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책을 써내야 '多作'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우리시대 상징적인 다작 학자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40년 동안 1백여권이 넘는 저술을 기록하고 있다. 1년에 평균 3권은 썼다는 말이다. 1년에 3권도 많지만 이걸 40년 동안 유지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이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때 다작 학자로 꼽히는 이는 둘 정도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학자 모두 언론학자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로 인터넷서점의 검색창을 두드리면 총 108종의 책이 뜬다. 강 교수의 생물학적 연령이 49세인 점을 감안하면 김 교수에 뒤지지 않는 숫자다. 강 교수는 그 대신 공·편저가 많아 저술의 50% 정도를 육박한다. 백선기 성균관대 교수(신문방송학)의 페이스도 무섭다. 백 교수는 올해에만 저서 2권, 역서 3권을 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번역서를 포함해 30권의 저술을 냈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백 교수는 그 이유를 "언론계에 사건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해외이론을 빨리 따라잡고, 소개하고 싶은 개인적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본인은 전혀 많지 않은 숫자로 생각하고 있으나, 요즘 들어서는 책 내는 맛이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초기 5년 동안은 책을 낼 때마다 신선했는데 요즘은 했던 얘기 아닌가 싶은 감"도 있다는 것.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발휘하는 노익장은 무섭다. 김 교수는 지난 1993년부터 한해도 빠지지 않고 1권씩 묵직한 철학저서를 펴내 동료, 선후배들을 놀라게 한다. 번역은 없고 1백% 저술이다. 그것도 5백쪽을 넘어가는 거질들이다. 놀랍다고 하자 김 교수는 "학교가 완전히 절간이다. 책 쓰는 일 말고는 할 게 없다"라고 응답을 한다. 1학기는 연구, 2학기는 수업으로 학교가 돌아가는 게 다작의 비결이다. 그는 요즘 수요일에 수업을 하는데, 수업을 마친 다음날부터 그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다음 강의록을 작성하는 데 전심을 기울인다고 한다. 그 강의록이 1년치 모이면 책 한권 분량이 된다.
이는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여성학자로서 드물게 많은 학술서를 펴내고 있다. 한 교수는 1997년부터 8년간 12권의 학술서를 펴냈다. "내가 수업을 말로 잘 때우지 못해, 일일이 적다보니 그게 책으로 되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교수의 저서들은 내용들이 사방팔방 뻗치는 논문모음과 다르다. 테마가 분명하고, 좁고 깊게 얘기하는 성향이 짙다. 이에 대해 그는 "이상하게도 관심가는 데로 연구하고 논문을 쓰다보면 일관성 있는 내용이 된다"라고 말한다.
다작 저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일단 글을 빨리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와 생각하기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게 공통점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실과 집을 왔다갔다하는 게 전부인 전형적인 생원의 삶이다. 사회문화 비평집을 유난히 많이 펴낸 현택수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얼마전 경기도 깊숙한 곳으로 이사를 갔다. 북적대는 게 싫어서다. 그런 후 한 달에 한번 정도 외출을 한다. 볼일 볼 것을 하루에 맞춰 편집한 후 집에서 나온다. 사람들과 약속도 잘 하지 않는데 만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 오가는 시간이 더 든다는 게 이유다. 이런 데서 아낀 시간을 글쓰는 데에 투자한다. 현 교수는 일단 단어 하나의 모티프만 떠오르면 무조건 쓰기 시작한다. 생각이야 저절로 따라온다고 한다. "빼놓을 수 없는 다작의 조건은 여행"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만큼 글쓰기를 자극하는 게 없다는 것.
하지만 너무 무리한 글쓰기는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해마나 동식물 생태에세이집을 펴내온 권오길 강원대 교수(생물학)는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 "老眼도 당뇨도 아니라고 했다.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최근에는 어깨심줄도 당긴다"라고 그는 털어놓는다. 얼마나 많이 썼길래 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 정도다. 내년 8월 정년을 앞둔 권 교수는 현재 10권 분량으로 생태에세이 전집을 준비중이라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좀 쉬시는 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쓸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컴퓨터 앞을 떠날 수 없다고 답한다.
학문의 세계에서 다작과 과작은 가치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다작은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추동되며, 많은 경우 과작은 학문에 흥미를 잃은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다작은 칭송의 대상이다. 다작 학자들에겐 끊임없는 탐구열과 잘 짜여진 컨셉트, 그리고 물 흘러가는 글쓰기가 삼박자로 갖춰져 있다. 우리시대 또 하나의 저술가인 철학자 김용옥 씨를 보면 그의 저술 '여자란 무엇인가'(통나무 刊)가 보여주는 게 바로 그런 삼박자다.
여기 언급한 저자들 말고도 철학에서는 이진우 계명대 교수, 역사학에서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문학에서는 김욱동 서강대 교수, 사회학은 홍성민 동아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지리학의 최병두 대구대 교수, 자연과학의 최재천 서울대 교수, 이덕환 서강대 교수 등이 다작 학자로 거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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