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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웠지만 길은 팡 뚫렸습니다. 하기야 여행객이 없으니 갈 일도 없겠지요. 근데 도시 근교 해수욕장으로는 접근성이 매우 좋습니다. 시간 안에 해변을 걸을 수 있다니 외국의 수도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 아닌가요? 평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휴가철인데 이렇게 한산한 것은 코로나19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수시로 들려오는 거리두기 홍보 방송은 귀가 따가울 정도입니다. 그렇게 크게 방송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귀청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뭔 소린가 했지요. 점심 먹다가 철렁 했습니다. 딸 녀석 모처럼 휴가라는데 함께 할 시간도 마땅치 않아 잠깐 바람 쐬려고 다녀왔습니다. 을왕리 해수욕장, 공항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갈 때마다 고속도로 비용 때문에 열 받습니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
한창 붐벼야 할 때임에도 해변과 주변 식당들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덕에 손님 대접은 받았지요. 식사 중 물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시간 참 잘 맞았네! 그래도 바다 구경하고 가니 마음은 시원합니다. 왕복 시간을 포함해서 다섯 시간의 휴가, 그렇게 보냈습니다. 도로 비용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바다 구경 한 번은 해야 여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이 열대야는 언제나 끝나려는지, 잠자리 들기가 겁납니다. 선풍기라도 돌리고 잠을 청합니다. 에어컨도 쉬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지요. 하루하루 지나 8월도 한 주를 보냅니다. 올림픽도 끝나 가는데 마지막 시원한 소식을 기대합니다.
그래도 간다, 그것이 시간 아닙니까? 아무튼 더위, 코로나, 조심하며 멋진 주말을 지내기를 바랍니다. 막내 궁사처럼 우리도 ‘빠이팅!!’
2021년 8월 7일 김종우 목사
첨부 :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1
1. ‘요한계시록’을 들어가며
김종우 목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것은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부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는 찬송이지요. 그렇게 찬송하듯이 우리는 그 날에 정말 우리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봅니다. 세상에서도 결혼을 하려면 무엇인가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하루 이틀에 되는 일도 아닙니다.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히 준비하지요. 그런데 만약 타국으로 시집을 간다, 장가를 간다고 생각해봅니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준비할까요? 살림살이는 현지에 가서도 준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여기서 챙겨간다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두에 둘 것은 집안에서만 살 것이 아닐 텐데 타국이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바로 언어입니다. 말이 통해야 뭘 하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영어를 배워둘 것이고 중국 사람과 결혼할 것이면 중국어를 배워두려 할 것입니다. 그래야 부부 사이에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러니 그 쪽 언어를 조금이라도 배워서 결혼생활에 들어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어디로 시집가려고 합니까?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이 어디 계신다고요? 천국에 계십니다. 천국으로 시집가려는데 그러면 ‘천국어’를 좀 배워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천국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딱하다 싶습니다. 그냥 주여, 주여 하면 만사형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런 무식한 신부를 기쁘게 맞으실까 그것도 걱정됩니다. 막연히 신앙하면 안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왜요? 양측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달라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읽는 성경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신앙하는 성경은 당시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교훈(율법)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예언)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증거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네가 가르치고 선포하는 말과 다르다고 구박하고 핍박하였습니다. 눅 4 : 16 - 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자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침 선지자 이사야의 글입니다. 예언서이지요. 당시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였지만 그 ‘나’는 당시의 이사야가 아니고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뒤 예수님이 그 사실을 선포해주십니다. 20 - 21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하시니” 이 약속(예언)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져 너희 앞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습니다. 오히려 딴 짓하고 있습니다. 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엉뚱한 예수님 과거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답답하지요.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시다가 수가라는 성 우물가에 잠시 머물러 쉬고 계셨습니다. 때는 정오 쯤 되었을 때입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을 길러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가 오갑니다. 이 이야기가 요 4장에 나옵니다. 분명 주제는 ‘물’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물이 서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요 4 : 13 -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차이를 이해하지요? 여인이 길러 온 물은 우리 육신이 먹는 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물은 우리 영이 필요로 하는 물입니다. 여인은 땅의 언어로 ‘물’을 이야기했고 예수님은 하늘의 언어로 ‘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땅의 언어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늘의 언어 소위 ‘천국어’로 말씀하셨다가는 땅의 어느 누구도 읽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읽을 수 있도록 땅의 언어로 기록해주셨습니다. 문제는 하늘의 언어로 바꿀 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을 그냥 ‘물’로 생각했다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인도네시아 조그만 섬에 ‘찌아찌아족’이라는 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 기업인이 그곳에 들어가서 사업을 하는데 이 부족과 거래함에 어려운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말은 하는데 기록이 없는 것이지요. 알고 보니 문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한글은 소리글이기에 소리만 나면 문자화가 가능합니다.
지금 그곳에 가면 교과서가 다 마련되어 있어서 학교도 생기고 아이들과 사람들이 공부를 합니다. 문자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모두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읽기는 하는데 뜻을 압니까? 그들의 언어입니다. 문자만 우리 것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읽기는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성경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언어를 배우지 아니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경이 그렇게 기록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들어가 보면 압니다.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의 여러 예언서는 우리가 어려워하고 읽기 불편한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이유들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배워가면서 그런 어려운 점들을 극복해가는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르라고 만들어준 책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소망하는 영생의 길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아무도 모르게 만드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문제는 동네방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집에도 비밀번호가 장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옥스포드 살인사건>
완전 범죄란 전혀 무관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놀랄만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범행을 가리켜 ‘완전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회현상을 비꼬는 듯한 일갈입니다. 범죄에 범인이 없다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단지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어느 기관만의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 요소가 됩니다. 그러니 범인을 찾아내야 하고 아니면 범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모두들 안심하는 가운데 범인은 숨어서 쾌재를 부르며 낄낄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웃기는 일이지요. 그런데 때론 사회가 그렇게 움직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의 심리적 안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유명인사의 살해 현장에 두 사람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습니다. 수학자 ‘아서 셀덤’ 교수와 대학원생 ‘마틴’입니다. 셀덤 교수는 피살자의 친구이고 마틴은 피해자의 집에 하숙하는 대학원생입니다. 그리고 마틴은 셀덤 교수에게 학위 논문을 지도받으려 유학을 온 학생입니다. 물론 교수의 지도를 받는 것이 당초 불가능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더구나 셀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서는 실망하여 떠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이 집 앞에서 만났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집에 들어서서 살인 현장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경찰의 조사를 받습니다.
피해자의 집에 하숙을 청하여 들어온 마틴은 주인이 매우 유명한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젊은 딸이 있는데 성숙한 딸 ‘베스’는 엄마의 간섭을 매우 꺼려합니다. 피하고 싶어도 아직 그럴만한 능력은 없는 듯합니다. 독립에 대한 간절한 꿈은 있어도 현실에 막혀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베스에게 어느 날 마틴은 ‘베스도 할 수 있다’는 언질을 던집니다. 어쩌면 마틴은 무심코 던져준 말일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한 격려요 위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어떤 힘을 발휘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네 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말의 힘’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적용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수학공식과 상징으로 이어지는 범죄 수사극이며 추리극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 깊은 뜻을 찾아내기도 따라가기도 벅찹니다. 흥미를 가지고 그러나 힘들게 따라가기는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끝 무렵 전체적인 사건의 전말은 이해가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좀 다른 점에 관심이 갔습니다. 마틴이 가까이 접한 여인이 두 사람 등장합니다. 베스는 하숙집에서 만난 여주인의 딸입니다. 첼로 연주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기 앞가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여자가 있습니다. 병원 간호사입니다. 셀덤 교수하고도 아는 사이입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릅니다. 하기야 이전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니까요. 마틴과 잠자리까지 같이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티격태격 하면서도 두 사람 관계는 긴밀해졌고 마치 평생을 함께 하려는 마음까지 가집니다. 결국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싶었을 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꿈을 따라 비행기에 오르려 합니다. 그래서 마틴은 공부를 접고 간호사도 병원을 그만두고 해외로 날아가려는 것입니다. 막 출구로 나가려는 순간 여자의 말 한 마디에 퍼뜩 깨닫는 무엇인가가 생깁니다. 그래서 가방을 열고 소지품 중 처음 살인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뒤집니다.
일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가끔 질문해보는 문제입니다. 아마 20세기 때만 해도 남자의 경우 일에 우선을 두는 경우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라고 안 그런가요? 하는 반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그의 가치관에 따라서 다른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구태여 남녀를 가를 필요도 없다고 여깁니다.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지요. 더구나 이것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있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어찌 보면 그만큼 아직 사랑의 깊이에 빠지지 않았나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거야? 놀란 여자는 아주 잠깐 망설임이 보이는 듯했지만 곧바로 출구로 나가버립니다. 마틴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식이지요.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갔습니다. 마틴은 돌아와서 사건의 끝이, 끝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납니다. 궁금한 것은 베스도 마틴을 좋아했는데 마틴은 왜 간호사 쪽으로 기울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사랑에 시간은 필수품입니다. 기다림일 수도 있고 함께 나눔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옥스포드 살인사건’(The Oxford Murders)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2008년 작품을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에 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컨택트>
외계와의 조우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 동안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대충 두 가지로 요약될 듯합니다.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와 친화적으로 대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적대적인 경우, ‘우주전쟁’이나 ‘인디펜던스 데이’ ‘에어리언’ 등이고 친화적인 경우 대표적인 것이 ‘ET'입니다. 어찌 보면 친화적인 것보다는 적대적인 내용의 이야기가 더 많은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교통보다는 경계와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쏟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생존 본능에 더 가까운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모두 상상의 이야기일 뿐 우리는 아직 실제로 접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많은 것은 우리의 관심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실 점점 과학이나 기술도 발전하고 있고 지구 밖으로의 여행도 조금씩 이루고 있으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이미 다녀왔고 이제 화성까지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 대신 로봇이 먼저 가서 활동을 하고도 있습니다. 더구나 지구의 환경 악화와 자원 고갈로 다른 별에서의 생존이나 자원 지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혀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지구 밖에서의 생명체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있을까 없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등등 여러 가지로 상상을 일으킵니다. ET나 에어리언도 그 상상의 산물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을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곳곳에 엄청난 크기의 조개 모양의 우주선이 나타납니다. 한 군데도 아니고 12곳에 동시다발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무슨 적대행위도 친화적 접근도 없습니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일정 시간마다 우주선 하단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이 우주선을 접한 나라들마다 긴장하여 대책을 강구하느라 법석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다룰지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로 연락하고 국제적 협력을 찾습니다. 역시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대화를 시도하자는 측과 쳐 없애자는 측의 의견이 대립합니다. 문제는 대화가 통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단 용기를 내어 출입구(?)가 열렸을 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커다란 화면 같은 것만 등장합니다. 무엇을 어쩌자는 것이지? 방사선 차단이나 공기 흡입 등의 장비를 준비하지만 다행히 그런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위험한 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경계를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을 찾으려 언어학자와 과학자를 부릅니다. 그래서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을 부릅니다. 그리고 접촉을 시도합니다.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호위를 받으며 우주선 안으로 진입합니다. 여태의 상황으로 보아 적대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듯합니다. 루이스는 용기를 내어 대형화면으로 다가갑니다.
한편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말 그대로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피난(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사재기, 도적질, 폭동 등등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곳도 있습니다. 마치 곧 세상이 종말을 고하려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저기 종교적 행사를 하는 곳들도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들에서는 탈취와 난동이 벌어집니다. 군경이 합하여 질서를 잡으려 애씁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있지요. 그런가 하면 제대로 질서를 잡지 못하는 정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현상들을 방송 매체들은 실시간으로 중계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강대국 몇이 전쟁을 수행하기로 합니다.
루이스와 이안은 몇 번이고 드나들면서 대화를 이끌어내려 합니다. 실제적으로 진전이 생깁니다. 어느 정도의 소통이 이루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확실하게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서도 같은 용어이지만 다르게 사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종이 다른 외계인과의 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루이스는 외계인에게 자신을 알리고 또한 외계인이 전하는 그림 같은 문자를 해석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합니다. 물론 옆에서 이안은 실제적 도움보다는 심리적 안정과 격려를 통해 루이스를 도우며 지지해줍니다. 아무튼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는 가운데 전쟁 발발의 시간은 촉박해집니다.
어찌 보면 전쟁은 가장 쉽고 편하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만큼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어떠한 적대행위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결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앞을 내다볼 수만 있다면 그런 위험은 피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눙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 어떠한 존재이든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는 것이 생명체의 특징이고 삶의 길이라 생각해봅니다. 영화 ‘컨택트’(Arrival)를 보았습니다. 2016년 작입니다. 영어 제목보다 우리말 제목이 더 실감이 납니다. 그것도 영어이기는 하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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