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와 눈과 바람, 적막을 오르다
글·사진 이영준 기자
인수봉은 때로 저 알프스나 히말라야의 어느 봉우리보다도 가혹한 환경에 마주선다. 비록 그 고도는 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더라도 겨울이면 거기 쌓인 눈과 얼음, 계곡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여느 만년설산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극한을 만들어낸다. 더군다나 이런 날이면 그 절벽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어느 하나 마주칠 일 없으니, 그야말로 산에서의 적막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 바위와 얼음이라면 설악산을 떠올릴 테지만, 번거로운 허가서 같은 것도 필요치 않아 더욱 인수봉의 존재는 매력적이다. 어느 폭설이 내린 다음 날, 그래서 우리는 또 매일 먹는 밥 같은 인수봉을 기어오르기로 작당했다. 이런 날이면, 사람들에 상처받고 떠났다가 말년에 다시 알프스로 돌아온 발터 보나티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진정한 등산은 투쟁과 극기, 이상적이고도 웅장한 산들에 둘러싸인 정신적인 안정과 즐거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선크랙 위쪽, 불규칙하게 나 있는 잘 잡히는 크랙을 등반 중인 유학재씨. 뒤로 부연 가스가 몰려와 고도감이 한층 더 살아난다. 마치 히말라야의 어느 벽을 오르는 것 같다.
입춘 뒤 폭설, 또 다른 모습의 인수봉 평일 오후, 도선사 주차장은 어느 때보다도 한산했다. 더군다나 주차장엔 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몇몇 몰고 가기를 포기한 듯 시루떡 같은 눈 한 덩이씩을 이고 있는 차들 말고는 텅 비어있었다. 가게 앞에 노점도 비닐로 매대를 꽁꽁 싸두곤 주인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입구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관리사무소 직원만이 “위엔 바람이 많이 분다는데 조심하시라”는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그래도 하루재를 오르며 간간히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 가기 전 이 눈꽃 향내를 한번이라도 더 맡으려 달뜬 가슴으로 산을 올랐던 사람들이었다. 길은 러셀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그 며칠 전 내렸던 비로 얼어붙은 땅은 미끄러워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폭으로만 나 있었기에 오르는 동안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옷깃이 스칠 새라 한쪽으로 엉거주춤 비켜 서있어야 했다. 날은 따뜻했다. 아니, 그보다도 입춘이 지난 지금 이 약간의 온기 속에서 우리는 이미 마음으로 봄을 마중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하루재에 서서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불었을 매서운 계곡풍은 그곳에 없었다. 허나 거기서 마주하는 인수봉은 달랐다. 오늘 밤에도 큰 눈이 예정돼 있는 하늘은 잿빛으로 꾸물거리고 있었고, 바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옛 인수산장 터 앞에 잠시 짐을 내려두고 비둘기샘에서 물을 뜨며 채비를 정비했다. 이곳부터 설교벽으로 내려가는 길은 러셀이 되어있지 않았기에, 저마다 스패츠를 차거나 덧바지를 입는 등 준비를 마쳤다. 아마도, 이번 겨울 이곳을 향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인수리지에서 줄곧 능선을 따르지 않고 5미터정도 하강한 후 설교벽에서 올라오는 코스의 동굴을 지나고 있다. 겨울철에는 이곳으로 오는 게 낫다.
어차피 눈 쌓인 인수봉을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몇 곳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고독의 길일 테고, 그 다음이 설교벽이 되곤 하는데, 우리는 아예 인수리지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눈 쌓인 성 밖의 벽이라는 뜻의 설교벽은 인수봉이 드리운 그늘에 가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다. 때문에 이즈음이면 으레 하단 슬랩에는 아예 설벽이 형성돼 반쯤은 걸어 올라도 될 만큼 코스가 쉬워진다. 그러나 그 위쪽으로 갈수록 까다로운 크랙들이 많은데다 기존확보물들은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덮이기 때문에 겨울에 오를 수 있는 코스 중 다소 어려운 편에 든다. 인수리지도 크램폰을 차고 피켈을 들고 오르기엔 그다지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나무 등 이용할 수 있는 확보지점들이 많고 설교벽보다는 피치가 짧아 해볼 만하다. 본래 우리의 계획은 사선크랙 아래, 설교벽과 인수리지가 만나는 너른 테라스까지 가서 비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옮긴 걸음 때문인지 등반 시작지점인 슬랩 아래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오후 세 시가 다 되어있었다. 앞줄을 묶고 나선 유영직씨는 어떻게든 정면돌파를 해보려고 슬랩에서 아이스바일을 긁어가며 힘을 썼지만, 번번히 미끄러져버렸다. 이곳이 처음이라는 그에게 유학재씨는 “완전히 빤빤한 슬랩이니 오른쪽의 나무를 이용해 오르라”고 조언했지만 그래도 쉬운 길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지 몇 번이나 더 그곳에서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후등자들은 쉽게 고정된 로프를 이용해 등강기로 올랐지만 확보물 하나 설치하기 힘든 슬랩에서 선등자의 고충은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듯싶다.
사선크랙은 난이도 5.8급이지만 아이스바일로는 재밍이 쉽지 않기 때문에 확보물 설치도 까다롭다.
다시 걸어가는 구간에서 각자 확보 없이 크고 작은 바위들을 넘어서고, 이제 본격적인 등반이라고 할 수 있는 2피치 크랙 앞에 섰다. 다른 계절이라면 어떤 이들은 홀몸으로 슥슥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지만, 유영직씨는 가장 왼쪽 사선크랙을 따르면서도 확보물을 촘촘히 설치했다. 테라스에서는 비로소 뒤로 시야가 트이며 눈구덩이에 파묻힌 북한산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그 아래로 늘 펼쳐졌던 아파트 숲은 부연 가스에 가려 하나도 보이질 않았으니, 오로지 적막만이 둘러싼 이 인수봉 자락에서 우리는 설악을 보았고, 저 히말라야를 보았던 것이다. “더 갈까요? 여기서 자고 갈까요?” 고정로프를 따라 턱을 올라서 한참이나 완만한 사면을 러셀하며 지나니 유영직씨는 저만치 앞서가, 비탈이지만 조금 평평한 터를 발견하곤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었기에 야간등반을 하기 보다는 쉬어가겠다는 마음이 앞서 우리는 누가 말하기도 전에 눈을 다져 저마다 등을 기댈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사선크랙 아래 아늑한 테라스에서처럼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호사로움은 없었지만 눈 내리는 소리 외에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는 산의 침묵은 잠시 저 아래의 것들을 잊어도 될 만큼 고요했다. 딱히 긴긴 밤 무얼 할 것도 없던 우리들은 일찌감치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산 그림자 아래에 하루를 뉘였다. 아침, 눈을 뜨니 침낭커버에는 꽤 두꺼운 눈이 쌓여 흐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도 풍성한 열매처럼 매달린 눈덩이들이 밤새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렸음을 알리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지나온 길들의 흔적은 신설에 덮여 지워져있었고, 우리는 다시 그 길 없는 길을 헤치며 위로 위로 나아갔다.
가는 겨울, 오는 봄 사이를 오르다 평소엔 그저 줄 없이도 걸어 오르는 턱이었지만 잠시 선두를 교체한 피터 젠슨은 프렌드를 끼우곤 인공등반을 해야 했다. 고산에서와 달리 눈 쌓인 인수봉은 그 등반의 난이도가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쉽지는 않은데, 바로 눈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년설들은 대체로 설빙에 가까워 피켈로 타격해 지지점을 얻을 수 있는데 반해 인수봉의 눈은 그렇게 써먹을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때문에 이 계절 인수봉 등반은 눈 바위 얼음이 섞인 믹스드 클라이밍(mixed climbing)이라기보단 눈을 치우고 바위를 홀드삼아 오르는 드라이 툴링(dry tooling)에 가깝다.
유영직씨가 사선크랙 위쪽에서 등반을 시작하고 있다. 손발 재밍이 잘 되는 쉬운 크랙이지만 이중화를 신고 오르다 보면 크랙에 신발이 끼어 애를 먹곤 한다.
그가 한 피치를 오르고 나서 곧바로 유영직씨가 로프를 건네받았다. 눈이 가득 쌓여 허리까지 빠지는 좁은 걸리(gully)를 지나 이제 진짜 능선과 만나는 지점에 다다른 그는 “어디로 가야하지?”라며 묻는다. 능선 위쪽을 따르는 슬랩을 넘어서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마땅히 돌아갈 수 있는 우회로도 보이질 않는 곳이다. 해답은 하강에 있다. 팔뚝만한 나무에 로프를 걸고 반대편으로 5미터쯤 하강하면 거기 숨겨진 통로, 리지를 관통하는 동굴이 나오기 때문이다. 눈가루가 풀풀 날려 옷 속을 파고드는 가운데 우리는 티롤리안 브리지를 하듯 로프를 팽팽히 당겨 확보하고 한 사람씩 그 은밀한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동굴에선 다시 설교벽의 반대편으로 하강을 해야 하는데 눈 속에 확보물들이 깊게 묻혀 한참을 파내고서야 낡은 슬링 뭉치가 나타났다. 오래 전부터 미덥지 않아보였던, 녹슨 하켄 두 개를 이퀄라이징 해둔 것이었지만 그런 안전에 대한 확인 같은 것은 할 여유도 없이 그저 막연한 기대로 얼어붙은 썩은 하켄에 체중을 실었다. 침니 속에도 눈이 가득 쌓여 하강의 공포가 덜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눈 쌓인 인수리지의 하이라이트는 이후 나타나는 슬랩이다. 남쪽을 향해 있는 벽이기에 날이 조금만 따뜻해도 슬랩에 쌓인 눈이 녹아 바위가 드러나며 크램폰을 차고 오르기엔 여간 까다롭지 않은 크럭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째 영하 10도쯤 내려간 날씨 덕분인지 슬랩에 쌓인 눈은 어느 정도 발 디딤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굳어있었고, 홀드를 잘 살펴가며 오를만 했다. 저 아이거의 힌터슈토이셔 트래버스 같은 너머로 한 사람씩 사라지고, 에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 가운데, 로프에 전해지는 팽팽함만에 의지해 또 하나 둘 그 슬랩을 건너갔다. 사선크랙에는 그전에 보이지 않던 볼트가 하나 더 박혀있었다. 아마도 더 미끄러워졌을 크랙에 불안감을 느꼈을 누군가가 설치했을 터였다. 하지만 크랙은 여전히 확보물 설치가 힘들더라도, 맨 위쪽 턱에 쌓인 눈들을 헤치고 홀드를 찾는 일이 아니라면 인공등반으로라도 오를 만 했다. 피치를 끊는 테라스에는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있어 기존에 확보하던 쌍볼트는 찾을 길이 없었다. 선등자는 로프를 나무에 고정하곤 따로 크랙에 프렌드를 설치해 자기확보를 하고 있었다.
동굴로 내려서기 전 하강 준비를 하고 있는 유영직씨. 뒤로 귀바위가 보인다.
고도감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구간은 이후로 두 피치로 나누어 오르게 되어있는 크랙이다. 60미터 로프를 사용할 경우 한 번에 올라도 되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25미터쯤 올라간 지점의 암각에서 피치를 끊는 것이 낫다. 지금까지 오른 곳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손발 재밍이 확실한 구간이지만 의외로 선등을 하던 유영직씨는 넓은 크랙에 이중화가 끼어 고생을 하며 그곳을 돌파해야 했다. 암각에 슬링 하나를 두르고 발디딤이 불안한 작은 레지에 매달려 있자니 허리가 아파오기도 했지만, 사방 짙게 깔린 안개 속에 우리는 더욱 등반에 몰입해갔다. 그러나 정상까지 갔다가 하강하기엔 앞으로 최소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오후 네 시, 우리는 결국 작은 바위들을 넘어서 C코스와 만나는 지점에서 하강을 하기로 결정했다. 눈에 뭍힌 피톤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결국 본래의 하강지점에 앞서 작은 나이프 하켄 하나에 의지해 첫 10미터쯤은 내려가야 했다. “맨날 이런 데만 오니까 히말라야에 더 가고 싶은 것이지.” “그렇지, 나뭇가지 안 걸리는 산에.”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피톤에 로프를 걸었다. 우리는 흩날리는 설연을 따라 낙하하며, 숨은벽 사이로 난 계곡 속으로,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2013년의 겨울과 봄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인수봉에 눈이 녹으면 그 번잡한 사람들 속에, 이곳을 또 잠시 멀리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 어스름에 백운산장 문을 두들겨 뜨끈한 국수 한 그릇으로 하루 종일 주린 배를 채우면 원이 없겠다는 작은 소망도 함께 배낭에 넣고서. ⓜ
extreme tip ▶ 눈 위에서 취사시 유용한 알루미늄 쟁반 겨울은 눈이 많은 계절, 눈 위에서 취사하기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로 겨울에도 산에서 비박을 위주로 한다. 그러다보니 눈 위에서 바로 버너를 사용해야 한다. 눈 위에서 버너를 사용하다 보면 코펠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특히 높이가 낮은 호스형 가스버너는 화력이 코펠 밑으로 돌아 눈을 녹이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펄펄 끓은 내용물이 넘쳐흐르면 더욱 빨리 바닥이 녹아 코펠이 기울어져 순식간에 넘어진다. 예전 파키스탄 원정 등반 때 눈 위에서 취사를하다 홀라당 엎어버려 다시 식사준비를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 끼를 소모해버려 등반이 엄청 힘들어졌다. 계획된 알파인 등반에서 먹지도 못하고 식량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그 당시 원정대원들은 이후 3일을 굶어가며 겨우 베이스캠프에 귀환한 적이 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눈 위에 뭔가를 받혀 쓰면 좋은데 오늘 그 제품을 소개한다. 바로 알루미늄 쟁반이다. 가볍고 견고한 이 쟁반은 겨울철 텐트 안에서 버너를 사용할 때도 아주 유용하다. 일반 주방용품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사각 알루미늄 쟁반으로, 이것은 버너에 물이 넘쳐 날 때도 모아주고 접시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눈을 푸거나 뭔가 담을 때도 사용하므로 겨울 철 만능 주방기구로 활용할 수 있다. 예전에 설동을 팔 때 손 도구(삽)로 아주 유용하게 쓴 적도 있다. 사각쟁반 크기는 다양하다. 제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데 크기마다 호수가 있다. 버너 받침대로 쓰는 것은 1호나 2호가 좋다. 1호는 가스버너 하나를 놓고 쓰기에 좋고 2호는 조금 더 커서 혹시 넘치는 국물을 받칠 수 있어 텐트 안을 쾌적하게 한다. 배낭 안에 수납하기가 번거로우면 외부에 매달기 위해 못이나 송곳으로 사각 모퉁이 위쪽에 구멍을 내어 고리를 만들면 된다. 가격도 저렴해서 사용하는데 부담이 없다. 1호 크기는 사방 20cm에 높이 2.6cm이고, 가격은 2,000~2,500원, 2호는 사방 23.5cm에 높이 2.9cm이고 가격은 2,500원 내외이다. 글 유학재 휠라스포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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