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어 학교에 다닌다고 혹자는 미쳤다고도 하지만, 제게는 이 결행이 몇 달간이
나 고심한 이후 선택한 길입니다.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더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게지요.
학교생활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입니다. 예전에 비해 극히 좁은 대인관계 속에서
수업이 끝나면 곧장 방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습니다. 당
구와 술이요? 한 달에 두 번도 어렵습니다.
이런 생활은 자칫 금새 지루해질 수 있고, 외롭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내
나이 또래가 흔히 하는 잡다한 세상사로부터 벗어날 여지가 있기에 마음만은 물
처럼 고요하고 자유로워지는 좋은 점이 있지요. 상선약수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
알게 된 요즘입니다.
이번 주 월요일 오후 반가운 분의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기성이형(-닉네임 폐
기탄두, 한 때 잘 나가는 우리나라의 당구선수였으나 청주에서 했던 당구장 말아
먹고 지금은 양평에서 돈까스 만들고 있음)이 화요일 밤에 수원에 약속이 있어 오
신다는 겁니다. 개학한 후 거의 한 달간을 심심하던 차에 쾌재를 불렀지요!
수원 고철수 선배가 운영하는 수원당구회관에서 만나 대대 몇 게임을 친 후 술 한
잔 마시고 쪼자님과 10배 게임을 치기로 약속한 서울 신림동의 레포츠 당구장에
도착한 시각이 수요일 새벽 6시 30분 경. 기성이형과 아스트로-시모니스 중대에서
한 게임을 쳐보았는데, 무딘 칼로 장작 패기가 연상되더군요.^^ 돈까스 만드느라
팔이 무뎌지셨는지 하프 게임으로 손쉽게 이겼습니다.
그 후 기성형은 오후의 일전을 대비해 감각을 되찾으려는 듯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윽고 약속한 두 시가 되자 쪼자님이 정확히 나타나셨고, 곧바로 천리안-천당 역
사상 전무후무한 알수의 10배 게임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성형 500점 VS 쪼자님 28
0점. 시작하자마자 기성형 안에 켜켜이 숨겨져 있던 명검술이 찬란한 빛을 발해
시작 시각 10분 만에 30여 점을 속사포처럼 득점하는 녹녹치 않은 기량을 선보였
습니다. 역시 무예 십팔반을 달통한 고수. 이에 잔뜩 주눅이 든 쪼자님의 표정이
정말 볼만 했는데, 관전자는 당시 저 밖에 없어 여러분들께 그 모습을 재현해 드
리지 못함이 유감이군요. 완전히 상대방에게 압도당해 큐가 얼어버려 무득점 상
황이 지속되었습니다.
한 시간 경과 상황은 약 90-10 스코어. 좀 피곤해진 나는 저녁의 리그를 위해 사
우나에 가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 리그 소감
참, 리그 전에 새로 오신 민욱기님이랑 한 게임을 쳤군요. 200점을 친다고 하시
기에 치수는 25-50으로 제가 임의로 정하고 친 것인데, 새로이 정한 천당의 공식적
치수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이 게임이 끝난 후 민욱기님에게 당구는 즐기기 위
함이 중요하고 잘 맞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마음에 화를 돋울 필요는 없다고 얘
기해주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당구장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있더군요. 당구장에 들어서자마자 강차력이 날 붙잡더니 리그전을 시작하자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 놈은 날 무슨 생선회처럼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
지만 아무리 당구를 치지 않았더라도 한 때는 나도 천리안 시절 사대고수의 일인
이자 전직이 당구선수! 기량은 비록 녹슬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강차력이 무자비하게 득점을 해나가기 시작하며 거의 3점대의 애버
러지를 유지했습니다.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저도 열심히 쳤지요.
결과는 20이닝 만에 50-29로 강차력의 승리. 닉네임을 녹슨총에서 ‘날선검’으로
고쳐야겠습니다. 형도 당구를 안 친 것 치고는 그래도 1.5 가까이 쳤으니 못 친
것은 아니라고 찬형이가 덕담을 건네주었습니다.
2차전은 승부욕이 강한 피닉스형. 구질이나 선구 방식, 타법 등은 예전과 변함이
없으나 그 특유의 끈적끈적함은 두 배가 된 듯 하더이다. 역시 완패하였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 속개된 친우 공샘과의 경기는 당구대 상태 난조의 틈을 타 신승.
전에 양평 돈까스 번개에서 다음에 만나면 한 게임 하기로 굳게 약속한 종훈이(-
종훈이가 얼마나 늘었나, 늘었다면 나와 쳐서 얼마만큼의 실력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양평 번개 때 얘기 나눈 바 있음)와의 게임이 상당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실
력이 몇 년 전에 비해 훨씬 늘었기 때문입니다. 자세는 그렇게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공을 보는 방식이나 타구법이 좋아졌더군요. 이 시점에서의 얘기
인데, 당구는 발전적으로 쳐야 합니다. 늘 치던 고답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실력이
늘 수가 없습니다. 예부터 알던 모회원의 치는 모습을 예로 들면, 그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타협을 잘 하더군요. 이렇게 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며 치고 난 후의
배치 상황도 좋다면 기술적으로 좀 더 난점이 있더라도 그 방향으로 치려고 노력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렇게 치지 않고 득점이 쉬운 쪽을 선택하더군요.
지나치게 현실적이며 당장의 결과만을 노린, 이상성-발전성의 결여태입니다. 이
렇게 해서는 당구가 늘지 않습니다. 그저 빤히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중요시하는
속물근성 때문이랄까요.
다시 종훈이와의 얘기로 돌아와서, 종훈이는 전자와 비교해 제 스스로 많이 모색
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져주지 않으려고 별 수단을 강구한 제 자신의 흉맹한
술책 때문에 결국 패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더
군요. 당구는 이렇게 치는 것이 역시 흥미진진함을 되새겨준 한 판이었습니다.
# 초록별님과의 사구 한 게임
리그를 마친 후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나는 초록별님께 청해 사구 한 게임을 치게
되었습니다. 집이 시흥이라는 것과 당구는 50,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다는 것
등 기본적인 수인사를 나누고 700점 VS 쿠션 없는 80점으로 정해 치기로 합의하
였습니다. 초록별 누나는 쿠션만 없으면 자신 있다는 투로 의기양양하게 게임에
임하기에 저는 속으로 얼마나 회심의 미소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초구에 20여점을
치는 와중 옆에서 구경하던 난장이의 탄성이 이어지고, 불곰형은 해설을 자청
하고, 누나는 무슨 신기한 동물 구경하는 것처럼 날 쳐다보더이다. 둘째 큐에 20
여점, 셋째 큐에 10여점을 치고 나니 몇 점 남지 않았기에 누나에게도 칠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하기에 센스가 있다고 생각했
지요.
이 게임이 끝나고는 술자리로 향했는데, 초록별님은 너무 늦어 귀가하였습니다.
나는 이어진 술자리에서 불곰형에게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자신과 갑장인 그
아담하면서도 호리호리한 체형의 초록별님이 아마 단급의 바둑 고수라는 것이었습
니다. 그뿐 아니라 발레를 전공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고, 이는 어제 쥔장형과의
멤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었지요! 쥔장형의 말에 의하면 아마 3단 실
력은 충분하며 언제인가 한 번은 기성형과 5점 접바둑을 두었는데 기성형이 참패
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놀라움을 느낄 때는 바로 이럴 때인 것 같습니다. 몰개성의
시대에 일상적 만남, 스치듯 지나가는 만남의 주류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참신하
고도 놀라운 사람을 만난다는 그 사실 말예요.
발레와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인지라 음악을 당구보다도 더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분야에 대해서도 일말의 관심을 갖고 있지요. 발레음악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차이
코프스키의 3대 발레음악,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신고전주의 발레음악, 디아길레프
발레단, 전설적 안무가 니진스키 등등 러시아 발레예술이 정점에 있던 시절의 예
술가와 안무가들에 대해 영상물과 서적, 음반으로 접해본 일이 있습니다.
또 바둑에 관해서라면, 저는 둘 줄은 전혀 모르는 문외한입니다만, 그에 관한 일
화가 담긴 책들을 많이 읽어 보았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사 관전기자인 에사키 마
사오가 쓴 ‘오청원 스토리’, 노승일이 쓴 ‘굿바이 관철동’, 그리고 쥔장형에게
예전에 빌려 본 적이 있는 ‘관철동 한국기원’ 외 기타 등등.
제가 이러한 책들을 ‘깨소금이 쏟아지도록’ 재미있게 읽은 까닭은 바둑과 당구
가 지니는 유사성 때문이었습니다. 승부에 관한 호흡법, 천재적 감각, 비일상성과
일상성,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천태만상의 사건들과 기인들의 이야
기가 저를 몹시도 흥분시켰습니다.
후지사와 슈코 9단의 기행, 본인방가를 위시한 사대가문의 쟁기, 우리나라의 23
연속 세계제패 등의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인상 깊은 일화를
하나 꼽자면 ‘서봉수’의 이야기였습니다. 불세출의 승부사적 기질, 들개와 하
이에나로 지칭되는 특유의 야성미가 넘실거렸기 때문입니다.
삼천포로 좀 빠졌습니다만, 이 다음에 초록별님과 다시 만난다면 발레와 바둑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 술판에서 노래방으로, 감자탕 집으로
술자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일은 부산의 미녀(?) ‘난장이의 기행’이었습니다.
오빠들이 하는 얘기가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배를 잡고 웃는 기이한 행동을 계속
하였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난장이가 우스워 죽을 지경이더군요. 참 이상한 여자
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난장이는 키가 작은 난장이로서의 의미가 아닌 난장(
亂場-시쳇말로 ‘난장을 까다’)의 의미가 보다 더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러나 난장이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잘 기억하는 장점이 있더군요. 자신의
업이 방송국(MBC) 리포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앞질러 가서, 초록별님과 저와의 사구 게임에 고무된 난장이는 이튿날 내게
사구를 한 게임 청해왔는데, 무려 1시간 40분간의 혈전 끝에 2-1로 제가 패하고
말았습니다. 게임 마지막 세트에 저의 쿠션 디펜스 작전으로 거의 울기 일보직전
까지 갔던 난장이가 약간 어려운 안쪽돌리기를 성공시켜 그만 제가 지고 말았지요.
굳이 이틀 밤을 새워 컨디션이 좋지 않아 졌다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습니다만,
다음에 난장이를 만나면 기필코 앙갚음을 하리라 다짐하며 당구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술자리에서 나온 우리들은 노래방으로 2차를 갔는데, 망할 놈의 종훈이가
내 18번지인 동백아가씨를 듣고 싶다 그러더니 당사자는 부를 생각도 없는데 곡을
떠억하니 입력시켜 놓아서 할 수 없이 부르긴 했습니다만, 역시 우리의 난장이님,
내 동백아가씨를 듣더니 또 엎어지대요. ^^
노래방을 나와서는 감자탕집에서 3차 겸 식사를 마무리 하고는 잠을 자러 여관으로
들어 갔습니다. 여관에 들어간 시각이 목요일 오전 7시. 목요일 수업 다 제껴버
리고 밤새도록 통음한 하루였지만 전혀 억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오랜만에 모임에 참여해 여러분들을 만난 것이 제게는 너무도 즐겁고도 유
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전 천리안 시절의 낯익은 얼굴들과 새로운 신입들, 모두들 만나서 참으로 반가
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자주는 아니겠지만, 가끔 모임에 참여할
생각이니 친우, 친형들은 이 빌리헤로도 잊지 말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
로 금주의 수요리그 후기를 마칩니다.
첫댓글 칭찬인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더 열심히 한 수 배웁지요.
오호~~발레랑 바둑에대해 마니아네.... 나도 4구 내눈앞에서 그렇게 잘치는사람 첨이였어 좋은 경험이였고. 방가웠다~~~~~
현진형께 받은 책 '굳바이 관철동' 기성형께 받은 책 '역수' ...... 아무리 읽어도 내 승부사적 기질의 향상은 신통치 않더이라~~
난장이 이상한 여자 아닌데여~~~ 그날 오빠한테 많이 배웠어여~~~ 고맙습니당... 담에 또 갈쳐 주세여~~ 근데... 후기 적을때여~~~ 좀 읽기 편하게 적어주심.... 헤~~~ 후기 적느라 수고하셨습니당~~
야이 개시캬! 읽느라 눈알이 빠질 것 같다.. 앞으로도 자주 활동해라.. 그리고 나한테 한 얘기냐?
친구야, 너한테 한 얘기일 리 있나? ^^
그리고 다음 글쓰기에서는 폰트 지정 기능이 없나요? 글을 쓸 때 폰트를 지정한 후 한 칸씩 줄을 띄우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 편할텐데... 다음부터는 hwp 편집기를 이용토록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