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KBS 제2 TV 에서는 2008년6월17일~8월19일의 기간 중에 "최강 칠우" 라는 제목의 월화 drama 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이 drama 가 막바지로 간 무렵에 TV 에서 이 방송을 몇 차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조선의 仁祖의 맏아들 昭顯世子의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mystery 를 파헤치고자 한 fiction 이었는데, 실제로 조선의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은 데에는 거대한 숨겨진 음모가 있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읍니다. 그 음모론에 끌려서 그 무렵의 역사 및 관련되는 주변의 역사들을 들추어 보니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그 무렵의 조선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향후의 조선의 역사 전개의 방향에도 크나큰 차이를 가져오게 한 분수령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역사적 내용들을 정리하여 이 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처음에는 다소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의 소현세자의 죽음의 의미가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실 껍니다. 이 글은 일곱 Section 으로 나누었으며, 목차에서 원하는 Section 을 click 하시면 해당 Section 으로 바로 가기가 됩니다. 또한, 각 Section 의 시작 부분에는 목차가 있는 시작 부분으로 되돌아 가기 click 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의 의미를 하나의 음악으로 모두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목차 바로 다음에 음악 세 개를 달고서 default 로 그 중의 한 음악이 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음악을 바꾸어 들으시려면, 목차 다음의 음악 player 셋 중에서 적절히 바꾸어서 play 하세요 ~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역사 공부가 되었습니다. 좀 길고 어려운 내용이지만, 시간 나실 때마다 조금씩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nc
아래의 표에서는 소현세자의 불운에 이르기까지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역사의 흐름을 정리하여 요약 표를 만들어 보았다. 이 표는 Europe 의 과학 문명과 기독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역사적 과정, 중국 대륙에서 淸이 일어서서 明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 朝鮮이 명에 의존하여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청에 복속되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현세자가 淸에 끌려가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적응하면서 살다가 풀려나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문화 충격에 의하여 버림 받는 과정 등을 요약적으로 그리고 있다.
독일의 천문학자 Johannes Kepler ( 1571 - 1630 ) 는 Graz 대학에서 수학 및 천문학의 강의를 하다가 1600년에 Praha 로 옮기면서 Tycho Brahe 의 제자가 되어, 함께 천문학의 연구를 계속한다. 다음해에 Tycho Brahe ( 1546 - 1601 ) 는, 16년간에 걸쳐 화성의 운행을 관측한 자료를 Kepler 에게 인계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 후에 Rudolf 2세의 궁정의 수학관이 된 Kepler 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화성의 관측 자료를 분석한 결과 Kepler 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이를 1609년에 「Tycho Brahe 의 관측에 입각한 화성 운행의 연구로 밝혀진 천체 물리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Kepler 의 법칙은 위의 그림에 알기 쉽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래와 같이 3개의 법칙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 법칙>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제 2 법칙>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직선의 면적 속도는 한 행성에 대하여는 항상 일정하다. <제 3 법칙> 임의의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3승에 비례한다.
영국 왕립 학회의 회장이었던 Isaac Newton ( 1642 - 1727) 은 1687년에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라는 책을 출간하여, Newton 의 운동 법칙과 아울러 만유 인력의 법칙을 주창하였다. Newton 의 이 두 법칙은 아래의 식과 같이 간결하게 기술할 수 있으며, Tycho Brahe 의 관측 자료로부터 얻어낸 Kepler 의 법칙은 Newton 의 이 두 법칙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것임을 보였다.
일상 생활에서 천문학의 지식이 유용하게 쓰이는 사례로는 달력의 날짜와 절기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과 일식, 월식 등의 천체 현상의 시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 해가 가장 짧은 동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 그리고 일식 및 월식이 일어나는 날짜 및 시각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 등이 천문학의 지식이 일상 생활에 요긴하게 적용되는 사례라고 하겠다.
Europe 은 동양에 비하여 천문학, 물리학 등의 과학 문명이 일찍 발전하였으므로, Europe 의 문명과 기독교가 동양으로 들어올 시기에 이것이 동양인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큰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천문학이 일상 생활에 잘 적용될 수 있는 분야들에 대한 지식들이었다.
Italy 의 선교사 Matteo Ricci ( 1552 ~ 1610 ) 신부는 Roma 대학 ( Università Degli Studi di Roma ) 에서 교육을 받았고, 1571년에는 San Ignacio de Loyola 의 예수회 ( Jesuit Society ) 에 가입하였다. 그는 동양에 선교하기 위하여 1578년에 Lisbon 을 출항하였으며, 인도를 거쳐서 1582년에 Macau 에 도착하였다. 이 때로부터 그는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차츰 북상하면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明 나라 조정의 徐光啓, 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들을 개종시켜, 이들로부터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을 얻었다. 그가 明 나라의 황제 神宗에게 바친 自鳴鐘 (탁상시계) 과 大西洋琴 ( piano 의 전신 ) 이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1601년부터는 北京으로 진출하여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처음에 Matteo Ricci 는 "交友論" 이라는 저서를 간행하여 明의 지식인 사회에 돌림으로써 크게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로, 그의 주요 저서로는 "天主實義" ( 漢譯西學書 라고도 함 ; De Deo Verax Disputatio ) 가 있으며, 그 외에도 Europe 의 문명을 동양에 전파하기 위하여 많은 과학 서적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Euclid 의 "기하학 원본" 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세계 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및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坤輿萬國全圖" 와 세계 지도인 "山海輿地全圖" 도 유명하다. Matteo Ricci 는 이마두(利瑪竇) 라는 이름으로 明에 정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였으며,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다리를 잇는 중요한 작업을 완수하였다.
그는 본국의 예수회에 많은 보고서를 보냈는데, 격변하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선교 활동의 존립 자체가 자주 위협을 받는 현실 속에서도 선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중국 사람들이 가장 아쉬워 하는 천문학 등의 과학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진 신부들이 본국으로부터 많이 파견되어 와야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여러 차례 보냈었다.
Johann Adam Schall von Bell ( 1592 ~ 1666 ) 은 독일의 Köln 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를 Adam Schall 로 알고 있고, 그의 중국 이름은 湯若望 이다. Adam Schall 은 Roma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기간 중에 Jesuit Society 에 가입하였다. Adam Schall 은 Europe 에서 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중국에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하여 1618년에 Lisbon 을 떠나 1619년에 Macau 에 도착하였으며, 1622년부터 중국 내륙으로 침투하여 여러가지로 어려운 여건 하에서 약 8년간 선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의 중국 대륙은 明 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北京의 조정에는 수학, 천문학 및 달력을 관장하는 Board of Mathematics 라는 부서가 있었다. 이 무렵의 중국은 달력에 춘분, 추분, 동지, 하지, 초승 달이 뜨는 날 및 만월이 되는 날 등을 적어 넣는 일이 매년 연초에 확정하여야 하는 국가 정사 중의 하나였으며, 일식과 월식의 날짜와 발생 시각을 미리 알아 맞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중국에는 Mongol 족이 지배하였던 元 나라 시대에 Arab 문화권으로부터 수학, 천문학 및 달력의 지식이 들어와 쓰이고 있었고, 이것들도 어느 정도 잘 맞기는 하였는데, 일식과 월식의 시각 계산에서 한 두 시간씩 틀리고, 무엇보다도 이 당시의 중국 사람들은 이런 지식들의 원리를 모르는 채로 그냥 사용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중국 사람들의 이러한 학문적 취약점에 대하여 Matteo Ricci 신부는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Europe 의 천문학의 우월성을 설득하여 왔고, 결국은 중국 사람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Adam Schall 신부는 1630년에 北京으로 차출되어 중국의 달력 개혁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에게 Europe 문명의 달력이 중국 사람들이 써 왔던 달력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먼저 천문학을 가르쳐야 했고, 천문학을 가르치려면 먼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 등의 기초 학문을 가르쳐야만 말이 통하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634년까지 Adam Schall 신부는 조수들과 함께 Europe 의 과학 문명에 관한 서적을 137권을 번역하였으며, 이 중에서 100권을 출간하였다.
Adam Schall ( 湯若望 ) 이 중국 사람들에게 과학과 천문학과 달력 계산법을 가르치면서 몇 년 동안 작업하여 기초를 다져가고 있을 때에, 중국 대륙에는 明 나라는 점점 쇠퇴하고 그 대신에 신흥 淸 나라가 점점 강성하여져서, 마침내 1644년에는 淸이 北京에 쳐들어 와서 明을 멸망시키고 淸의 수도를 瀋陽으로부터 北京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이 때에 淸의 제3대 황제인 젊은 順治帝는 매우 전진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湯若望을 황실 천문 연구소인 欽天監의 監正으로 임명하였다. 순치제는 湯若望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었고, 그에게 北京에 천주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천주교회의 missa 에도 몇 차례 참석하였다고 한다. 順治帝가 젊은 나이로 죽고 난 뒤에 시기하고 있었던 중국의 천문학자들과 관리들이 합동으로 湯若望을 모함하여 결국은 옥중에서 병사하였지만, Adam Schall 신부는 Matteo Ricci 와 함께 중국에 천주교를 선교하고 과학 문명을 전파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北京의 北天主堂
高麗 때부터의 우리나라는 Asia 대륙의 극동에 붙은 반도 국가로서, 지정학적으로 상대적으로 강한 중국 대륙의 지배자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끌고 가는 것이 국체의 보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따라서, 高麗 말기로부터의 우리나라의 정권의 안녕과 흥망성쇠가 동시대의 중국 대륙의 지배 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高麗 말기의 우리나라는 元 나라의 강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368년에는 중국 대륙에 明 나라가 서면서 元 나라를 몰아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朝鮮을 세우면서 高麗가 멸망하였다. 초기의 朝鮮은 親明 政策을 쓰면서 明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선조 때 1592 ~ 1598년의 기간 중에 걸쳐 일어난 壬辰倭亂과 丁酉再亂의 왜군 침략에 대해서는 明에서 원병을 파병하여 朝鮮을 지키는 데에 크게 협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明의 朝鮮 파병은 明 나라의 국고의 파탄을 초래하여,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明의 멸망으로 가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淸은 女眞族의 Nurhachi ( 淸의 太祖 ) 가 1616년에 滿洲에서 세운 나라로서,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後金이라고 불렀다가 뒤에 淸 帝國으로 개칭하였다. 淸은 瀋陽에 도읍을 정하고 인근의 국가와 부족들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여 복속시켜 나아갔다. 한편, 이 시기에 明 나라는 내우외환으로 차츰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급기야는 1644년에 淸이 北京을 함락시켜 明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정식으로 淸이라 하였으며, 수도를 瀋陽으로부터 北京으로 옮겼다. 그 이후로 1912년에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간, 淸 帝國은 명실 공히 전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써 행세하였다.
光海君은 1608 ~ 1623년의 기간 중에 朝鮮의 제15대 왕으로 재위하였으나, 仁祖 反正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의 재위 중에 滿洲에서는 여진족의 신흥 국가 後金이 건국되었으며, 그 세력이 조선에 위협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뒤에 明과 後金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여 明 나라로부터 조선에 원병 요청이 있자, 광해군은 姜弘立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병하되 後金과의 전투에서 의도적으로 투항하게 함으로써, 明 과의 기존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가급적이면 後金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줄 타기 외교의 수완을 보였다.
光海君을 몰아내고 조선의 제16대 왕위에 오른 仁祖 ( 재위 기간 1623 ~ 1649 ) 및 인조를 옹립한 西人 세력은 後金을 오랑캐의 나라로 간주하여 철저한 向明排金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明 나라로 쳐들어가기를 원하였던 後金은 배후에서 조선이 明에 친화적이고 後金을 위협하는 이러한 태도를 묵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丁卯胡亂은 1627년1월에 後金의 3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오면서 발발하였다. 약 두 달에 걸친 전쟁 끝에, 향후 양국은 형제 국가의 관계를 맺기로 약조하고, 후금의 군대는 물러갔다.
그러나, 1632년에 이르러 후금은 滿洲 전역을 석권하고 明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朝鮮에 대하여 형제 국가가 아닌 君臣의 관계로 바꿀 것을 강요하였으며, 황금 1만냥, 전마 3000필 및 조선 군사 3만명의 차출 등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 요구를 묵살하였고, 후금은 1636년에 국호를 淸으로 바꾼 뒤에 다시 朝鮮에 사신을 보내어 君臣之義를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 최후 통첩을 또 묵살하였고, 이에 淸 太宗 ( 皇太極 ; Hong Taiji 또는 Abahai ) 은 1636년12월에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으니, 이것이 丙子胡亂이다.
그 이듬해인 1637년1월30일,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던 仁祖는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성을 나와서, 三田渡에서 淸의 태종에게 굴욕적 항복을 한다. 그 결과로 朝鮮은 明과의 관계를 끊고 淸 나라에 군신의 예를 지켜야 하도록 되었고, 仁祖의 맏아들 昭顯世子와 둘째 鳳林大君을 포함한 세 왕자 및 많은 대신들의 자제들이 인질로써 瀋陽으로 잡혀가게 되었으며, 淸의 군대가 귀국할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과 아울러 1639년부터는 朝鮮이 淸에 일정한 歲幣를 납부할 것 등을 항복 조건으로 하였고, 청의 군대가 철수할 때 수만명 내지는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들을 납치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昭顯世子 ( 1612 ~ 1645 ) 는 1625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637년에 만25세의 나이로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淸 나라의 인질로서 瀋陽으로 끌려갔다. 昭顯世子는 1637 ~ 1644년의 기간 동안 瀋陽의 瀋陽館 ( 윗 사진 ) 에 머물면서, 고생하는 가운데에서도 淸의 문물을 배웠고, 차츰 자라면서 淸과 朝鮮 사이에 일어나는 정치, 경제, 외교, 무역 분야의 각종 issue 들에 자연스럽게 간여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淸의 현실과 淸의 입장을 朝鮮에 설명하여 朝鮮이 淸의 요구를 들어 주도록 설득하는 일이 많아짐으로 인해서, 淸으로부터는 상당한 인정을 받게 되었으나, 仁祖를 비롯한 朝鮮의 조정으로부터는 미움, 의구심, 경계심 및 각종 중상모략의 대상으로 성장하여 갔다.
昭顯世子는 瀋陽에 머무는 동안에 책 두 권을 남겼으니, "瀋陽 狀啓" 와 "瀋陽 日記" 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심양 장계" 에는 소현 세자가 淸과 조선 사이에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본국의 조정에 보고서를 올리고 지침을 구하던 기록들이 적혀 있으며, 아울러 淸 및 주변 국가들의 현실과 발전 상황들을 관찰한 기록들도 있다. 또한 "심양 일기" 는 소현 세자 및 그 부인 姜嬪의 일상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소현 세자는 1637 ~ 1644년의 기간 중에 淸의 볼모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앞서 가는 淸의 현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고, 그에게 주어진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하였지만, 그가 본국에 보낸 각종 보고서의 내용들은 仁祖 및 대신들이 이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소현 세자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는 역할을 한 셈이 된다.
마침내 1644년에 淸은 北京으로 쳐들어 가서 明을 멸망시키고 北京을 도읍으로 정하게 된다. 淸이 北京을 치는 이 마지막 싸움에 昭顯世子도 따라갔고, 그 이래로 昭顯世子는 볼모에서 풀려나서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날까지의 약 2~3개월간을 北京에 머물렀다. 이 기간 중에 昭顯世子는 北京에서 선교 활동과 Europe 의 과학 문명을 전파하여 왔던 Adam Schall 신부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소현 세자는 Adam Schall 을 찾아가서 많은 것을 물었다. Adam Schall 도 昭顯世子가 朝鮮의 왕세자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소현 세자의 거처까지 찾아왔으며, 그렇게 해서 그 둘은 여러 차례 만나서 교류하였다고 한다. Adam Schall 은 소현 세자에게 천주교의 교리와 천문학, 지리학 등 Europe 의 과학 문명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소현 세자에게 天主像, 輿地球 ( 윗 그림의 지구본 ), 천주교 교리서들 및 수학, 천문학 등의 서적들을 선사하였다.
昭顯世子는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에 Adam Schall 에게서 받은 서적과 물품들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며, Europe 문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千里鏡과 火砲 등도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그 중에서 천문 서적 "Tycho Brahe 의 관측에 의거한 천체 이동 법칙" 이라는 책은 昭顯世子의 후손들에 의하여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고 하며, 소현 세자가 갖고 온 여지구도 상당 기간 동안 보전되었다가 지금은 유실되었다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소현 세자의 인질 생활 때에 보좌하던 사람들 중에 Adam Schall 로부터 천주교 교리 공부를 하면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있어서, 소현 세자가 귀국할 때에 이들도 함께 좇아왔다는 것이다.
淸은 明을 멸망시킨 뒤에는 昭顯世子를 풀어주기로 결정하였고, 소현 세자는 1644년 말 경에 北京을 출발하여, 1645년 초 경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아버지께 淸 나라에서 들여온 문물들을 보여 드리면서 淸의 문물들을 설명하여 드리려던 자리에서, 仁祖는 세자에게 벼루를 집어 던져서, 세자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는 야사가 있다. 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 세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누었고, 돌아온지 2개월만에 죽었다.
그 때 昭顯世子와 그 부인 姜嬪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仁祖는 淸에 남아 있던 鳳林大君을 서둘러 귀국시켜서 세자에 책봉하였다. 그 다음 해인 1646년에 姜嬪은 仁祖를 독살하려 하였다는 죄목을 덮어쓰고 賜死되었다. 남아 있던 세 아들은 12살, 8살 및 4살이었다고 하는데, 이 세 아들은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런데, 그 중에서 장남과 차남은 1648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셋째만 살아 남았다.
昭顯世子와 그 부인 姜嬪에게 일어난 悲運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외에도 이야기가 더 있는데, 나머지는 생략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들어닥친 이 비운이 거대한 음모에 의한 것이었고, 昭顯世子는 독살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음모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글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내용들도 생략하였다.
아뭏든, 昭顯世子가 불의에 가면서, 그가 淸에서 고생하면서 배운 앞서가는 문물에 관한 식견들과 그가 1644년에 Adam Schall 을 만나서 접할 수 있었던 기독교와 Europe 의 과학 문명을 朝鮮에 들여와 배워 보고자 하였던 北學論의 꿈은 사라졌다. 그 뒤로 1649년에 仁祖가 죽고 鳳林大君이 孝宗으로 즉위하였는데, 孝宗은 仁祖의 뜻을 이어받아 北伐을 주창하면서 군비를 확충하였다. 그러나, 孝宗의 재위 중에 실제로 북벌을 한 것은 없고, 단지 淸의 요청을 받아서 정예 부대 몇백명을 북쪽으로 파견하여, 남하하려던 Russia 군대와 충돌하여 전투에 승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Europe 의 기독교와 과학 문명이 중국에 전파되게 된 경위와 중국 대륙에서 淸이 일어나서 明을 멸망시키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朝鮮이 받은 지정학적인 영향들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며, 丙子胡亂 후에 淸으로 끌려갔던 昭顯世子가 淸의 새로운 현실에 잘 적응하고 아울러 Europe 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었던 기독교와 과학 문명에 전전적으로 대처하려 하였던 것이 어떻게 하여 朝鮮에서의 昭顯世子의 悲運으로 연결되었는가 하는 인과 관계들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고찰할 때에,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관찰 내지는 관조할 수가 있고, 아울러 몇 가지 값진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아니, 어쩌면 지도를 다시 그릴 수도 있었을 ( 예를 들어 윗 그림 같이 ... ) 역사적 기회를 놓친, 값 비싼 대가를 치룬 교훈은 아니었는지 ... ?
첫째, Europe 에서도 과학 문명의 발전은 그 앞 길이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종교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던 집단의 편견에 의하여 배척 당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는데, 서양에서는 이처럼 권력에 의하여 배척 당하면서도 과학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경이롭고, 주목할 만 하다.
둘째, Matteo Ricci 가 중국에 선교와 과학 문명의 전파를 시작함으로써 동양사와 서양사가 통합하여 처음으로 세계사의 흐름이 시작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는데, Matteo Ricci 는 만26세에 중국 선교의 총 책임을 맡는 신부로써 서품되어 Lisbon 을 출발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에 Jesuit Society 에서 어떻게 하여 그 먼 중국에 선교를 시작할 것으로 방향을 정하였으며, 젊은 Matteo Ricci 의 능력과 성품을 어떻게 알아 보고서 그에게 중국 선교의 전권을 맡겼는지는 mystery 인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하는 것 같다.
셋째, ironic 하게도, 朝鮮은 明이 멸망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우선, 임진왜란 때 明이 원병을 파병하면서 국고가 파탄이 난 것이 그 단초가 되었다. 다음으로, 후금을 세운 Nurhachi 의 여덟째 아들 淸 太宗 ( 皇太極 ; Hong Taiji 또는 Abahai ) 는 明을 치기 전에 Mongolia 를 제압하여 이로부터 인력과 말을 공급 받고, 丙子胡亂으로 朝鮮을 쳐서 이로부터 재정과 식량을 공급 받게 되어, 이른바 八旗制의 군사 체제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仁祖는 앙앙불락 하면서 북벌을 간절히 원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 朝鮮은 淸이 明이 멸망시키는 사업에의 unwilling cooperator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넷째, 昭顯世子는 아마도 전진적인 성격을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으로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배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운명적으로 昭顯世子와 Adam Schall 의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朝鮮의 권력층이 이기적 권모술수와 무지몽매와 되지도 않을 北伐論의 헛된 정치적 구호에 매달려서 昭顯世子를 버림으로 인하여, 昭顯世子와 그 부인 姜嬪이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어떻게 보면, 明이 망하였던 것도 明의 총체적 실력이 그것 뿐이 안 되었던 까닭이었고, 1640년대의 朝鮮이 Adam Schall 을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北學論이 좌절됨으로서 朝鮮의 개화가 늦어졌던 것도 결국은 당시의 조선의 총체적 실력이 그것 뿐이 안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만일 이 생각이 일리가 있는 것이라면, 瀋陽에서 昭顯世子가 너무 전진적으로 나가지 말고 적당히 鳳林大君 같은 마음의 자세를 하고 살았더라면 몸 보신 내지는 조선의 왕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 하고 생각하여 본다. ( 쓸 데 없는 생각 )
안녕하세요 ? 처음부터 시작해서 단숨에 여기까지 읽어 내려오기는 쉽지 않은데, 혹시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도 몇 차례에 걸쳐서 한 번에 조금씩 읽어 주신 거겠지요 ? 길고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