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경부선 루트가 병점역에서 천안역으로 연장 개통
20일 수도권 전철의 경기 병점역에서 충남 천안역까지 47.9㎞구간이 개통됐다. 이날 전철을 탄 시민들은 갈아타지 않고 2시간 안에 천안과 서울 도심에 닿을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첫날 전철의 승객은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인지 그리 많지 않았다. 청량리,동대문, 서울역, 용산역 등에서 출발하는 천안행 전철은 서울 시계까지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경기도에 들어서자 한 량에 10여명만 있을 정도로 한산해졌다.
이날 오후 2시17분 청량리에서 출발한 천안행 열차를 탄 이근영(24)씨는 “인터넷 지하철 동호회에서 활동하는데, 아침 천안행 급행열차를 시승하고 난 뒤 또 타는 것”이라며 “기존 수도권 전철, 지하철망에 비해서 승차감이나 편의시설 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열차는 수원역과 병점역을 지나 새로 뚫린 구간에 들어서자 시속 110㎞까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목포행 무궁화호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렸다.
한국철도공사 구로승무사무소 변기식 차장은 “무궁화호가 시속 120~130㎞로 달리는 것과 견줘보면,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객실에서는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변 차장은 “전철은 100㎞를 넘으면 보통 약간은 흔들리기 마련”이라며 “열차가 지연돼 늦어 속력을 내야 할 경우 흔들림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직산역은 근처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져 이용객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병점역과 천안역 사이 나머지 6개역은 많은 승객들이 ‘서울 가는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열차는 도착 예정시간보다 10분 늦은 오후 4시21분에 천안역에 도착했다.
서울역, 종각역, 청량리역 등 서울 도심에서 2시간 정도면 천안 시내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변 차장은 “개통 첫날이라 일반열차와 급행·완행전철의 대기시간을 잘 맞추지 못했다”며 “기관사와 승무원들이 적응이 되는 대로 정시 운행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열차는 오후 4시34분 급행 전철로 간판을 새로 달고 용산역으로 돌아간다.
천안역 승강장은 서울행 무궁화호 승차권을 사는 사람이 없어지고, 전철 승차권을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서울역에서 천안역까지는 일반·급행 구분없이 2300원이다. 시간은 일반전철이 112분, 급행이 79분이 각각 걸린다. 평균 60분이 걸리는 무궁화호의 운임이 5400원인 점에 견줘, 급행전철은 경제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천안역에서 일하는 역무원 강재구(24)씨는 “급행전철은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밖에 없으므로, 미리 시간을 알고 나와야 편하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삼성전자 천안공장까지 출퇴근하는 정석원(31)씨는 “시간에 맞춰 회사 버스를 타야 했던 게 불편했지만, 전철이 생겨 부담없이 오갈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한겨레
[2001년] 조지 W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정오 (한국시간 21일 오전 2시, 이하 현지시간) 취임선서와 함께 제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함으로써 8년간에 걸친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렸다.
워싱턴의 의회 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온 국민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면서 교육개혁과 조세감면 등 대선 당시 제시했던 공약들을 성실히 추진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방관자나 피지배자가 아닌 시민(Citizens), 책임있는 시민이 돼 봉사의 공동사회와 품격있는 국가를 건설하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날 취임식은 상하 양원 의원, 대법관, 외교사절 등 귀빈 1천여명과 일반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날 오전 11시30분부터 의사당 앞에서 거행됐으며 워싱턴시 일대에는 축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시위대도 대거 몰려들었으나 큰 불상사는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41대)의 장남으로 존 애덤스(2대) 및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6대)에 이어 176년만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의 부자 대통령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의 측근들은 부시 대통령이 취임 직후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마지막 조치들을 취소하거나 연기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지체 없이 행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2001년]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 사임-아로요 부통령, 대통령 승계 ←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
뇌물 수수 혐의로 퇴진 압력을 받아오던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피플 파워’에 밀려 2001년 1월 20일 마침내 사임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반 에스트라다 운동을 이끌어온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 부통령이 이날 신임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날 오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15만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말라카냥 대통령궁을 향해 평화적 시위를 벌이자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국민통합과 질서회복을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사임이 발표되자 시위군중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깃발을 흔들며 ‘승리’를 자축했으며, 필리핀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사임후 취임한 아로요 대통령은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필리핀 최고의 인기 정치인이다. 마닐라 도심에서 수천명 여성 시위를 선도하는 등 반 에스트라다 진영의 선두에는 항상 아로요가 있었다. 아로요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고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아버지는 1965년 대선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마르코스를 축출한 ‘피플 파워’는 마침내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학교수 경력의 아로요는 원래 아키노 정부의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을 시작한 경제전문가. 1992년 아키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필리핀 민주투쟁당(LDP)의 공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1998년엔 필리핀 역사상 최대인 700만표차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조선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사적인 총선거, 자치정부 수반에 아라파트 당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총선거가 1996년 1월 20일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및 가자지구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1백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유권자들이 자치정부 수반 겸 자치회의 의장과 88명의 의원들을 선출했다.
수반 선거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무명의 여성운동가 등 2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88%의 압도적 지지로 아라파트 의장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과 이스라엘과의 평화 완결을 위임받은 자치정부 수반(대통령격)으로 당선됐다. 아라파트는 이날 실시된 자치정부 수반 선거결과 총 유효투표의 88.1%를 얻어 9.03%를 얻은 샤미아 할릴 후보를 누르고 자치정부 수반으로 당선됐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이번 팔레스타인 총선의 성공적인 실시는 평화에 대한 지지를 표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면서 환영했다. /조선
[1993년] 오드리 헵번 사망 ←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에서 청순한 모습으로 전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1993년 1월 20일 장암과의 오랜 투병 끝에 63세를 일기로 스위스 로잔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1929년 3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헵번은 1951년 영화계에 데뷔, ‘로마의 휴일’(1953년)에서 깜찍한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과 함께 ‘할리우드의 요정’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헵번은 이후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어두워질 때까지’(1967년) 등을 통해 1950∼60년대 최고 인기여배우로 활약했다.
26편의 작품을 통해 티없이 맑고 순진한 여성상을 표출해 온 헵번은 1960년대 이후 이따금 단역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것을 제외하고는 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1988년 유니세프의 친선대사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인도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특히 말년의 4년간을 국제아동기금 순회대사로 세계 각지를 돌며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동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헌신적으로 전개,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92년 9월 투병 중에도 헵번은 기아와 질병의 땅 소말리아를 직접 방문, 전세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조선
[1989년] 조지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 취임 ← 조지 부시(Bush, George Herbert Walker)
조지 부시(Bush, George, 1924~ )는 매사추세츠주(州) 밀턴에서 출생했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2∼1945년 항공모함 탑재 뇌격기 조종사로 종군하였고, 1948년 예일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3년 자파타석유회사를, 1954년 자파타원양회사를 공동창설, 이사장으로 있었고,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4년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후 1966년 텍사스주(州) 제7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0∼1973년 국제연합 주재 대사, 1974∼1975년 국무성 베이징[北京]연락사무소 소장으로서 대(對)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힘썼으며 1976∼1977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다. 1980년,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R.W.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두 차례 부통령을 지냈으며, 1989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후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B.클린턴에게 패하여 재선에 실패하였다. 1982년, 1989년, 1992년, 2001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조선
[1981년] 이란, 미국인질 52명 석방
1979년 11월 4일 이란 회교 학생들에 의해 억류되었던 52명의 미국 인질들이 4백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직후 풀려났다. 미국과 이란간의 중개역할을 한 알제리 정부가 미국이 합의해 준 인질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이란의 동결자산 해제와 영국은행으로의 송금을 이란정부에 약속함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된 데 따른 것이었다.
또한 인질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진데다 對이라크전에 전념하기 위한 이란측의 계산도 작용했다. 석방된 인질전원은 알제리를 경유, 서독의 미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카터행정부는 인질구출을 위해 무력구출작전과 경제봉쇄 등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퇴임직전의 마지막협상에서 성공, 인질들을 돌려받았다. /조선
[1980년] 카터 미국 대통령,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촉구
공산권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인 22회 모스크바 대회(1980. 7. 19 ~ 8. 3)는 올림픽 사상 최악의 불구 대회였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하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모스크바 대회를 보이콧했다. 미국은 참가 거부에 그치지 않고 개최지를 변경하거나 연기하자는 적극 전략을 놓고 맹렬한 정치 공세를 취했으나, IOC는 어느 한쪽 강대국 편을 들 수 없어 스포츠와 정치의 분리 명분을 앞세워 미국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호소에 동조, 자유진영 20여 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81개국 6천여 선수가 참가, 대회는 예정대로 강행했다.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국가들은 선수를 파견했으나, 소련의 무력 외교에 항의, 국기 대신 오륜기 또는 각국 올림픽 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했다. 입장식에서 차기 개최국인 미국 국기 대신 로스엔젤레스 시기가 게양됐고, 폐회식에서도 <로스엔젤레스에서 다시 만납시다>로 표시됐다.
올림픽 강국 미국, 서독, 일본이 불참하자 경기는 소련과 동독의 독무대였다. 이 두 나라는 전체 메달의 51%를, 금메달의 60%를 차지했으며, 소련이 80개의 금메달로 종합1위를, 동독은 47개의금메달로 2위를 했다. /naver
[1969년]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에 취임 ← 닉슨(1970)
리처드 닉슨(Nixon, Richard, 1913~1994)은 1913년 캘리포니아주(州) 요버린더에서 출생하였다. 휘티어대학교와 듀크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개인법률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해군 소령으로 참전하였으며, 종전 후인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원시절에는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에서 알자 히스 등의 대소협력(對蘇協力)을 고발하여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5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 D.D.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 재선되었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후보 J.F.케네디에게 패하였고, 1962년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선거에서도 실패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나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H.험프리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1972년 재선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고, 1969년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하여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유명하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사건(Watergate Case)’으로 말미암아 1974년 8월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미국 사상 처음으로 임기 중에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1981년부터 1994년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국제문제 관련 집필과 국제문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정부의 국제문제 자문에 대한 조언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naver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 통과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이 1962년 1월 20일 만들어졌다. 이 영화법의 주요 골자는 검열제도를 비롯 영화제작신고, 상영허가, 상영정지 또는 중지권 부여, 그리고 영화업의 허가제도 등 규제적 측면 위주였다.
영화법으로 1965년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로 용공혐의를 받아 입건된 바 있으며,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성인영화라 할 수 있는 ‘춘몽’(1965년 제작, 유현목 감독, 신성일-박수정 주연)은 적나라한 정사 장면으로 유현목 감독이 외설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69년 박종호 감독의 ‘벽 속의 여자’, 신상옥 감독의 ‘내시’ 역시 외설 혐의로 검찰에 입건됐다.
그러다 1996년 10월 4일, 영화법에 대해 위헌제청 및 헌법소원 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와 관련된 내용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따라 영화진흥법이 개정(1997.10.11 시행)되었고, 그동안 영화 사전심의를 감독했던 공연윤리위원회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강화된 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바뀌었으며 영화심의도 삭제나 수정하는 조치를 금지하고 등급분류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선
[1954년] 반공포로 7,700여명, 인도군 포로수용소에서 모두 석방
1954년 1월 20일, 이 날이 중립국 관리위원단의 포로 억류 기간이 6개월이 되는 마지막 날인데 인도가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줬어요. 포로수용소 마당에 삼거리를 만들어놓고 똑바로 가면 남한, 왼쪽으로 가면 북한, 오른쪽으로 가면 제3국으로 가는 거예요. 이 삼거리에서 운명의 선택을 하는 거지요. 여기서 인도행을 선택한 사람이 40명이나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인도 캠프에 모인 숫자가 약 1백명 되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탈출자가 생기더군요. 하여간 포로들은 수없이 저울질했던 거지요. ... (최인훈 '광장' - 김현숙 기자 시사저널 90-6-17) /Google
[1953년] 아이젠하워(Eisenhower, Dwight David) 미국 대통령에 취임 ←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34대 대통령으로 택사스 출신이다.
1915년 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맥아더 장군의 부관이 되어 필리핀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1943년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여 프랑스를 탈환하고 독일을 무조건 항복하게 하였다.
1948년에 퇴역하여 콜롬비아 대학 총장을 지냈고, 1952년 미국 34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일에서 이주한 메노나이트신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폭력주의가 특징인 메노나이트 교회의 독실한 신도였지만, 아들의 뜻을 존중하여 군인을 양성하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1915년에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성적은 평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 재직하였다. 당시 미군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았던 영국군과 그런 영국군을 고깝게 여긴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활약하였고, 그에 대한 평가도 전투 지휘관보다는 대기업의 총수같다는 평이 많았다. 유럽 전선에 파견된 후 최초로 지휘한 작전은 미군과 영국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토오치작전이었으며, 이후 서방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 6일)을 지휘하였다. 전쟁 중에 '아이크'란 별칭으로 줄곧 불렸다.
1952년에는 오랜 민주당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20년만에 공화당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한국전쟁 휴전조약을 이끌어냈다. 이는 그의 선거공약으로 선거운동 당시 한국전쟁 장기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으며, 실제로 당선 직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56년에 재선되었고, 1960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1960년의 방문은 미국의 대통령 신분으로는 최초의 방문이었다.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1952년]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교
한국 육군사관학교는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를 거쳐 1946년 5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사관학교로 발족(태릉에서 개교), 그 해 6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 9월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건군 초기에는 주로 외국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청년을 입교시켜 단기교육을 실시하였고, 1949년 정규과정으로 개편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일시 휴교하였다가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서 재개교하고 1952년 1월 수학기간 4년의 정규육사과정 생도 11기의 입교식을 가졌다. 육군본부에 직속되어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7∼21세의 대한민국 미혼 남녀 중에서 선발된 생도에게 만 4년의 교육을 실시하고 육군소위로 입관시킴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문학사·공학사의 학위를 수여한다.
[1936년]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영국왕 즉위
1894 ~ 1972
리치먼드 출생. 윈저공(Duke of Windsor)이라고도 한다. 조지 5세의 맏아들이다. 조부 에드워드 7세를 닮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황태자 시절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다.
조지 5세가 죽자 독신인 채로 즉위하였는데,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프슨부인과 열애, 1936년 12월 마침내 국왕 자리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 윈저공(公)으로서 그녀와 결혼하였다. 부인과 함께 윈저성(城)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묻혔다. /naver
[1936년] 영국 왕 조지 5세(George V) 사망
1865. 6. 3 ~ 1936. 1. 20
영국의 왕(재위 1910∼1936).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이다. 1892년 형 앨버트의 사망으로 왕위 계승권자가 되어, 1901년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서임되었다. 1910년에 아버지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1917년, 모든 독일계 작위 칭호를 버리고, 가명(家名)을 윈저왕가로 변경하였다. 1921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승인에 기여하는 등, 근대사에서 성공한 입헌군주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naver
[1961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취임 ← 케네디(1961)
“조국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십시오” 1961년 1월20일, 제35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Kennedy, John F., 1917~1963)가 취임연설을 통해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국민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제시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그는 존슨을 자신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로 선택하고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 진용을 강화했다. 케네디는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리처드 M. 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인간 공동의 적인 압제·빈곤·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든 투쟁의 부담을 함께 져나가자"고 요청했다. 재임 중 그는 쿠바 사태, 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과 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63년 11월 22일 그는 아내 재클린과 함께 댈러스를 방문하던 중 오즈월드에게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1939년] 낙랑고분 발견 ← 낙랑고분(채협총)
1939년 1월 20일 낙랑군의 중국계 관리들과 그 지배하에 있던 토착세력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낙랑고분이 발견되었다. 한(漢)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은 오래지 않아 대부분 소멸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났으나,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평양 일원을 중심으로 BC 108년부터 AD 313년까지 존속했다. 낙랑고분은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대표되는 고분으로, 중국적인 요소와 이 지역의 토착적인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덧널무덤은 땅을 파고 네모난 덧널[槨]을 구성한 후 그 안에 널[木棺]을 안치하고 마지막으로 전체를 흙으로 덮는 형태의 고분이며, 벽돌무덤은 땅을 파고 벽돌로 방을 구성해 지상에까지 축조한 형태의 고분이다. 낙랑고분 발견 당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로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에 관심을 나타냈다./브리태니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초 조선물산장려회를 만들어 ‘조선에 나오는 토산품을 사용하자’는 강연회와 가두시위 등 활동을 펼쳤다.
우리 토산품의 생산과 사용을 장려하고 우리 기업을 성장시켜 민족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조선물산장려회가 1923년 1월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에서 창립됐다.
회의가 길어져 23일에 다시 모인 발기인들은 다가오는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옷과 음식, 일용품 등에서 조선물산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입을 것’ ‘음식은 소금ㆍ설탕ㆍ과일 등을 빼고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등을 행동지침으로 결정했다.
물산장려운동은 서울보다 평양에서 먼저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1920년 7월에 발기모임을 가진 후 1922년 6월20일에 조만식을 회장으로 한 물산장려회가 창립됐다. 창립초기에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데는 조선일보ㆍ동아일보의 계속된 보도와 조선청년연합회가 현상모집한 표어가 크게 기여했다. ‘내 살림은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가 전국적으로 전파되면서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켜, 길거리에서는 ‘물산장려’를 외쳐댔고 학교에서는 국산교복 착용운동이 일어났다. 기생들까지 동참했다.
그러나 이를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일제의 탄압과, 토산품값 급등으로 기업과 상인들만 살찌우고 일반 서민들은 더욱 궁핍해지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나타났다.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회주의자들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향상과는 무관하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1937년∼1940년 경에 해체됐다. /조선
[1920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펠리니(Federico Fellini) 출생 ← 펠리니(1965)
1920년 1월 20일 태어남 / 1993년 10월 31일 죽음
"나의 보다 진정한 직업은 내 눈에 보이는 것, 나를 감동시키고 매혹시키는 것, 놀랍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일인 듯싶다." - 페데리코 펠리니
펠리니는 회화적 형상과 환상에 관심을 쏟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다. 리미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유랑극단원, 만화가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결혼하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로셀리니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신사실주의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환상적인 영화 세계를 추구했다. 앤서니 퀸과 마시나가 주연한 <길 La Strada>(1954)은 사회문제를 다룬 신사실주의 영화들과 달리 개인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그려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8½ Otto e mezzo>(1963)은 예술적 영감의 본질을 가장 영화답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브리태니커
[1896년] 시인·소설가 김명순(金明淳) 출생
1896. 1. 20 평양 ~ 1951. 6. 22 일본 도쿄.
호는 탄실(彈實)·망양생(望洋生)·망양초(望洋草). 주로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다. 평양 명문인 갑부 김가산 소실의 딸로 태어났다. 1911년 진명여학교(지금의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 1939년 도쿄로 건너가 생활고와 복잡한 연애사건으로 정신병에 걸려 1951년 아오야마[靑山] 뇌병원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7년 〈청춘〉의 현상소설모집에 단편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19년 도쿄 유학시절에 전영택의 소개로 〈창조〉 동인으로 참여했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은 그녀를 모델로 한 것이다.
초기에는 소설에 가까운 산문체의 시를 썼는데, 주로 단순한 감정토로와 내부적 충동에서 빚어지는 위기의식, 현실과 이상이 타협되지 않은 현실적 파탄과 정신적 긴장을 노래했다. 시집으로 〈생명의 과실〉(1925)을 펴냈고, 소설로는 여주인공의 심리묘사에 치중한 〈칠면조〉(개벽, 1921. 12~1922. 1)를 비롯해 〈선례〉(신여성,1923. 11)·〈꿈 묻는 날 밤〉(조선문단, 1925. 5) 등을 발표했다.
[1891년] 독립운동가 이신애(李信愛) 출생
1891. 1. 20 평북 구성 ~ 1982. 9. 27.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자경(慈卿). 아버지는 세건(世建)이다. 1913년 결핵으로 개성 호수돈여숙(好壽敦女塾) 3학년을 중퇴하고, 1914년 4월 원산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를 졸업한 후 원산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 두남리(斗南里) 분교 교사로 있으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8년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만나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고 12월 루씨여학교를 사직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5월경에는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혈성부인회(血誠婦人會)에 가입, 장선희(張善嬉)와 더불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주력했으며, 9월 강우규(姜宇奎)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거사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0월 초순 항일비밀단체인 대동단(大同團)에 입단하여 단무를 맡아보는 한편 기관지 〈대동신보〉의 간행을 보조했다. 그해 11월 단장 전협(全協)의 지시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하이[上海] 망명을 주선했으나, 12월 망명이 실패하고 많은 단원이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를 면한 그녀는 12월 28일 안국동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3월 1일 3·1운동의 첫돌을 맞아 유관순(柳寬順)과 함께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여 유관순은 순사하고, 그녀는 크게 부상당했다. 그후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3년 8개월 만에 출감했다. 8·15해방을 맞아 충청남도 공주에서 한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그뒤 여성계몽운동에 진력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875년] 프랑스 화가 밀레(Millet, Jean-Francois) 사망 ← 프랑수아 밀레
1814. 10. 4 ~ 1875. 1. 20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75년 1월 20일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61세였다. 노르망디의 그레빌에서 태어난 밀레는 셀부르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1837년 파리로 이주해 들라로슈에게 사사했다.
35세인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삶과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 시절에 루소, 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경험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바르비종파는 19세기 중엽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한 풍경화가들을 지칭한다. 밀레, 루소, 코로, 뒤프레, 트루아용 등의 화가가 대표적이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1868년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조선
[1868년] 한말의 의병장 박윤식(朴潤植) 출생
1868. 1. 20 충남 청양~1939. 1. 29.
을사조약 체결 후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해 활동했다. 궁내부주사를 지내다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인의 만행과 을사오적의 매국적 행위에 분노해 사직했다. 이후 정재호(鄭在鎬)·김덕진(金德鎭) 등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해 민종식(閔宗植)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향관(餉官)에 취임했다. 1906년 4월 정산·홍산·서천·남포 등지에서 의병대를 조직하고 총포와 탄약을 입수해 700여 명의 병력으로 홍주성(洪州城)을 공격하고 5월에 함락시켰으나 일본군의 습격으로 다시 빼앗겼다. 이후 재탈환을 모색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평리원 재판소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1907년(융희 1) 7월 일본 당국에서 고위 관직으로 회유했으나 거부하고 항일사상 선양에 주력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일제 조선강점의 부당함을 공언하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날 밤 탈옥했다. 그후 사망할 때까지 폐인을 가장하고 은신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은신생활 중 항일의병투쟁에 관한 기록을 정리한 〈의거실기 義擧實記〉가 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265년] 영국 최초의 의회가 몽포르 백작에 의해 소집 ← 몽포르 백작
영국의 귀족, 정치가 몽포르(Simon de Montford, 1208?~1265)는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쪽 계통을 따라 영국 레스터 백작 집안을 계승하였다. 1229년 영국에 건너가 빼앗긴 레스터에 대한 권리를 찾고, 1231년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왕의 실정(失政)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그 지도자가 되어, 1258년 옥스퍼드 조례(條例)를 왕에게 인정시켰다. 그러나 왕이 이를 무시하자, 1262년 궐기, 1264년 (5월 14일) 루이스전투(Battle of Lewes)에서 왕을 포로로 하였다. 1265년 1월 (20일) 귀족 ·성직자 외에 기사 ·시민도 참가한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이것이 영국의회의 시작이다. 그해 8월 (4일) 황태자 에드워드(나중의 1세)와 글로스터공(公)을 상대로 이브셤에서 대전하였다가(Battle of Evesham) 패배하여 사망하였다. /naver
그 밖에
2009년 ‘용산 철거민 진압 참사’ 6명 사망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 취임식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총재 김대중, 대표 서영훈)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2기 취임
1997년 신창원, 부산교도소 탈옥
1996년 천호대로 4.5km 구간 버스중앙전용차로제 실시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취임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제40대 대통령에 취임
1965년 존슨, 미국 제36대 대통령에 취임
1990년 문성길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 첫 대미 수출 선적
1984년 미국의 자유형 수영선수 와이스멀러 사망
1980년 민주사회당 창당(당수 고정훈)
1972년 동국정운원본 전6권 발견
1969년 한글 전용을 반대한 충남대 유정기 교수 파면
1960년 소련, 태평양 로켓 실험 성공
1949년 미국 트루먼대통령, 미개발국 원조계획 제창
1947년 입법의원, 신탁통치 반대안 가결
1944년 한국학생, 일본학병으로 동원 개시
1942년 반제회의
1925년 일본, 소련과 국교조약 조인
1919년 문예동인지 ‘신천지’ 창간
1917년 안곽 ‘조선문법’ 간행
1915년 호요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출생
1906년 독일 사회민주당, 베를린에서 시위
1906년 외교관, 공사제, 영사제 폐지
1900년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 사망
1877년 미국 현대무용 혁신가 세인트 데니스 출생
1783년 영국, 베르사유조약 체결로 프랑스·에스파냐와 강화 맺음
1716년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출생
1628년 아일랜드 정치가 헨리 크롬웰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