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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으나(탄식)(1-4)
불신앙의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즉시 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릴 만큼 힘든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1-4)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죽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다른 것들로 인생의 갈급함을 해결하려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1)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1-2)
시인은 하나님과 분리된 실제적 고통을 자연의 이미지와 직유로 표현합니다. 시인의 첫마디는 ‘사슴처럼’입니다. ‘시냇물을 갈망하는 사슴처럼/그렇게 내 영혼이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1). 히브리어 본문의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생략해도 무방한데 생략하지 않고 반복한 ‘갈망하다’(‘갈급함 같이’, 개역개정)동사 형태는 시편에서 두 번 반복되며, 구약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드문 표현입니다(참조. 욜 1:20, ‘헐떡거리오니’).
하나님 만나기를 열망하는 시인의 절박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내 영혼’, 곧 내 목숨처럼 절실합니다. 시인은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 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의 마음을 이보다 더 간절히 표현할 수 있습니까? 시인은 또 반복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습니다’(2a). 시인이 찾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내 생명’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을 시인의 생명과 연결 짓습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언제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습니까?’(2b) 2절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 곧 ‘엘로힘’이 두 번 반복됩니다. 구약 시대 모세를 제외하고 누구도 하나님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인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과 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사람들의 조롱과 순례의 기억(3-4)
시인은 내 눈물이 밤낮으로 나의 음식이 되었다고(3a)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온종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3) 묻습니다. 시인이 밤낮 눈물을 음식처럼 삼키는 이유는 비아냥거리는 질문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롱은 이방인들이 침입하여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주로 하던 말입니다(시 79:10; 115:2; 2:17; 미 7:10).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조롱하는 말이어서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거나 시인이 당면한 위기 속에서 그를 미워하는 원수들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시행은 포로기 상황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옛일을 회상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일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숨을 토해내듯 절망적인 고통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시인은 지난 시간을 회상합니다. 시인은 많은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까지 동행했었습니다. 그때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흥분된 축제가 계속되었습니다(4). 시인은 무엇보다 성전이 있는 곳까지 많은 이들과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로’ 충만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성전으로 행하는 순례의 발걸음에서 터져 나왔던 환호성과 기쁨에 넘쳤던 축제 현장이 그립습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5)
하나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시인은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있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시인은 믿음이 사그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단호하게 꾸짖습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시인은 스스로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내 영혼아/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낙심 가득한 자신을 향해 꾸짖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치 시 전체의 후렴구처럼 기능을 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내가 잠잠히 그 앞에서 구원을 찬양할 것이라’(5cd). 시인은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지난날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며 기뻐했던 축제를 추억한 것처럼(4), 자신에게 하나님의 임재, 그의 구원을 찬양할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절망 끝에 희망을 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보다 더 큰 희망은 없습니다.
죽음의 바다와 원수의 압제 속에서(탄식)(6-10)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합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 절망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그분이 구원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6-10)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먼저 낙심한 상태에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요단 땅, 헤르몬 산, 미살 산입니다. 이는 공간적인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시인의 고통을 극대화합니다. 고통이 극심한 때야말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1) 위협적인 폭포와 깊은 바다(6-7)
다시 탄식의 언어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통의 깊이를 드러낸 구성입니다. 시인의 내적 고통은 점점 깊어집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기억합니다’(6a). 생명이 녹아내리듯 고통스러운데도 당신을 기억한다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때 시인은 특별한 지명들을 언급합니다. 요단과 헤르몬 땅과 미살 산에서부터 내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6).
이 세 개의 지역이 시인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입니까? 헤르몬 산과 미살 산은 약속의 땅 밖에 위치했지만, 요단과 공통점이 있다면 물입니다. 요단강의 수원지가 헤르몬 산입니다. 이후 시인은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원시의 바다, 곧 깊음(테홈)과 연결시킵니다. ‘당신의 폭포 소리를 따라 깊음이 깊음에게 소리를 발하고, 당신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습니다’(7).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것이나, 모든 파도와 물결은 모두 물의 모티프에 근거합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폭포 소리에 연결되었습니다.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혼돈을 상징하는 원시의 바다, ‘테홈’으로 연결됩니다. 이 혼돈은 급류에 휩쓸리는 시인과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내 영혼이 녹아내려 당신을 기억한다고(6a) 말한 시인의 진짜 의도는 파괴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시인은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지만(1-5), 이와 대조되는 혼돈과 죽음의 물, 곧 ‘깊음’의 위협에 버려진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죽음의 물이 자기를 덮쳐오는 것처럼 절박한 상태입니다.
(2) 시인의 기도와 대적들의 비아냥거림(8-10)
그러나 시인의 두려운 마음이 하나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행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가 그의 신실한 사랑을 명령하시고, 밤에는 그의 노래가 나와 함께 있으니, 내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8).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두려움이 하나님 사랑 예찬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거짓 없는 마음, 진실한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신실한 사랑’이나 ‘실패하지 않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발휘되는 낮의 질서를 찬미합니다.
시인이 고요한 밤 동안 낮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며 그를 향해 기도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시인은 1인칭 직설법으로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내가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아룁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 때문에 비탄에 빠져 다녀야합니까?’(9) 시인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며 불평을 쏟아냅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어둠 속을 헤매는지 알고 싶습니다.
시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또 있습니다. 뼈를 찌르는 칼처럼 온종일 대적이 비방하는 말을 견딜 수 없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시인의 대적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돕지 않는 것처럼 보여 조롱합니다. 시인은 응답 없는 하나님, 멀리 계신 하나님, 숨어 계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절망적인 상황을 탄식하고 탄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을 부재가 아니라 현존의 다른 방식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후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소망)(11)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것같이 느껴져도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래서 시민은 그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하나님께서 생명과 반석이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 진리이기에 시인의 호소는 의미 있는 기도가 됩니다.
11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하나님의 숨어 계심과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는 아닙니다. 침묵은 현존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다시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에게 질문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구약성경에서 42편과 43편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말,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5,11; 43:5)는 자신을 향한 꾸짖음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의 언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서 그분의 임재와 구원을 여전히 잠잠히 찬양할 것이라 고백합니다. 깊은 절망과 내적인 고뇌가 구원의 희망과 교차하여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물 없는 사슴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인생도 죽음을 맞을 뿐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있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메일 보좌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