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전날 답사를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무거웠다. 그런데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들이 당일 아침에 갑자기 못간다고 해서 나는 조금 화가나고 짜증스런 기분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2시간쯤 지났을까? 부안, 그 중에서도 백산 봉기터에 제일 처음 도착했다. 그 한 곳에 모인 학생들은 거의 천여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그때 주최하는 곳이 정말 대단한 조직이란걸 느끼게 되었다. 백산 봉기터는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수만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널리 알린 역사적 장소이기에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해발 47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부안, 김제, 고부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고부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로 아주유용하게 작용했던 장소였던것 같다. 이 곳에서 생긱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란 말은 실로 농민들의 강건함을 알수 있는 말이라 하겠다. 이 곳에서 읽혀진 백산 창의문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이날을 위해 얼마나 굳게 마음을 먹고 그들의 뜻을 당당히 알리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니 정말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그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전봉준 고택이다. 사람은 많고 시간은 없고 해서 자세히는 살피지 못했으나 전봉준이 살았던 집으로 1894년에 고부농민봉기때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완전히 소실되지 않아 후에 보수한 것이라 한다. 보관이 잘 되있어서 아주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차에 빨리 올라타란 말에 허겁지겁 달려가 그 다음 도착한 곳은 만석보 유지비였다. 이 곳에 도착해서 주위에 보인것은 온통 논과 물이였다. 조선 후기에 수전 농법이 보편화 되면서 농민들은 수확량을 증대 시키기 위해 물이흐르는곳에 보를쌓고 이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갑오년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농민들이 쌓아 사용하고 있던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그 하류에 새로 보를 쌓고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한다. 이에 전봉준, 김도상등 고부군민들이 두 차례에 걸쳐 고부관아에 수세 감면을 진정하였으나 강제로 쫓겨났다. 급기야 전봉준의 지휘아래 고부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부셔버렸다. 여기 만석보는 고부 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인 것이다. 이 곳을 소개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열연하시던 다른반 교수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학생 일부는 열심히 받아적지만 다른 학생들은 장난치기에 바빠보였다. 좀 큰 학생들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사람도 많았지만 힘이 드는지 쉬는 사람들도 많았던거 같다. 나는 그래도 설명을 들을려고 노력한 사람중 한사람이였던것 같다. 백산성에서 부터 약 30~40분 정도 걷는 다기에 나는 뭐가 있는줄 알고 기대를 하고 열심히 따라가 보았지만 논과 밭밖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에 허덕이는 나에게 주어진것은 빵과 우유 였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우린 잠깐의 휴식을 갖고 다시 차에 오르고 내리고 보고 하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친구의 도시락을 뺏어 먹는 기쁨이란 역시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잠깐동안의 점심시간을 갖고 약 1시간 남짓 마당극을 보았다. 마당극 제목이 '밥'이었는데 정말 극단 길라잡이의 감칠 맛나는 연기가 우리를 한바탕 웃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마당극은 사람들을 단순히 재미삼아 보게 한것이 아니었다. 나를 세상의 밥이 되게 해달라는 그런 간절한 소망같은 것이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웃고 나서 열심히 또 차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고부 향교이다. 이 곳에서 역시 교수님의 연설은 계속되었지만 주위의 소란으로 잘 듣지는 못하고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전 건물은 임진란때 소실되어서 1597년에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고부 초등학교는 관아가 있었던 자리라 한다.
마지막으로 사발통문 발견지와 동학혁명모의탑에 들렀다. 조병갑의 온갖 수탈로 고부 농민들은 수차례 조병갑에게 진정서를 내고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난민으로 몰려 내쫓기곤했다. 그래서 전봉준을 비롯해 많은 농민들은 송두호의 집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했다. 조병갑을 죽이고 서울로 올라가자는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사발통문을 각 마을 집강들에게 보냈다. 여기서 사발통문은 사발을 엎어놓고 둥그렇게 관계자의 이름을 적어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적은 것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병갑의 발령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원도연 교수님께서 잠시 고개를 하셨는데 지금은 마을이름이 주산이지만 예전엔 대뫼였다 한다. 예전의 마을이름을 몰라 다른 교수님께 여쭈어 보던 교수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교수님 말씀대로 사람이 너무 많이 알다보면 다른것 잊어버릴수도 있는것이다.
이 장소를 마지막으로 모든 답사는 끝이 났다. 국사를 싫어하는 나에게 강의실에서의 수업이란 정말 독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좀 들은 것들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보니 더 생생하게 그런 상황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 때 당시의 정치 때문에 농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느꼈고 그들이 희망했던 동학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들이 이룩하려 했던 그 역사적 의의는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