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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4장 15-22절. 도망쳐야할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환난과 종말에 대한 예언을 섞어서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환난을 극심하게 만나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인류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그 순간 자체가 그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개인의 종말을 맞은 사람이 어떻게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불신자들 뿐 아니라 교회의 교인들이나 심지어 이단들까지도 앞으로 일어날 역사적인 종말론을 무척이나 강조합니다. 예전의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이단들은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에 대하여 믿을 수 없어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에 대하여서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이단들의 문제는 구원론과 종말론에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론과 종말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는 구원은 자기들 단체에 소가며 자기들의 교주의 말을 듣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교주의 말에 맹신을 합니다. 영원한 지옥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그들 교주가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고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이제까지 교회에서 들어왔던 것과는 뭔가가 다릅니다. 그리고 종말론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단체에 들어와야 종말의 환난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나 이단들은 예민한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에 대하여 손을 대서 자기들의 모임 가운데 144,000명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다가 더 교세가 커지면 슬쩍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단들 가운데 여호와 증인들이 그랬고 신천지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두 증인에 대한 가르침에 자기들의 교주를 슬쩍 끼워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 종말론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부분까지만 알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시작부분을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에서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여기서 예수님이 “그러므로”라고 하신 것은 지난 주에 들으신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며 세상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을 비롯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듣게 되는 상황에서 복음이 세상 끝에 전파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이스라엘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일입니까?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12장 11절을 보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거룩한 성전에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웁니다.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노하시게 만드는 우상을 성전 안에 세움으로써 멸망시키실 수 밖에 없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무조건 도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멸망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로마군대는 성전에 멸망할 우상을 세운 것이 아니라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렸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사건과는 다릅니다. 그헣기 때문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 것은 종말의 시작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종말의 마지막 때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게 되고 그 안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우상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살수 있는 길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력을 잃은 성전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성전을 짖밟아도 그들을 벌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날이 오면 성전으로 뛰어들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16-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얼마나 다급한 지 지체하는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살려면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그들을 공격하는 군대는 말처럼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비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고 자기들의 분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쏟게 될 것입니다. 그런 분노한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그들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피하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전에 서지 못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듣는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도망쳐야 합니다. 미적거리지 말고 신속히 도망쳐야 합니다.
살길은 오로지 도망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도망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임신을 했거나 아니면 막태어난 젖먹이 아이가 있을 경우입니다. 임신한 여인을 몸이 무거워 달릴 수가 없습니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도 역시 빨리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여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새로 시작한 사업이나, 어떤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게 되어 다 정리한 후 떠난다고 지체하다가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나라 6.25 이전에 사람들이 징조를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탈출할 때 그 어떤 소중한 것을 해결하고 정리하느라 지체하다가 때를 놓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이스라엘 땅에 또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또 하나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안식일에 적군이 쳐들어 올 경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 법 외에도 많은 안식일 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거나 아니면 안식일에 십리 이상의 거리를 걸으면 안된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법들은 종교적 열심이 극대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명을 죽이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중의 어떤 종교적 열심이 특출한 사람들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하여 도망도 안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도망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이지 하나님의 약속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들은 이스라엘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는다는 약점을 알고 안식일에 공격을 감행하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이 그들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방해인 겨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동에 제한이 있고 빨리도 못가고, 또 멀리도 못가기 때문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도망을 쳐서 간신히 살았다 할지라도 강한 추위 때문에 얼어죽을 수도 있습니다. 황급히 도망쳐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빈손으로 도망쳐서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강한 추위에 얼어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나 겨울에 환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전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도망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의 생명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 앞 일을 알수가 없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하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환난이 언제 올지 아는 사람이 없기에 환난의 때를 피하여 아기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환난이 올지 알수 없기에 아기를 나아 젖을 먹이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환난으로인해 아기를 안고 도망을 치지만 멸망시키는 자에 의해 따라잡혀 죽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날에는 복이고 기쁨이고 행복이었던 일들이 갑작스러운 환난의 날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환난이 얼마나 극심한 지 “큰 환난”이라고 하셨고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은 환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임할 환난을 통하여 종말의 끝에 일어날 환난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어느 시점에서도 역시 예수님이 오신 후에 들이닥칠 로마군의 악행보다, 종말의 끝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의 등장에 의한 악행이 훨씬 더 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의 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작은 나무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일어나는 죄악은 미움과 살인이 난무하고 무분별한 결혼이 일어나고 서로 죽이고 빼앗는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앞에 일어나는 악보다 뒤에 일어나는 악은 휠씬더 간교하고 치밀하며 잔인한 악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악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큰 죄들이 판치고 있습니까? 날마다 해괴한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잔인성이 적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표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괴롭힘과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차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그 잔인한 악을 당연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성도들을 향하신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그 큰 환난의 날을 감하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감한다는 것은 우선은 날짜를 줄인다는 의미도 있고 또 박해를 피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는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찌감치 순교를 당하는 사람은 뒤에 일어나는 극심한 환난을 피하여 천국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순교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수명을 채우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순교의 제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죽음이 비켜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받고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권능도 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에 의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능력을 행하는 사역을 행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요, 베드로의 친구인 요한은 100살이 넘어까지 살다가 밧모섬에서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를 보게 되는 은총을 얻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너무나 빨리 순교를 당하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역을 행하다가 순교를 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이 그를 비켜갔다가 후에 주님이 부르실 때가 되어 수명을 다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오랜 고통과 시련의 박해가 올 때 하나님은 그가 감당할 만큼의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난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워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평안하고 기쁘고 즐거운 영원한 나라로 불러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하신 자들을 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여러가지로 이 땅에서 살기가 너무나 힘이 드십니까? 하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그렇지만 피해야할 때는 피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힘든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택하신 여러분들을 위해 그 고난의 때를 감해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삼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임하셔서 아는 지혜와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영원토록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복이 온전히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