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따라 밤이 길어감에 남는게 시간이다. 잠을 안자고 살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잠이란 것도 마음껏 할 수없어 삶을 주름지게 만든다.
그 남는 시간... 유튜브를 통하여 옛날 드라마를 보게되었다. 그중에는 '드라마 시티'라는 프로가 있다. 그러나 옛날 것들이라고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대부분 지금도 담장위를 걷듯, 소시민들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슬프거나 마음찡한 사연들로 꾸몄다.
그걸보면서 나 자신은 너무 편하고,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힘들게 봉사활동을 하고, 엉뚱한 곳에 귀를 기우리는 것도 그러한 마음이 섞였다.
영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 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 라고 말했다.
채프린의 말처럼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그렇다면 각기 인생의 드라마 주인공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의 역활이 주목받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다면 어느 관객이 드라마를 보겠는가?
어느 종교든 전생이나 조상의 대물림으로 태생부터 죄인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래서 모든일에 잘되면 종교나 신굿쟁이의 덕이고, 잘못되면 자신이나 조상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살아가며 그 죄값을 치루어야 비로소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불교 사후세계에는 10개의 지옥이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죽으면 처음 49일동안 7일마다 한개씩의 지옥관문을 거치며, 그곳을 관장하는 집행대왕에게 심문을 받게된다.
그때마다 이승의 유가족들이 제물을 바치며, 저승가는 이를 천국으로의 선처를 구하는 로비를 한다.
7관문을 통과하면, 100일째는 제8대왕, 1년째는 제9대왕, 3년째는 제10대왕의 최종 심판을 거쳐 비로소 천국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불교 회심곡에는 무기를 든 일직사자 월직사자에 이끌려 죽음의 길을 가며 살아생전 삶을 조명하여 어느 항목에서 구제를 받을 것인가에 대한 죽은자의 그 심문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를 살며 뭔가 표나게 살다가는게 맞는 것 같다. 그래야 위의 각과정에서 자신을 부각시켜 심판에서 유리하게 진행되도록 묘수를 쓰는 것이다.
아닌말로 어느 관문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면, "나를 왜 몰라주느냐"고 떼쓰며 고함이라도 질러, 최상층에 계신 염라대왕의 관심이라도 얻어 일단은 그곳까지 불려올라가는 특별한 광영을 볼수도 있지 않겠는가?
남에게 죄를 짓지 않더라도, 베푸는 것 없이 '내배가 부르니 세상이 아름답다'라는 식의 너무 평범한 삶엔 할 이야기 꺼리가 없다.
군대생활을 힘들게 한 사람일수록 경험담이 많고, 다른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음을 다녀온 사람들은 잘 느끼게 되듯 말이다.
그래서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 남의 아픔도 알고, 도움도 주게 되는게 세상 인심이다.
내가 불교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것을 받들거나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른 종교측면에서는 불교의 경우처럼 드라마틱한 심판과정(심급제도?)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해, 내가 들은 짧은 지식의 불교적 이야기를 재미삼아 가져오게 되었다.
게다가 알맹이 없는 줄거리는, 요즘시대 철거민촌 쓰레기통에서나 보임직한 구닥다리인 '권선징악'을 추구하고자 함에있다.
하룻밤쯤 잠들지 않는다고 밤낮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글을 쓰고자함도 아니다.
나는 고요하고 적막한 그 공간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가진다. 누군가가 잠든 이 순간에도 지구는 쉬임없이 돌고 있으니, 모두가 혼돈에 빠져사는 탓에 티비속 맛집들의 출현처럼 더불어 또다른 역사는 연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