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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유년시절과 상업 활동
김만덕은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든 기녀의 집에 의탁하였다. 어른이 된 후,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 습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하였다.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만덕의 알현을 받은 정조가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수 있다. 이듬해인 1796년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을 제수하여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사후
1812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한라문화제 때마다 모범여인에게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2010년 한국방송 1텔레비전에서는 《거상 김만덕》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영하고 있으며, 고두심, 이미연 씨등이 출연하고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