는 하나의 관을 매납하기 위한 최소 규모로 조성되어 있어 그리 크지 않지만 판상으로 다듬은 돌을 조합한 소석실 벽면에 회반죽을 바르고 7색 안료로 10신 및 일워과 구름, 정장의 남녀 군상, 성수와 사신도 등을 그려넣었다. 700년 최초의 화장이 이뤄진 이후 아스카의 귀족사회에 화장 풍습이 확산되기 때문에 다카마츠츠카 고분은 화장묘 출현 직전 단계에 해당하는 고분문화 최후의 고분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에서는 한반도의 삼국이 멸망하고 더 이상 도래인의 대규모 도래로 인한 격변기를 거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야말로 일본만의 독자적인 역사를 꾸려나간 것이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일본서기』
김현구 외 3명, 2002,『일본서기 한국관계 기사 연구』1~3, 일지사.
이도학, 1997,『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역사.
정한덕, 2002『일본의 고고학』, 학연문화사.
이시와타리 신이치로 / 안희탁 譯, 2002,『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천황』, 지식여행.
첫댓글 이정기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전방후원분 정리한 내용입니다. 사족이 조금 많이 들어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표로 정리한 그림이 하나 있는데 못 찾았으니 나중에 찾게 되면 올리겠습니다. 별건 아닌데 이해하는데는 그림만한게 없으니까요. 그럼 이만.
잘 아는게 없기는 합니다만.. 3월 24~25일에 전남 지방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배운 게 별로 없어 너무 모르지만.. 전방후원분 몇개를 보고 왔습니다. 그 중 해남 방산리 고분과 광주에 있던 고분군은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면 볼 수록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고 느꼈고요.. 광주에서 해남, 강진 쪽으
로 갈 수록 그렇더군요. 직접 걸어다니면서 보는 것이라서 위에서 보는 모습은 자세히 모르겠고요.. ㅠㅜ 잘 모르지만 직접 가서 보고 느끼는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뭐니뭔해도 유적과 유물은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는게 가장 좋겠지요. ^^ 주변에 미처 수습못한 토기편이라도 건지면 더 좋구요. 암튼 좋았겠습니다. 전남 지역으로 답사다녀오셔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