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먼 일가 진주 김종기 군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에게 다소 문명이 있다 하여 먼저 편지를 보내 교유를 청하였다. 이후로 문자와 관련된 나의 일을 도운 적이 매우 많았는데 『한사이정』의 간행에 더욱 크게 힘을 다하여, 오백 년 왕조의 명철한 왕과 왕후, 어진 재상과 장수, 이름난 유자와 선비, 효자와 정녀의 일이 거의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야말로 천하의 장자가 아니겠는가. 하루는 군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나의 벗이, 내가 독산에 살고 있다 하여 독은이라고 불렀는데 오랜 시간 동안 전파되었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설 하나를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은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니, 그대의 벗이 가리키는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군이 말하였다. “그대가 그저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내가 말하였다. “위야나 임포 같은 부류는 구준, 한기, 범중엄 등 여러 사람이 등용되던 때를 만나 자신의 재주가 그들만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래 단계의 은자입니다. 매복이나 관녕 같은 부류는 왕망, 조조에게 차마 더럽혀질 수 없어 옥사산 및 요동의 들판에 은거하였으니, 이는 가운데 단계의 은자입니다. 장량은 한(韓)나라의 멸망을 슬퍼하여 만금의 재산을 흩어 역사(力士)를 뽑아 진시황을 습격하려다 실패하고는 한(漢)나라에 의탁하여 계책을 세워 끝내 진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신선술과 벽곡술을 칭탁하여 자신을 보전하였으니, 위 단계의 은자입니다. 아래 단계의 은자는 그대에게 걸맞은 부류가 아니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운데 단계의 은자는 그대에게 걸맞은 부류이지만 그들의 일이 자신의 몸만 선하게 하는 데 그쳤으니, 그대가 그들을 본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를 좋아하는 그대가 본받을 만한 은자는 장량이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인에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吾遠宗晉州金種驥君好文學, 以余薄有文名, 先馳書問交. 自是以往, 助余文字事者甚多, 而於韓史釐正之刊, 尤大出力, 使五百年明辟哲后賢相良將閎儒名士孝兒貞女之事, 庶幾得傳於後世, 此非天下長者哉! 一日君抵書言曰, 吾朋友以吾家於篤山, 呼爲篤隱, 久而傳播, 故遂不得辭, 子可爲一說否? 余曰, 隱之義非一, 子之朋友所指之義, 在於何歟? 君曰, 子第詳言之. 曰, 如魏野林逋之流, 當寇準韓琦范仲淹諸人登庸之世, 自知其才之不及諸人, 而不之仕, 此隱之下也. 如梅福管寧之流, 不忍受汚於王莽曹操, 而避居于玉笥山及遼東之野, 此隱之中也. 張留侯痛韓之亡, 散萬金之財, 募力士擊秦皇不得, 歸漢畫策, 竟以滅秦. 至其晩年, 托於神仙辟穀之術, 以全其身, 此隱之上也. 下焉者, 於君非其倫也, 不足言. 中焉者, 於君爲其倫, 然其事止於獨善其身, 則不足以使君效之. 以君之輕財好義, 所可效者, 將不在留侯哉! 孔子曰, 當仁, 不讓於師.
-김택영(金澤榮, 1850~1927), 『소호당집차수정잡수(韶濩堂集借樹亭雜收)』권2, 「독은별호설(篤隱別號說)」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