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방송(路傍松)〉
김굉필(金宏弼)
한 늙은이 푸른 수염 길 티끌에 맡겨두고 / 一老蒼髯任路塵
고생하여 오가는 손 보내고 맞이했소 / 勞勞迎送往來賓
이해가 차가웁다 너와 심사 같게 하리 / 歲寒與汝同心事
지나치는 사람 중에 몇몇이나 보았더냐 / 經過人中見幾人
-속동문선 제10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길 곁의 소나무(路傍松)〉
한그루 늙은 소나무 흰 수염을 길 위의 티끌에 내어놓고서, 一路蒼髥任路塵
수고스럽고 수고스럽게 갔다왔다하는 손님들을 맞고 보내네. 勞勞迎送往來賓
날씨 추워지는데 그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歲寒與汝同心事
이 길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나 볼 수 있었을까? 經過人中見幾人
-필자의 졸역
[주석]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으로,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조선왕조 전기의 “다섯 유학자(오현)” 중의 한 분임. 평생 동안 《소학(小學)》을 애독하고 그 내용을 실천하기에 힘써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고 함.―《한백》4-600
*창염(蒼髥): 노송(老松)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북송 소식(蘇軾: 동파): 〈불일산 영장로의 절간(佛日山榮長老方丈)〉: “도연명 현령님은 여산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으나 오랫동안 성사되지 않았는데, 원공스님은 끝내 그 산을 나오지 않아서 오로지 이름을 남기셨다네. 산중에는 단지 푸른 수염 늙은 소나무 있어, 쓸쓸한 몇 리 길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낸다네.陶令思歸久未成, 逺公不出但聞名. 山中只有蒼髥叟, 數里蕭蕭管送迎.”
[해설]
이 시는 내용이 평이하고, 어려운 전고도 별로 없어 특별히 풀어 설명할 말이 없다. 다음에 이 분의 시 1수만 더 소개한다.
〈서회(書懷)〉
한가히 홀로 있어 오고 감이 끊이고는 / 處獨居閑絶往還
다만 밝은 달 불러 차고 외로움 비치었네 / 只呼明月照孤寒
그대는 아예 이 생애를 묻지 마오 / 煩君莫問生涯事
두어 이랑 연파에 몇 첩의 청산뿐이로다 / 數頃煙波數疊山
-속동문선 제10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회포를 적다書懷)〉
홀로 있고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교재를 끊고서 處獨居閑絶往還
오직 밝은 달을 불러서 내 외롭고 찬 것 보게 할뿐 只呼明月照孤寒
그대여! 번거롭게 내 생애의 일 묻지 말게나 煩君莫問生涯事
몇 이랑 안개 낀 땅, 몇 겹의 푸른 산을 좋아하고 있을 뿐이니…
數頃煙波數疊山
-졸역
이 글도 역시 별로 이해한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글자인 메 산자와 물결 파자를 따서 후손들이 파산재라는 정자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 정자의 기문에서 이 시의 내용을 풀어 설명하는 말이 보임으로 아래 인용하여 둔다. 번역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김홍영 선생이 한 것이다.
〈파산재 기〔波山齋記〕〉 조긍섭曺兢燮
김희택(金煕澤) 군이 가창(佳昌)의 정대(亭臺) 골짜기로 나를 방문하여 정중히 일어나 말하기를, “나의 선조 문경(文敬) 선생에게 응현(應賢)이라는 현손(玄孫)이 있습니다. 지금 그 후손들 가운데 접곡리(蝶谷里)에 사는 이들이 겨우 수십 집인데, 종족을 모으고 빈객을 접대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여러 부로(父老)들이 계획하여 사는 마을 곁에 한 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공되었으니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어 우리 후손들에게 은혜를 끼쳐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선생의 시에
홀로 한가히 지내며 왕래를 끊고 / 處獨居閒絶往還
다만 명월 불러 고적한 신세 비추게 할 뿐 / 只呼明月照孤寒
그대는 살아가는 일 묻지 마오 / 煩君莫問生涯事
몇 경의 물결과 몇 겹의 산 충분하네 / 數頃烟波數疊山
라는 말을 좋아했으니, 지금 ‘파산재(波山齋)’로 이름 짓기를 청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강호(江湖)와 임학(林壑)의 아취에 뜻을 둔 사람이 물은 넓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산은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반드시 만 경의 물결과 만 겹의 산을 얻은 뒤 그 뜻에 맞음을 스스로 장대하게 여겼다. 그런데 선생이 살아가는 일로 삼은 것은 반드시 몇 경과 몇 겹을 말하는가? 어찌 그리 규모가 작은가?”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선생의 규모가 큰 까닭이다. 오직 선생의 평일 뜻에서 보지 않을 것인가. 연세가 쉰이 되어도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지만, 세상에 스스로 규모가 크다고 여기는 사람이 마침내 선생에게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은 크면서도 스스로 작게 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크면서도 스스로 작게 여기는 이것이 실로 천하의 큰 것이 되는 바이다. 이 재사에 산과 물이 있는 것은 그것의 크고 작음을 또한 성급하게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략적으로 이름 지어 ‘파산(波山)’이라고 하였다. 대개 그 작은 것을 말하자면 한훤당(寒暄堂)이라는 선생의 호가 일찍이 작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 큰 것을 말하자면 선생의 도가 본디 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선생을 본받으려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법칙을 취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선생이 즐거움을 삼은 것은 홀로 한가히 지내는 것이었는데, 지금 종족과 빈객의 일이 있는 곳에서 이것으로 살아가는 일을 삼는다면, 또한 담박하여 즐거움이 드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이치는 하나일 뿐이다. 크고 작은 것이 이미 하나라면, 홀로 지내는 것과 무리로 지내는 것이 또한 하나 아님이 있겠는가. 나는 오직 담박함을 힘쓰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 글을 적어 그 뜻을 넓힌다.
-암서집 제21권 / 기(記)
[주-D001] 문경(文敬) 선생 :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1480년(성종11)에 사마시에 합격, 1494년(성종25)에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이 된 후 군자감 주부ㆍ감찰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에 무오사화로 인하여 희천(熙川)과 순천(順天)으로 유배되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관련 자료로는 《경현록(景賢錄)》이 있다.
[주-D002] 접곡리(蝶谷里) :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 있는 마을이다.[
주-D003] 경(頃) : 토지 면적의 단위 가운데 하나인데, 100묘(畝)가 1경(頃)이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김홍영 (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