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윤 갈등 봉합은 언 발에 오줌 싼 것. 두고 보시라 결국 한동훈 물러난다.
저는 그렇게 본다(박 지원)“ OK, 알았으니까 이젠 제발 입 닥치고 계시라.
앞 뒤 정황을 보면 '한/윤 갈등'이 실재하고 있긴 한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한'이 그녀를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한 것은 잘못한 겁니다. 워딩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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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 왜 일어났을 것 같냐. 자유 평등, 외적으로 표방한 것은 그것일
수 있지만,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 난잡한 사생활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민중 시위대가 건물을 털 때마다 감성이 폭발한 것이다. 이것이 감성
점을 폭발시켰다고 본다. 디올 백 동영상을 차마 못 봤다. 저도 기사 등으로
봤는데, 적절치 않은 것이잖나. 이걸 어떻게 실드칠 수 있겠나. 이건 사죄드리고
국민들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게 (납득 시킬 수), 바짝 엎드려 사과할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한 동훈이 대권야욕을 들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바른말, 맞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근데 최근 김경률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언급한 이유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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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은 김 경률(56, 참여연대, CPA))이 나름 먹물이라고 쇼펜하우어를 빗대
우회했지만 싸잡아서 '욕망'을 깐 것 같아요. 한 동훈은 대권 야욕을 가지면 안
됩니까? 사람이 명품 좋아하면 탄핵을 받아야 합니까? 마리앙투아네트같은
여성을 싫어할 남자도 있나요? 왜들 그러세요. 쇼는 자신의 개 이름을 헤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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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고 헤겔 놈 새끼! 라고 부를 정도로 헤겔을 질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역 땐 빛을 보지 못했고 일흔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히트 쳤습니다.
그는 행복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요소가 아닌내적인 요소에 있으며, 부와 명예
같은 객관적인 조건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주관적인 측면을 더 중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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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는 행복의 핵심을 '자기인식’, ‘개성’ 그리고 ‘자긍심’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고’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쇼펜하우어는 바깥 세계가
우리의 감각과 표상을 통해서만 알려진다는 칸트의 기본입장을 의심 없이 인정
해요. 차이점이라면 칸트의 물 자체 개념을 변형하여 ‘의지’로 새롭게 규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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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내부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으로 보는 점이에요. 칸트의 불가지론을 넘어서
의지는 시간과 공간, 다수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불변하는 세계의 유일한 세계
이면서도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개별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론에 따라 이 세계를 이념의 객관화로 보면서 의지는 여러 단계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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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단계인 무기물에 작용하는 장력과 중력은 외적 조건에 자극받는
운동에 불과하지만, 더 높은 단계인 식물과 동물에서는 ‘종적 특성’을 넘어
‘개별적 특성’을 지니게 돼요. 낮은 단계의 존재일수록 종적 특성이 강하고
높은 존재일수록 개별적 특성이 강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인간은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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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강한 존재입니다. 의지는 욕망에 앞서 신체의 기관을 형성 한대요.
잡으려는 의지가 손을 형성하고, 보려는 의지가 눈을 만들고, 먹으려는
의지가 소화기관을 발달시키듯 인식하려는 의지가 뇌를 형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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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욕망은 의지의 객관화인 신체 기관에 의해 나중에 생겨났대요. 형성
되는 순서는 의지-신체-욕망 순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본질적으로 동일
합니다. 신체의 각 부분은 의지가 나타내는 욕망과 완전히 일치하지만, 욕망이
지향하는 바는 대상에 있지 않아요. 욕망은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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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욕망 자체가 스스로 대상을 결정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밥을
본 후 식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고 싶은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삶에 목적이 먼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려고
하다 보니 나중에 목적을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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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지향성도 없이 ‘욕망하는 건 고통이다’라는 표현은 인간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잘 보여줍니다. 욕망의 단계에서 가장 낮은 욕망은 생식기로
표현된 성욕이며 가장 높은 욕망은 지적 활동인데, 이 양극단에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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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배고픔과 목마름처럼 완전히 채워질 수
없대요. 하나가 충족되면 충족되지 않은 열 가지 욕망이 남아있고 충족보다
결핍은 늘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고 충족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결핍의 지양으로서의 만족감을 잠시 가질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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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감은 결핍에서 만족으로 넘어가는 현상에 불과하며 지속적이지 않아요.
결국 욕망의 충족은 매우 빠르게 성취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해요. 쇼펜하우어는 행복과 불행의 왕복운동을 ‘시계추’에 비유해요.
시계추는 왕복 운동을 무한히 반복해요. 인간은 결핍상태일 때는 고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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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달리다가 막상 결핍이 충족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지나친 충족에 권태를
느끼게 돼요. 따라서 인간은 늘 고통과 권태 사이의 양자택일 앞에 놓여있어요.
욕망의 최대결핍은 고통이고 욕망의 최대만족은 권태니까요. 그 가운데서
만족하는 짧은 순간에만 행복을 느낄 뿐, 무한히 양극단의 불행 사이를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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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배고픔은 없는 자의 고통이지만 폭식은 있는 자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빈자는 가난에 고통을 받고 부자는 따분함에 고통을 받는다고 해요.
알량한 행복은 시계추처럼 짧고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는 것 아닙니까?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간이 행복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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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기인식은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행복을 누릴지는 의욕과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며
무엇이 자신과 맞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많은 것 중에
자기에게만 적합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것, 또한 자기에게만 즐거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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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삶의 균형은 잡히지 않고 후회와 고통만을 맛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자신만의 소질을 발견해야
제3의 성격이 뚜렷해질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의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성격이 드러나며, 그것의 성취를 통해 행복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Can't you hear me? 내 말 안 들려
2024.1.25.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