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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길이어서 기차는 차츰 가속했다. 철로와 나란히 난 고속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운전사들은 밤중에 불도 신호등도 없이 달리는 긴 기차를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밤중에 왠 화물차?” 낯선 광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0여 분 후 11km 밖 작은 마을 라크 매갠틱 쪽에서 지진이 나는 듯 굉음이 연달아 나더니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밤하늘이 낮처럼 훤해 지면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날 밤 인구 5,900명의 퀘벡시골은 마을이름을 세계지도에 올렸다. 기차가 끌고가던 유조차량 63대가 탈선하면서 화재가 났고 뜨거운 열은 다른 유조차량들을 폭발시켰다. 이 바람에 잠자던 주민 42명이 사망했고 5명은 실종했다. 실종자들은 아마도 화염에 녹아서 ‘증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흔적도, 재도 없이 지구상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불시에 일어난 대형 철도사고는 캐나다 4대 기차참사, 1864년 이후 최대의 사고로 기록됐다. 이날밤 다운타운의 3분의 1이 쑥밭이 됐고, 주민 3분의 1이나 되는 2천 명이 긴급 피난했다. 피해 건물은 1백여 채였다.
탱크에서 쏟아져 나온 원유는 지하수도관에 스며들었고 파이프를 타고 화염을 옮겨 여기저기 맨홀에서도 불이 솟았다. 상수도가 완전 오염되어 당장 식수가 모자랐다. 기름으로 오염된 땅을 바꾸려면 5년이 걸리고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계산조차 어려웠다. 퀘벡정부는 6천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즉각 발표했다. 대신 하퍼 연방총리는 현장에 가보지도 않고 주민을 위로하는 말만 보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아무 소동이 없었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 후유증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전장 1.4km 길이의 긴 기차는 미국서 원유를 싣고 뉴브런스윅의 어빙 정유공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원유수송 기차들은 주민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날 5대의 기관차가 앞 뒤에서 끌고 밀고 해서 미국서 국경을 넘어 라크 메갠틱의 11km 밖 낭트에 도착한 기차는 기관사 취침을 위해 역에 주차했다.
유일한 기관사 하딩씨는 기차를 세운 후 선두 기관차의 엔진을 켜두고 나머지 4대의 엔진은 껐다. 선두의 엔진이 돌아가야 콤프레서가 작동하고 그 힘으로 압축공기가 바퀴에 전달돼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하딩은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 듯 4대의 기관차와 2대의 유조차 등 총 6개의 차량에 수동식 핸드브레이크를 걸었다.
“이 정도면 기차가 미끄러지지는 않겠지.” 안심한 하딩은 더 이상 잠시간을 손해볼 수 없다는듯 서둘러 낭트시내 호텔로 향했다. 그가 호텔에서 잠에 곯아떨어지는 그 시간에 낭트 기차역에서는 엔진을 켜둔 선두차에서 불길이 솟았다.
원래 알지못할 고장이 나있었고 그래서 기름덩이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왔던 차였다. 불이 나자 소방대가 즉시 달려왔다. 이들은 기관차 문이 열려있어서 즉시 엔진을 끌 수 있었다. 76개의 차량을 끄는 긴 기차의 기관실에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게 이상하게 생각됐다.
불은 곧 꺼졌다. 목적을 다한 그들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엔진이 꺼지면 콤프레서가 꺼지고 압축공기가 줄어들면서 브레이크 압력이 내려간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은 몰랐다. 에어브레이크가 풀린 기차는 경사를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필요충족한 핸드브레이크는 최소 17대였다. 보조로 걸어놓은 핸드브레이크는 긴 기차가 끄는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차는 1.4도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차츰 속도가 붙어 고삐풀린 말처럼 라크 메갠틱으로 위험하게 달려 내려갔다. 원래 이 구간의 철길은 1800년대 건설한 후 철로 소유주가 한 번도 손을 보지 않아 모든 기차들이 각별히 조심해서 운행해야 하는 곳이었다다.
시속 101km로 달려온 기차는 커브길에서 탈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구간의 제한속도는 시속 16km였다. 기차가 차례로 탈선하자 유조탱크에서 기름이 터져 나왔고 이것은 곧 화재로 이어졌다. 대참사의 시작이었다.
유일한 기관사가 기관실 문도 잠그지 않은 채 기차를 놓고 마을로 잠을 자러가는 관행은 기이하게 들린다. 철로의 소유주가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도 한국과 다르다. 구간마다 소유주가 있어서 지나가는 기차에게 통행세를 받는다. 대신 주인은 유지 보수를 해야한다. 근무중 기관사가 배탈이 나거나 정신질환이라도 발병하면? 기차를 선로에 잠시 세워두는지, 아니면 참고 다음 정거장까지 가는 지는 관심꺼리다.
이제 교통부는 기관사 2명 원칙을 강력하게 하달하고 사고의 재발방지에 총력을 기울인다. 소잃고 오양간 고치기이지만 정부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었다. 공무원들이 돈 먹고 규제를 느슨하게 해 주는 식의 불미스러운 의심은 없고 정부의 처사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퀘벡경찰과 연방교통안전위원회(Transportation Safety Board of Canada)가 아직도 조사중이다. 이들이 하는 일에 유가족이 보상을 달라고 농성하거나 삼보1배(세번 걷고 한 번 절하기)를 하는 광경은 없다. 단식투쟁이나 기회는 이때다 하고 정부를 공격하는 야당의 모습은 적어도 연방정계에서는 없었다. 대신 주택, 건물과 생명보험금 약 5천만 달러가 청구됐다. 일단의 피해자들과 유가족은 인적, 물적 배상을 위해 집단소송을 걸어놨으므로 사법부가 처리할 일이다.
우리 세월호 사건은 왜 라크 매겐틱 철도사고처럼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할 것은 다하는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지. 물론 캐나다 사고는 47명이, 세월호 사건은 이보다 6배나 많은 304명이 사망했다. 그것도 어린 청소년들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문제성이 심각하다.
아무리 그래도 세월호를 애워싼 시비와 말썽은 매갠틱보다 수십 배나 크고 요란하다. 전국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간단히 판단이 안서는 와중에서 현세에서 가장 추앙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족들을 방문해서 힘을 실어 주었다.
왜? 세상물정을 몰라서? 약자라면 무조건 도와야 하기 때문에? 그의 일거수 일투족, 그의 말 한마디가 세상의 여론을 바꾸는 사실을 모르고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유족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든 사고조사 특별법 초안은 유족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특혜 등을 원칙론적으로 한 두 문장에 압축했지 세상에 드러난 것 처럼 결코 지저분한 요구는 없었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 관계자 처벌을 위해 조사위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코 대학 특례입학이니, 유가족 의료지원 등 여론의 규탄받는 무리한 요구는 없었다. 그러므로 ‘유족들이 시체놓고 장사하려 한다’는 비난은 덧난 상처에 소금바르는 격이다. 이것이 세월호 후유증 이해의 첫걸음이다.
첫댓글 진실은 하나일텐데 왜 말하는 이에 따라 다른가?
이 글이 참이라면 그간의 국내 보도는 무엇인가?
그것이 알고 싶네...
. . . 캐나다의 철도 사고와 세월호의 건이 비슷한 것 같았고, 우리동문 김명규의 글이어서 올렸는데, 오히려 좀 - 난처한 상황이되었네 !
내가 읽어온 김명규의 글들은 상당히 글을 조심스럽게 쓰여진 글들이던데 . . . 이번에는 김명규가 캐나다에 살기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 잘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 . 사실은 캐나다의 철도 사고를 낸 회사의 주인은 미국인 사업가였는데, 사고 즉시 파산신고를 하고 잠적한,
어쩌면 유병언 같은 인간인것 같던데 . . . 그게 혹시 미국식 자본주 사업가들의 본연 아닐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