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學校/김종삼
공고公告
오늘의 강사진講士陣
음악 부문部門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部門
폴 세잔느
시 부문部門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缺講
김관식金冠植, 쌍놈의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持參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 敎室內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金素月
김수영 金洙暎 휴학계 休學届
전봉래全鳳來
김종삼金宗三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 기다리고 있음
교사校舍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
<시 읽기 > 詩人學校/김종삼
김종삼 시인의 이 시는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좋아하고 있지만 시 혹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한 번 제기하고 그 본질을 만나보는 데 귀한 자료가 됩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제도권 내의 공식적인 학교가 필요한가요? 이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할 마음이 크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문예창작과라는 이름으로, 또는 시창작 강좌라는 명칭으로, 제도권 안쪽의 냄새를 풍기며 운영되는 공식적인 학과나 강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짐작하기엔, 외양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소프트웨어는 일반 학교와 아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획일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유니폼을 입는 사관학교와 아주 먼 거리에 시인학교와 문예교실 그리고 예술학교가 있습니다.
몇 해 전, 제가 아는 유명한 한 소설가가 우리나라의 제법 큰 기관에서 주관하는 문예창작 강의시간에 막걸리 병을 들고 들어갔다가 해고되었습니다. 그 파격을, 그 술의 상징성을 엄숙하고 도덕적이며 착한 수강생들이 소화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파격을, 그 술의 상징성을 엄숙하고 도덕적이며 착한 수강생들이 소화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해고된 소설가는 “그럴 줄 알았다”며 금방 뒤로 물러서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파격을 더욱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듯하였습니다.
방송국에서 음악담당 일을 하며 근 20여 년의 직장생활을 한 김종삼 시인에겐 음악과 시가 있을 뿐, 현실 속에서의 생활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세속적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음악과 시가 생의 전체를 차지하는 듯, 그것에 기대어 유미적인 자유주의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아낀 아름다움과 자유로움, 이 두 가지는 생의 최고 가치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것을 지키기 위하여 감당해야 할 세속의 위험물들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위 시는 기법이 특이합니다. 시의 전문이 공고를 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공고’라는 다소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을 대하면서 문득 시를 읽는 우리들은 긴장하게 됩니다. 공고란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위압적 명령어 같고, 집단을 상대로 하여 만인이 보는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붙여지는 사생활 침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공고에 이어지는 위 시의 아래쪽 내용을 보면 긴장했던 마을이 풀어지고 오히려 한껏 이완된 부드러운 자유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강사진의 이름도 신선하고 ‘결강’이라는 말도 반갑습니다.
강사진으로 소개된 모리스 라벨, 폴 세잔느, 에즈라 파운드, 이들은 모두 인간 영혼이 고처高處를 방문한 자이며 그 속에서 유영한 자들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근대의 기계적 세계관과 시간관의 산물인 학교라는 제도와 그 속의 강의시간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결강’으로 무력화 시킨 것은 그들답습니다. 영혼이 고처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을 기계로 보면서 만들어진 대중교육의 현장에서 목청을 높이고 그는 이공이 시간표대로 움직이겠습니까? 그리고 예술이 창조이 세계임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 공부를 단체로 시키겠다고 칠판에서 판서를 하겠습니다. 이런 말들이 ‘결강’의 행간에 들려오는 듯 합니다. 사실 적같이 어정쩡한 문학선생도 문학강의를 하면서 출석 부르는 일과 시험 감독하는 일은 정말 하기가 싫습니다. 자유롭개 마음을 풀고 시작해야 할 문학강의 시간에 출석을 부르며 점호하는 교관처럼 되는 일과, 시험 감독을 하며 팬옵티콘panoptixcon의 간수처럼 무서워지는 얼굴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직업을 버리는데는 용기가 필요하니, 이런 이들을 대강 수행하며 아무 탈 없는 듯 살아갑니다.
모리스 라벨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을 라벨이 <볼레로>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등을 들으며 그의 리듬에 매료되고, 그가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사실에도 호기심을 갖고 그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폴 세잔느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생트 빅트와르 산>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앙느 씨의 호수> 등을 떠올리고, “나는 사물과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에즈라 파운드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시 속에서 가장 빛나는 이미지를 하나만 만들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한 이미지즘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순정한 집념과 소망이 호소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얄팍하고 진부한 이미지를 남발하는 시인들을 생각하면 평생을 녹이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이미지의 ‘위대한’ 탄생을 꿈꾸는 것은 감동적이지요.
어쨌든 이런 예술가들을, 달리 말해 그들이 높은 영혼을 강사진으로 모신 시인학교이지만 위 시에 따르면 오늘은 그들 모두가 ‘결강’한 날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결강으로 교실에는 더욱 시적인 분위기가 창조됐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생이니 강의니 하는 말은 얼마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입니까. ‘나에겐 아무런 선생도 없다’, ‘나는 누구의 제자도 아니다’라고 만용(?)을 부릴 수 있을 때 진정한 창조적 예술행위가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위 시의 강사진들이 ‘결강’한 것은 상징적이고 의미심장합니다.
그런 결강에 학생들은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충격을 받거나 허탈해하지 않습니다. 시인학교의 어느 학생도 선생이 오고감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입니다. 선생도 창작과 예술 행위의 동료이자 동행자일 뿐, 그 이상의 어떤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난 밤에 시작된 그 선생들의 예술 창작이 절정에 이르고 있어서 오늘 강의 시간에 맞춰 나오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까지를 시인학교의 학생들은 눈치 챕니다.
위 시에는 학생으로 다섯 명의 시인의 등장합니다. 모두 우리 시사 속의 실제 시인들 이름이라 매우 재미있습니다. 김관식, 김소월, 김수영, 전봉래, 김종삼이 그들입니다.
명함에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찍어갖고 다닌 호탕한 김관식, 그는 37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간의 시 속에서 자연인과 성인에의 꿈을 지속적으로 펼친 시인입니다. 김소월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 터이고, 김수영에 대해서도 크게 말씀드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수영에 대해서만 약간의 설명을 더하면 그는 자유의 시인이라고 범칭될 만큼 무거운 시대적 억압과 일상 속의 미세한 억압 양쪽에 모두 ‘태클’을 건 시인입니다. 모두들 치역하게 자신의 영혼을 갈고 닦으며 그 무게와 색깔을 점검한 시인들이지요. 전봉래는 어떠한가요. 시인 폴 발레리를 좋아했다는 그는 6ㆍ25 피난 당시 부산의 스타다방에서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바흐이 음악을 들으며 자살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종삼은 앞에서 말나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위 시를 보면 두 명의 시인이 휴학계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김소월과 김수영, 이 두 시인 말입니다. 사실 선생이 결강하는 것이나 학생이 휴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요. 강의를 하건 결강을 하건 학교에 다니 건 휴학을 했건 그들은 공식적인 시간표와 상관없이 예술 창작에 골몰하는 예술가이니까요 그리고 결강을 하는 것도, 휴학계를 내는 것도 그렇게 하여 쉬는 시간을 갖는 것도 귀중한 시적 체험이지요. 문학을 하는 데는 이렇게 어떤 경험도 자 자원이 될 수 있기에 그것을 단선적인 세상의 기준표와는 다른 특명을 안고 있습니다.
결강, 휴학계,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간의 충격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 자유의 기운이 물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의 등하교와 출퇴근은 근대의 기계적 세계관과 시간관이 만들어낸 산물인지라 아직도 우리의 생체리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정직할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들의 적응력은 탁월하여 모두들 근대적 인간으로 성공하여 등하교를 하고, 출퇴근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강, 휴학계, 이런 말들이 부도덕하거나 불성실하게 들리지 않는 세계, 그런 시인학교의 교실에선 시인들끼리 재미난 일들을 하며 ‘자습’을 합니다. 실제로 공부도 삶도 스스로 하는 자습에 의하여 실력이 올라가지요. 스스로 습득하고 터득하는 일만큼 참다운 공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위 시를 보면 휴강시간에 김관식은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지참한 막걸리를 먹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변덕스럽고 속된 삶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쌍놈의 새끼들“이라는 칭호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그런 면이 들키지 않도록 위장하고 조심하며 살아갈 뿐이지요. 그러고 보면 위장은 곤충들이 기교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탁월한 재주에도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는 아예 막걸리를 지참하고 학교에 왔습니다. 불량한 학생이지만, 선생들이 결강을 하지 않았다면 그 막걸리는 분명 선생들이 먼저 탐내고 한 잔 따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런 교실은 청소 상태가 엉망이어서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는데 시인의 감성은 그 두터운 먼지에서 오히려 다정스러움을 느낍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읽어낸 것이지요. 청결과 질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 역시 훈육의 산물임을 생각하면 이런 낯설음의 진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하면 김종삼 시인과 전봉래 시인은 한 귀퉁이에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마십니다. 귀퉁이에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이라는 세 말이 다 내향성이 뉘양스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절제, 진지함, 사색, 성찰 등과 같은 의미를 환기시킵니다. 이런 느낌은 그들이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이어지며 더욱 깊어집니다.
이런 세계는 현실과 삶이 지닌 진부함과 혹독함에 밀려나 그 존재가 잊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잊히기 쉽다고 해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사라질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이자 문화적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위 시의 끝 부분을 봅시다. 학교의 건물이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멀고 낯선 중동의 이 지리적 명칭 앞에서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술의 보편성과 개방성을 생각하면 이런 당황스러움을 줄어들 것이고, 레바논이 은유이자 상징이라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런 마음은 가실 것입니다. 지도를 보면 지금의 레바논 안에 레바논 산맥이 있고,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레바논 골짜기는 향기 나는 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숲이자 골입니다. 그런 먼 곳에, 그런 아름다운 자연 속에, 그런 신화적 공간 속에 교사가 있다는 것은 시와 예술의 나라가 지향하는 무해한 자율성과 초월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시의 끝부분은 시인학교의 교사를 레바논 골짜기에 짓는다고 읽는 대신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 그것 자체가 시인학교의 교사라고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게 일을 때 영혼의 유목민들인 시인들과 에술가들에게 보다 거침없는 자유와 미학적인 울림이 살아 날 것 같습니다.
김종삼의 위 시에 근거해서 여태껏 이야기해 온 시인학교를 착실한 모범생에게 상을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제도권 내의 시각에서 보면 위태롭습니다. 그리고 불경스럽기까지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유미주의와 자유혼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쪽에서 본다면 그런 학교에 잠시라고 견학하듯 들러보고 싶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