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지난 2월 23일에는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시민모임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tv 드라마에도 형무소 입구를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서대문형무소는 이제 역사관으로 일반인들을 맞이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에게는 한반도 전체가 감옥이었다.
반면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들을 가두기 위해 최신식 감옥을 지었는데 1907년 인왕산 기슭에 일본인이 설계하여 건립한 이곳이다.
형무소가 자리한 곳은 인왕산과 안산사이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여서 명당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조선시대때 청나라 사신이 오가던 길이며 사신을 따라 상인들도 오가던 번화가였다. 사신들의 집결지였기에 모화관이라 불리는 숙소가 있었고 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자가 나오는 등 물자와 사람의 유동이 많았던 곳에 감옥을 세운 것은 세계에 유래가 없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악재가 신의주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세워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일본의 감옥제도에 의해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한 시스템이었으며 조선총독부와 가까운 것도 이점에 속했다. 철로를 따라 각 도 번화한 도시에 감옥을 지은 것도 모두 항일의지를 끊기 위한 의도로 운영되었다.
일제는 약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불렀다.
종로의 감옥에서 500여 명을 데려와 수용하고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과 박해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은 곳이다. 가두어야 할 독립투사들이 늘어나자 1912년 일제는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또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이라 불렀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었다.
18세 미만의 소녀들과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까지 수용하였으며,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946년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로 바뀌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사하면서 형무소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려던 공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여자옥사 지하공간이 발굴되었다. 흙을 걷어내자 깊이 1.5m의 지하공간이 나타났고 그 이후 복원의 길로 들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설계도면에는 지하공간이 그려져있지 않다. 15개동 중 절반을 철거하고 현재 7동이 남아있다. 1988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1936년 건축도면-
<서대문 형무소 명칭의 역사>
1908년 경성감옥 신축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 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
1987 구치소 의왕시로 이전
1990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
역사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보행자 표시가 좌측통행으로 되어 있다.
요즘 모두 우측통행이라 그렇게 시행했는데 원래 좌측통행으로 설계된 건물이라 동선에 무리가 있어 다시 좌측통행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2층 입구에 섰다.
원래 식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전망이 좋았던 곳이란다. 언덕 중턱에 세워졌기에 서울역까지 바라다보이는 곳이어서 간수들은 전망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을거라고 안내한다. 흠...남영동에서 들은 이야기와 흡사하다. 가두는 사람들은 이곳이 아주 좋은 직장이었으리라..
입구에는 마지막 저항세력인 의병들의 흑백사진이 우리를 맞이한다.
초기에 가장 많이 수감된 분들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식민지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의병활동을 했던 분들로 사진은 여주와 이천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인데 나이가 어린 소년에서부터 중년, 장년 등 연령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 가장 오른쪽에는 신식군복을 입은 사람이 가담했음을 알게 한다.
벽에 붙어있는 인상표에는 신체기록을 적었는데 점과 종기의 위치 및 개수 등을 세세히 적어두었다. 그 옆으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씌운 용수가 전시되어 있다. 눈 부분에 구멍이 있는 곳이 용수의 앞부분에 해당한다.
2층 민족저항실에는 수형기록표가 빼곡이 전시되어 있다. 가나다순으로 되어있어 오른쪽 벽 위쪽으로 여운형, 유관순의 수형기록표를 확인하였다. 1987년에 치안본부에 있던 수형기록표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수하여 보관중이라고 한다. 수형기록표가 2장, 혹은 3장있는 분들도 있는데 사진 모습이 점점 초췌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독립운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유관순열사의 모습은 고문후유증으로 부운 얼굴이라 붓기를 빼면 17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1959년에 상량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사진-
감옥의 옥사는 적은 인원으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방사형배치로 되어있다. 간수가 있는 곳은 어둡게, 옥사의 방들이 있는 곳은 밝게 해서 심리까지도 통제하였다.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영국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징역이라는 말은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가두어둔다의 징, 일한다의 역. 언제까지 일하는가? 해떠서 시작하고 해지면 마친다. 공작사는 노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주로 방직과 목공이 이루어졌다. 그 때의 일을 기록해놓은 것이 있다.
* 김광섭 "나의 옥창 일기"
기상 나팔 소리에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중략)....
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무명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덕 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듯 찬바람을 훅 느끼며 창창한 대한천에 뛰어든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요. 아~하는 것은 입에 문 것도 없다는 증거다.
감옥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한 상태로 깨어나 맨 몸으로 이동하고 허들을 넘으며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해야 했던 굴욕.
그럼에도
*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통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고문실, 취조실등을 볼 수 있고 벽관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초기에는 계단의 왼쪽부분만 창고, 화장실, 휴게실이었는데 1945년 이후 전체가 고문실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고문의 종류는 100여가지라고 하는데 고문하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변형하였기에 더 넘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떠올랐다. 고문은 물고문, 성고문 이외에도 너무나 잔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그 중 손톱찌르기고문은 더 잔인하게 여겨졌다. 당시 고문도구에 의해 세균감염으로 질병이 더 생겼고, 손톱밑을 찌를 때 말초신경에 감염되면서 나병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아이들 체험용으로 있는 벽관은 원래 구멍이 없이 꽉막힌 상자라고 한다. 오랜시간 선채로 있다보면 관절이 쉽게 꺽이고 짧은 시간에 근육이 감소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 등으로 학도병, 위안부등을 동원했다. 노역의 수익금은 전쟁자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래놓고 자발적으로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노역을 하여 모은 돈으로 무기를 사서 바쳤노라 홍보물을 만들기도 했던 그들.
형무소는 1920년대 대대적 증축을 하여 3000여명이 수감될 수 있게 하였다.
투옥된 투사들이 만든 벽돌로 증축한 공간에서 다시 고문을 받고 회유를 받으며 지냈을 그 시간들에 먹먹해진다.
공작사를 지나 한센병동으로 가는 길에 옥사의 벽을 비교해주었다.
허옇게 바랜 벽돌이 있는 부분은 화장실이 있던 흔적이라고 한다. 이곳을 복원하면서 화장실을 떼어내고 벽돌로 벽을 막았는데 오히려 오래된 벽의 벽돌색깔이 더 진하게 보였다. 화장실이 있는 모습은 영등포교도소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형장에 다다르면 분노가 치민다.
면회왔다고 하고 불러내서 길을 가다가 꺾어지면 사형장으로 가는 길.
그 길앞에는 사형수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나무가 서 있다.
구치소 이전할 때 남은 사진을 확인해보니 담장안의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해설을 해주신 학예사는 아마도 와전된 이야기일거라 전한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은 신규간수 등 모두 퇴근을 금지하여 참석하게 하고 진행하였다.
집행된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내용을 들을 때는 그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의사등이 확인하고 옆의 문으로 옮겨 유가족에게 인도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실행되었을까 의심되는 부분도 많다.
안타깝게도 1945. 8. 15. 해방되던 그날에 다른 날보다 사형집행이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날 기록은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다. 4백여명이 일제 치하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165명의 기록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기록일것이다.
시구문을 보고 정문을 향해 걷다보면 바닥에 벽돌이 깔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닥에 깔려있는 벽돌을 아무렇게나 밟고 지나가지 말아야겠다. 자세히 보면 경성형무소 수감자들이 구운 흔적으로 마크가 새겨져 있다.
형무소옆으로 구치감을 새로 지어 사상전환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다. 구치감에는 미결수와 사형수가 수감되었다.
마지막으로 보는 건물은 여자들이 머물렀던 옥사이다.
유관순열사도 이곳에 갇혀 있었다. 밖에 쓰여있는 숫자는 방 번호라고 한다.
여옥사에는 아이를 낳은 사람이 2명 있었다. 그 중 1명이 박진홍이다. 사회주의 계열 노동운동가였던 그녀는 5회 수감되었고 3년간 독방생활을 했는데 나중에 임신한 몸으로 수감되어 근처의 적십자병원에서 출산하여 감옥에서 아이를 키웠다고 한다. 이름은 이철한이였다. 그러나 얼마 후 사망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된 다음날인 8월 16일. 수감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연설을 한 사람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꼽힌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이끌며 건국 준비를 했던 인물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여운형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한 숨고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