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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대본 아리고 보이토
초연 1871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2016년 7월 18일 브레겐츠 페스티벌 / 145분 / 한글자막>
빈 심포니 & 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 연주 / 파올로 카리냐니 지휘 / 올리베에르 텅보쉬 연출
햄릿..............덴마크의 왕자...................................파벨 체르노카(테너)
클라우디오.....덴마크의 왕, 햄릿의 숙부....................클라우디오 스구라(바리톤)
오펠리어........햄릿의 연인......................................율리아 마리아 단(소프라노)
거트루드........덴마크의 왕비, 햄릿의 어머니..............쉐밀리아 카이저(메조소프라노)
폴로니우스.....덴마크의 신하, 오펠리어의 아버지........에두아르드 상가
호레이쇼........햄릿의 친구이자 심복.........................세바스티엔 소울레스
레어티스........폴로니우스의 아들, 오펠리어의 오빠.....파울 슈바이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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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햄릿을 소재로 한 귀한 오페라. 145년 만의 귀환
밀라노 라 스칼라의 예술감독이었던 파치오와 극작가 보이토가 만든 오페라 <햄릿>은 1871년 라스칼라에서 공연되었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2014년 미국에서 콘서트 버전으로 빛을 본, 수록된 해설지에 의하면 'A Long-Lost Masterpiece'다. 2016년 7월 18일, 브레겐츠 실내 페스티벌 극장에 오른 <햄릿>은 145년 만의 부활로 Cmajor에서 세계 최초로 발매한 영상물로 그 소장 가치 역시 충분하다. 연출가 올리비에르 텅보쉬는 햄릿의 불안하고 어두운 내면을 무대에 구현하려는 듯 검은색 톤으로 일관한다. 배역들의 의상도 하나같이 눈길을 끈다. 총 4개의 막을 가로지르는 햄릿 역의 파벨 체르노카가 압도적이다. 광기와 정신분열로 가득 찬 모습, 그리고 폭 넓은 성량, 여유 있는 고음의 발성, 유장한 호흡의 프레이징은 보는 이를 압도당하게 한다. 해설지에는 작품 해설(영·프·독)이 수록.
밀라노 라 스칼라의 예술감독이었던 파치오는 극작가 보이토와 오페라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 연극의 정신을 다시금 부활시키고자 했다. <햄릿>은 1871년 라스칼라에서 공연되었지만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가 2014년 미국에서 콘서트 버전으로 빛을 본, 수록된 해설지에 의하면 'A Long-Lost Masterpiece'다. 2016년 7월 18일, 브레겐츠 페스티벌 중 브레겐츠 실내 페스티벌 극장에 오른 <햄릿>은 145년 만의 부활이다. C major에서 세계최초로 발매한 영상물로 그 소장 가치 역시 충분하다는 것이 이 영상물을 추천하는 첫 번째 이유다.
추천의 두 번째 이유는 햄릿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연출, 세 번째는 그러한 공간을 배경삼아 활약하는 햄릿 역의 테너 파벨 체르노카의 활약이다.
오페라 <햄릿>은 연극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프랑스 태생의 올리비에르 텅보쉬는 햄릿의 불안하고 어두운 내면을 무대에 구현하려는 듯 검은색 톤으로 일관한다. 시대적 재현보단 시대를 가늠하기 힘든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무대지만, 그것을 수놓는 배역들의 의상도 하나같이 눈길을 끈다.
햄릿 역의 파벨 체르노카는 '얼음처럼 차가운 복수'('스위스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라는 호평을 받은 테너. 극중 극을 위해 흰색으로 분장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불안한 젊은 세대의 변화와 심리를 능숙하게 표현'('아벤 차이퉁')한다는 말과 잘 맞아 떨어진다. 연극 '햄릿' 속에도 등장하는 극중극은 이 오페라에서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이 영상물의 보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광기와 햄릿의 정신분열로 가득 차 있다. 총 4개의 막을 가로 지르는 파벨 체르노카의 목소리는 폭 넓은 성량, 여유 있는 고음의 발성, 유장한 호흡의 프레이징으로 요약되겠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특징인 독백이 아리아화된 작품으로 보아도 좋다. 햄릿, 오필리어, 거트루트 등의 아리아들은 음악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해설지에는 작품 해설(영·프·독)이 수록되어 있다.
=== 참고 자료 ===
고전해설 ZIP
햄릿 Hamlet
1601년에 집필된 작품으로 추정되는 <햄릿>에서 우리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햄릿의 ‘복수’라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인공 햄릿이 갈등을 수용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햄릿>의 주제와 햄릿의 성격, 그리고 그의 행동과 사고를 통해 표출된 시대사상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에 드러난 갈등의 양상은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적 갈등이란 선왕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려는 햄릿과 그의 의도를 눈치 챈 클로디어스와 그 하수인 일당의 대립이다. 클로디어스는 로젠크란츠, 길던스턴, 레어티스라는 악의 하수인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햄릿을 제거하려 한다. 이러한 외적 갈등의 양상에서 햄릿은 희생당하지만 악의 자멸이라는 양상으로 모든 악한 인물들은 파멸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갈등 양상일 뿐이다. 이 작품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햄릿이란 인물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갈등 양상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은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나 운명과의 대립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개인 안에서 진행되는 도덕적 갈등이 본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갈등 구조에서 성격과 행동의 극단성은 파국으로 이끄는 숙명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브래들리(Bradley)가 지적하듯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성격은 곧 운명”이다.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어머니의 근친상간적인 결혼은 햄릿의 내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유령의 복수 명령이 주어지기 전부터 이미 햄릿의 평정심은 깨어져 있다. 그러나 갈등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율배반적인 유령의 명령이다. 1막 5장에서는 유령이 등장하여 그의 죽음에 관련된 비밀스런 사연을 이야기하고 아들인 햄릿에게 복수를 명령한다. 또한 근친상간의 이부자리로 들어간 거트루드의 썩어빠진 정절을 회복시키라고 햄릿에게 당부한다. 그렇지만 복수하라는 유령의 명령과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는 유령의 명령은 사실상 양립할 수 없다.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복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령의 명령은 친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명예로 간주하는 앵글로색슨족의 오래된 전통과 인간 생명과 이성을 중시하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대립을 내포한다. 복수하라는 명령은 햄릿의 격정을 자극해서 행동하게 하지만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는 주문은 이성을 자극해서 복수를 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 두 가치관의 대립은 복수 지연을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성질의 것으로 만든다. 햄릿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다른 축이 형성된다. 회의주의와 비관주의라는 당대의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가치관은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하며, 5막에 이르기까지 그 틀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유령의 명령과 더불어 유령이란 정체의 불확실성 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유령이 정말 아버지의 혼령인지 아니면 살인을 부추기기 위해 그럴싸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악마인지를 햄릿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유령에 대한 당대의 회의적인 반응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시 햄릿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유령의 명령으로 인해 햄릿의 자아는 분열되고, 복수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분열된 자아의 극복이다. 5막에 이르기까지 햄릿은 분열된 자아를 극복하지 못한다.
햄릿의 복수 지연은 양립할 수 없는 유령의 명령의 이중성에 기인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하나를 쉽게 취하지 못하는 햄릿의 성격에 기인한다. 햄릿은 복수를 맹세하지만(1막 5장), 유령이 사라진 뒤 곧이어 “아, 저주스런 운명이여.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나다니”라고 말하면서 부패한 왕국의 어지럽혀진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즉 복수해야 하는 상황은 그에게 억지로 주어진 상황이고, 자신이 복수 실행의 적격자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 또한 갈등을 심화시킨다.
3막 1장에서 삶의 의미와 의욕을 상실하고 존재의 가치에 회의적인 햄릿이 등장해서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독백을 읊조린다. “참느냐, 마느냐(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뎌내는 것이 고상한 일인가? 아니면 이 거대한 고통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집어 들어 그것을 근절시킴이 더 고상한 일인가?” 햄릿은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갈등한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죄악, 부정, 부패가 제거될 수 있을지 아니면 죽고 난 후에도 그 문제가 그대로 남을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햄릿의 명상은 독백으로 표출된다. 위의 독백은 유령의 명령을 둘러싼 구체적인 갈등부터 인간사의 모든 갈등까지 내포하는 함축적인 표현이다. 햄릿이란 인물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대한 복수라는 문제를 통해 존재와 무, 삶과 죽음, 실체와 허구,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등의 문제에 대해 갈등하고 회의한다. 여기서 햄릿은 통합된 인간상이 아니라 상충하고 갈등하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막 2장에서 ‘극중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죄를 확인하고 유령이 한 말이 진실임을 확인한 햄릿은 이제 금방이라도 복수를 단행할 것 같아 보인다. 3막 3장에서 햄릿은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어머니의 방으로 가는 도중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기도하고 있는 왕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를 택해서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복수를 지연한다. 요리할 고기를 도마 위에 두고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은가를 너무 생각하다가 잡은 고기를 놓친 꼴이다. 클로디어스가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죽이면 악당 놈을 천당에 보내는 것이 되어 복수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빼어 든 검을 다시 집어넣는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을 뿐 누군가를 ‘살해’하고 싶지 않다.
이 장면은 햄릿이 어떤 일을 두 번, 세 번 거듭 깊이 생각하는 성격으로 인해 복수를 지연한다는 평을 유발시키게 된다. 그러나 복수 지연의 원인을 규명하기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3막 4장에서 햄릿에게 위협을 느낀 거트루드가 비명을 지르자, 휘장 뒤에 숨어 엿듣고 있던 폴로니어스가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게 되고, 이에 햄릿은 반사적으로 휘장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폴로니어스는 죽음을 당한다. 이는 3막 3장에서 클로디어스가 기도하고 있어 죽이지 않았던 햄릿의 행위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렇게 신중하게 행동하던 햄릿이 3막 4장에서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성급한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괴테(Goethe)는 복수 지연의 근본 원인을 햄릿의 감상적인 성격으로 간주하면서, 그를 “아름다운 꽃만을 담고 있어야 할 값비싼 항아리”에 비유한다. 괴테에게 햄릿은 행동력이 결여된, 섬세한 도덕적 감수성을 지닌 왕자다. 콜리지(Coleridge)는 “한 행위와 관련된 모든 사항과 그 가능한 결과”를 너무나 골똘히 생각하는 햄릿의 반성적 습관이 복수 지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콜리지에게 햄릿은 마비된 지성의 상징이다.
20세기 초반의 비평가 브래들리에게 복수 지연의 직접적인 이유는 햄릿의 반성적 습관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은 깊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무기력하고 냉소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행동력을 상실한다. 브래들리는 햄릿의 과도한 상념은 그의 우유부단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우유부단의 ‘징후’일 뿐이라고 콜리지를 반박한다. 유령에게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햄릿은 우울증에 빠져 있다. 남편이 죽은 지 두 달도 채 못 돼 시동생과 성급하게 결혼한 어머니 거트루드의 행위에서 욕정 앞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하는 인간 이성을 직면했기 때문이다.
1막 2장의 제1독백−“아, 너무나도 더럽고 질긴 육신이여, 녹고 녹아 차라리 이슬이 되어버려라….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에서 햄릿은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이는 곧 오필리아에게 이전되고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로 나아간다. 이 혐오감은 또한 부패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혐오로 나아가고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친구의 배반, 그리고 오필리아의 배신은 햄릿에게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가속화시킨다. 햄릿은 부패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냉소적이고 우울한 도덕적 주인공이다.
역사적 접근에 따르면 햄릿의 복수 지연은 바로 복수에 관련된 그 시대의 종교적 도덕적 가르침과 일반 대중의 견해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대의 법과 도덕적 가르침은 사적인 복수를 죄로 규정했고, 복수라는 행위를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경스런 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영혼마저도 파멸로 이끄는 죄악으로 단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일반 대중들은 특정한 상황 가운데 행해진 복수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자식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 시대 관중들은 이성적으로는 사적인 복수가 악이라고 판단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식의 복수는 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 시대 관중들이 처한 도덕적 딜레마인 동시에 햄릿이 처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 처한 딜레마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공적인 차원의 정의 실현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3막 4장에서 햄릿은 폴로니어스를 죽인 직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이자로 하여금 저를 벌주시고, 저로 하여금 이자를 벌주신 것. 저는 응징의 도구요 하느님 섭리의 대행자이지요.” 햄릿이 사적 복수를 행한다면 그는 ‘응징의 도구’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죄를 범하게 된다. 반면 하느님이 제공해 줄 기회를 기다려 공적인 정의를 대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햄릿은 죄로부터 면죄될 수가 있다. 이 말은 그의 행위가 사적 복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클로디어스의 죄를 하느님을 대신해서 응징하는 공적 차원의 행위가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복수에 대한 햄릿의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앞으로의 그의 행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4막 3장에서 클로디어스는 햄릿에게 지체 없이 영국행 배에 승선할 것을 명하고, 영국왕에게 햄릿이 영국에 도착하는 즉시 죽이라는 내용의 밀서를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이 가져가게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햄릿은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당혹감을 느낀 왕은 레어티스에게 폴로니어스의 죽음을 복수하라고 부추긴다(4막 7장). 햄릿이 악의 도구가 되길 주저했던 반면, 레어티스는 스스로 악의 하수인이 되어 악의 도구가 되길 자처하면서 “교회당 안에서라도 그놈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벼른다. 복수를 서두르는 레어티스의 모습은 우유부단한 햄릿의 성격과 대조를 이룬다. 실성한 오필리아가 익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레어티스는 더욱 격분하여 복수의 의지를 굳히고, 왕은 햄릿과 레어티스의 펜싱 시합을 주선하여 햄릿을 독살하려 한다. 이제 서서히 죽음의 전조가 시작된다. 이 지점까지 햄릿을 둘러싼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은 팽팽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5막 2장에 이르러 이 갈등의 틀은 허물어진다.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인간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그가 악을 행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라고 판단한다. 이는 햄릿이 자신을 한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공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사다. 이제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죄로 인해 부패한 왕국의 질서를 바로잡고 병든 조국을 치유하는 게 자신의 임무임을 자각한다. 사적 복수를 전개하게 될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일국의 왕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햄릿은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탈출하여 덴마크로 돌아온 후 체념과 초탈의 자세를 견지하게 되는데, 이 체념은 일종의 긍정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햄릿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초연하게 되며 미지의 세계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5막 2장에서 햄릿은 레어티스와의 결투에 응하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결투에 응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호레이쇼에게 햄릿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지금 오면 장차 오지 않을 것이고, 장차 아니 올 것이면 지금 올 것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올 것이고, 중요한 건 마음의 준비라네.”(5막 2장). 이 대사는 인내와 초탈을 인간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던 당대의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햄릿의 품성을 드러내준다. 이제 햄릿은 생과 사의 문제를 초탈하고 인간사를 주관하는 근본적인 힘, 즉 신의 섭리를 의식한다. 그리고 그의 자세는 종교적 믿음으로 승화된다. 악인에 대한 응징을 포함한 모든 일을 신의 섭리에 맡기고 그에게 주어진 고통과 상황을 ‘인내’하면서 더 이상 복수라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다.
복수는 이제 더 이상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아니며, 복수를 둘러싼 더 이상의 갈등도 볼 수 없다. 분열된 자아를 극복한 셈이다. 그가 복수 행위를 수행한다 해도 이제 그의 행위는 정당방위에 해당된다. 클로디어스가 먼저 그를 살해하려고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딜레마는 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존하여 해결된다. 신의 섭리에 의해 악은 스스로 붕괴하고 그를 둘러싼 갈등의 틀이 허물어지는 방식으로 극은 끝나게 된다. 클로디어스의 악은 제거해야 할 사회의 구조적 악이며 햄릿은 신의 대행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사적 복수의 차원을 넘어 공적인 정의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정의 실현의 대리자로서 행동한다.
5막 2장에서 햄릿과 레어티스의 결투가 시작되고 이제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죽기 시작한다. 클로디어스와 레어티스의 계획과는 달리 경기 도중 햄릿이 마시도록 준비된 독이 든 포도주 잔을 왕비가 마시고 죽게 되고, 레어티스는 독이 묻은 칼로 햄릿에게 상처를 내지만 그 자신도 독 묻은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왕비는 죽으면서 포도주에 독이 들었다고 외치고, 레어티스도 죽으면서 클로디어스의 계략을 폭로한다. 은밀히 가려져 있었던 클로디어스의 죄는 이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고 햄릿은 독 묻은 칼로 그를 죽이게 되는데, 이는 윤리에 저촉되는 사적인 복수 행위가 아니라 “공적인 정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의 행동은 지연되지만, 그것은 역사적 비평의 관점으로 볼 때 공적인 정의의 기다림이며, 햄릿은 “기다리는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정의의 대행자인 햄릿이 악한 인물들에게 사약을 내리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악은 스스로 자멸하는 형태를 띠며 복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는 행해진다. 이를 통해 깨뜨려진 왕국의 질서는 회복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부여된다. 그러나 이는 죄 없는 인물들의 희생을 통해 성취된 것이다. 거대한 악이 제거될 때 이와 함께 휩쓸려 나가는 인물이 햄릿이다. 암이 제거될 때 그 주변의 성한 살도 같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흔히 인간의 인식 한계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와 신 앞에서 인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견은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인간은 그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그 어떤 존재보다도 위대하다.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햄릿의 모습에서 우리는 겸허하고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아가 햄릿이란 인물의 불행과 죽음은 독자들에게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자아내며, 이를 통해 응어리진 감정의 찌꺼기들을 해소하면서 정신적 정화를 체험하게 한다.
비극의 결말이 보여주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위안을 얻고 평정심을 회복한다. <햄릿>이란 비극의 결말에서 우리는 햄릿의 주검 위로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한 줄기의 섬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혼돈 후에 다시 회복되고 있는 도덕적 질서다. 그렇다면 이 비극은 결코 슬프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삶을 긍정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햄릿>의 배경은 12세기 덴마크 왕가이며,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범주에 갇혀 있지 않다. 이 작품에 인간 본성과 복수 윤리에 대한 당대의 사고가 드러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만 한정될 수 없는 보편성과 심미적 가치를 또한 지니고 있다. <햄릿>에 재현된 한 왕가의 갈등은 현재 어떤 계층의 집안과 어느 집단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문제라 할 수 있으며, 삶과 죽음,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구라는 문제를 둘러싼 햄릿의 갈등과 경험은 어느 시대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다. 햄릿의 경험은 우리들 중 어느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햄릿은 그가 처한 삶과 존재의 불합리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의 상황은 그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상황이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고리로부터 단절된 햄릿은 고립된 상황 가운데 극단적인 고독을 체험한다. 아버지는 독살당하고, 어머니는 근친상간의 이부자리로 뛰어 들고, 친구와 애인은 그를 배반하고 정탐한다. 호레이쇼 외에는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절은 의미가 없으며, 정의는 존재하지 않고, 그 주위는 온통 감시자의 눈초리뿐이다. 그에게 세상은 온통 구조적인 악으로 뒤덮여 있고, 한 개인이 그 악을 감당해 내기엔 역부족이며, 온 세상은 마치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햄릿의 거짓 광기는 이러한 외부적 상황 가운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의 거짓 광기와 지연과 주저는 일시적인 정지 행위다.
부패한 사회의 한 도덕적 주인공 햄릿의 체험은 우리들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의 한 양식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경험을 이 작품에 투사하여 해석한다. 햄릿은 어긋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전형으로 보이며, 그의 주저함은 이항대립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 작품은 햄릿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동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정의라는 것이 선한 자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결코 쉽게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햄릿의 시대나 지금이나 정의와 불의, 실체와 허구, 이성과 격정, 사랑과 미움은 항상 서로 대립하고, 질서를 유린하는 힘은 항상 존재하며, 삶에 있어서의 불균형은 심각하다. 그러나 극은 희생과 상실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깨어진 질서는 언젠가는 다시 복구된다는 믿음이 있고, 삶의 균형은 다시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존재한다. 이는 모든 비극이 담고 있는 낙관성의 토대다.
셰익스피어는 그가 이해한 인간과 인생을 자신의 거울을 통해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견해를 애써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의 비극은 항상 독자들이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게 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란 인물 가운데 독자들 각자가 자신의 이미지를 찾게 함으로써 동화작용을 불러일으키고, 각 시대는 나름대로 자신의 고뇌와 갈등을 햄릿에게 투사한다. 셰익스피어는 거울에 쌓인 먼지들을 닦아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는 존재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내는 거울(the mirror of life)”이라고 한 새뮤얼 존슨의 논평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햄릿 [Hamlet]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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