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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한남동의 銃聲(총성)
수사관의 선제 사격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터진 최초의 총성은 육군본부 상황일지에 「19시 38분 공관지역에서 총성 네 발」로 기록되었다. 1979년 12월12일 밤의 이 총성은 10월26일 밤7시40분의 총성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하였다. 鄭昇和총장 납치가 매끄럽게 이뤄져 총성이 없었다면, 또는 鄭총장이 처음부터 순순히 연행에 응해 총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날 밤의 병력출동과 유혈사태는 없었을 것이고, 역사의 진행방향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초 겨울밤 한남동의 밤하늘을 울린 이 총성은 한 정권의 잉태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 첫 총성은 12·12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全斗煥-盧泰愚장군 측에서는 「정총장 경비병이 먼저 수사관들에게 발포, 그 뒤의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은 사실과는 정반대였음이 객관적 정황으로 입증되고 있다. 鄭총장은, 공관 1층 응접실에서, 『녹음실로 가서 조사를 받으시라』고 말하는 許三守·우경윤(禹慶允) 두 대령에게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라고 소리쳤다. 그는 부관 이재천(李在千)소령을 불렀다.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대!』 그 순간 두 대령은 鄭총장을 양쪽에서 낀 채 끌고 가려고 했다. 鄭총장은 겨드랑이를 낀 한 대령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鄭총장의 고함소리에 놀란 총장 부인 신유경(申有慶)여사는 2층에서 뛰어내려왔다. 鄭총장이 두 대령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부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을 지나 부관방 쪽으로 뛰어가는데 총성이 울렸다. 申여사는 엉겁결에 사우나방 속으로 뛰어들어가 숨었다. 鄭총장은 『사격중지!』라고 외친 뒤 『그럼 가자』라면서 현관을 향해 스스로 걸어 나갔다. 이때 홀의 대형 유리창을 박차 깨고 한 사나이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鄭총장의 뺨을 후려치면서 『뭘 꾸물대!』라고 소리쳤다. 안경이 떨어졌다. 鄭총장은 안경을 다시 집어 올리고 끌려갔다. 申여사는 사우나방에서 2층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내려와 부관 방에 가 보았다.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흥건히 쏟아진 피 속에서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재천 소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기자 주:그는 복부에 한 방을 맞은 뒤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늘어 떨어져 덜렁덜렁 하고 있었습니다. 현관 쪽에는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열십자로 뻗어 있었습니다.』
부관실의 첫 총성, 그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金仁先·李在千, 그리고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 두 명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생존, 현역으로 근무하였다. 이 네 사람 이외에 공관관리 주임 반일부 준위가 중요한 목격자다. 반준위는 그날 저녁 부관실에 있었다.
許, 禹 대령과 함께 온 두 수사관이 부관실로 들어왔다. 총장 경호대장 金仁先대위가 들어오더니 두 수사관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두 수사관은 쭈빗쭈빗 하면서 나가더니 다시 들어왔다. 반 준위는 바깥이 추워서 그러는 줄 알고 『커피 들겠소?』라고 했다. 이때 李부관이 황급히 들어오더니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 준위는 당번병에게 커피를 시키려고 부엌으로 가다가 홀에서 나오는 당번병과 마주쳤다. 당번병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이때 부관실에서 총성이 울렸던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 두 사람이 전화를 돌리는 李소령과 金대위를 권총으로 쏜 것이었다. 金대위는 머리와 척추 근방에 네 발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지근거리에서 쏘았으므로 관통력이 약했던 것이다.
禹대령, 오인사격의 피해자
全斗煥측 주장대로 鄭총장 측에서 선제사격을 했더라면 두 보안사 수사관이 다쳤을 것이고 李부관과 金경호대장은 鄭총장을 끌고 가는 두 대령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뒤 끌려가는 鄭총장을 구출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禹慶允대령은 왜 하복부에 총을 맞고 현관 쪽에 쓰러져 있었던가. 禹대령은 1981년에 千金成씨에게는 『정총장 경비병한테서 피격 당했다』고 했으나 그 뒤 입을 닫았다. 禹대령은 합수본부 측 병력으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첫째, 李소령과 金대위가 무력화됨으로써 鄭총장 공관에서는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공관 초병들은 그 전에 이미 무장해제 돼 있었다.
둘째, 합수본부의 당시 수사책임자 李鶴捧씨에게 본 기자가 물었더니 『禹씨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禹씨의 하복부를 맞힌 총탄을 검사하면 누구 총에서 나온 것인지 간단히 알 수가 있다. 더구나 禹씨는 자신을 쏜 사람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쏜 사람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밝혔을 경우 全斗煥장군 측이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셋째, 金仁先·李在千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계속 현역에 복무하면서 승진도 정상적으로 하였다. 두 사람이 비열한 선제공격으로 그런 엄청난 사태를 야기시킨 장본인이라면 그럴 수가 있을까. 오히려 두 장교에게 선제공격을 가한 쪽의 미안감이 엿보이는 인사이다. 넷째, 鄭총장쪽에서 쏜 사람이 없었더라면 합수본부 측에서 쏘았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관 안팎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일부 수사관들은 공관 안에서, 33헌병대 병력은 건물 바깥에서 초긴장 상태 하에 있었다.
초긴장 하에서 彼我구별 안 돼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것과 거의 동시에 반일부 준위가 현관을 박차고 나가 (공관 외곽 경비를 맡은 해병대에 신고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 반 준위를 향해 현관 바깥에 있던 합수본부 측 수사요원이 M16을 쏘았다. 이와 거의 동시에 보안사 수사관이 M16으로 홀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鄭총장을 후려쳤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긴장상태 하에서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졌으므로 합수본부 측 요원들은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鄭총장을 끼고 있던 許三守대령도 유리창을 깨고 뛰어든 사람이 자신의 부하인데도 순간적으로 누구인지 모르고 당황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엉겁결에 쏜 총탄이 禹慶允대령의 하복부를 맞힌 것으로 보인다. 禹씨나 全斗煥장군측이 『우대령을 쏜 사람은 ○○○다』는 반증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오인사격에 의한 총상」이 정설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全장군측은 또 「鄭총장을 수경사 30경비단으로 모셔 용퇴를 건의하려고 했다」는 해명도 하고 있다. 이날 全장군이 李鶴捧 수사국장에게 내린 지시는 「서빙고 분실로 연행, 법적인 처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용퇴를 건의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보내고 대통령 결재를 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12월8일 盧泰愚 9사단장이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을 찾아왔다. 육군본부로 鄭총장을 찾아 인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張사령관은 『내 다음에는 盧장군이 수경사를 맡을 것 같으니 잘하시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날 조홍(趙洪) 수경사헌병단장이 오더니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도 말씀을 드려놓았는데, 張 사령관님과 함께 저녁을 모시겠습니다』고 했다.
張사령관은 자기 부하가 全본부장을 먼저 찾아간 것이 마음에 걸렸고, 준장 진급이 내정된 趙대령으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다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아 그 초대를 거절했다. 12월 10일 오후 합수본부 간부가 張사령관을 찾아왔다. 張사령관에게 그는 『전 본부장께서 모레 저녁에 계엄업무로 수고하시는 지휘관들을 모시려 합니다』고 했다. 『음식점 위치는 메모하여 사령관님 비서한테 맡겨 놓았다』고 했다. 간부는 또 全본부장이 보내는 봉투를 전달했는데 그 안에는 1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형님! 김장에 보태쓰십시오」란 글도 들어 있었다. 張사령관은 참모장에게 그 돈을 건네주어 연말 부대회식에 사용하도록 했다.
『앰뷸런스 - 앰블런스 -』
12월12일 禹國一참모장이 보안사로 출근하자마자 全본부장이 불렀다.
『저녁 약속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내가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그 시각에 각하께 중요결재를 받기로 시간이 잡혀졌으니 대신 가 주시오. 결재가 끝나면 곧 가겠소. 장소와 시간은 조홍이가 알고 있어요.』
점심 때 趙洪 대령이 찾아와 요정의 약도와 전화번호를 전해주었다. 정병주(鄭柄宙), 장태완(張泰玩), 김진기(金晋基), 우국일(禹國一), 조홍(趙洪) 등 다섯 사람은 연희동의 어느 요정에서 초대자인 全斗煥장군이 오기를 한 30분쯤 기다리다가 술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 시각이 저녁 7시30분쯤. 마담이 여자들을 데리고 와 앉혔다. 양주병을 따서 작은 잔으로 한 바퀴 돌리고 두 번째로 잔이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金晋基 헌병감을 찾는 무선 연락이 왔다. 金헌병감이 전화를 걸고 오더니 『총장공관에서 총성이 났답니다』고 했다.
張泰玩 사령관도 요정에서 바로 총장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는데 『앰뷸런스! 앰뷸런스!』라고 소리치고는 끊는 것이었다. 張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수경사 헌병단 申允熙 부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즉시 장갑차 한 대와 헌병 1개 소대를 끌고 가서 총장님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張사령관은 『나 먼저 갑니다』면서 요정을 나섰다. 사령부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옆에 탄 趙洪 헌병단장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혹시 집히는 게 없나? 간첩이 들어온 것은 아닐테고 혹시 진급에 불만을 가진 놈이 일을 저지른 것 아닌가.』
金晋基, 張泰玩 장군이 비상연락을 받고 차례로 나간 뒤 鄭柄宙장군과 남게 된 禹國一참모장은 보안사 당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당직사령은 정도영(鄭棹永) 보안처장이었다.
『공관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데 무슨 일인가.』
처장은 『아무 보고도 없는데요.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라고 했다. 10분쯤 더 기다리고 있다가 鄭병주 장군이 특전사로 전화를 걸고 오더니 두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禹참모장은 다시 鄭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鄭처장은 『아무 보고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가시겠다고 하였으면 가시지 않겠습니까. 더 기다려 보시지요』라고 했다. 禹참모장은 10분쯤 더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전화를 걸었다.
『내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 돌아가야 되겠다.』
『그러면 가시지요.』
참모장은 택시를 타고 보안사로 돌아왔다. 저녁 8시20분이었다.. 보안사는 이미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밤 禹참모장은 자기 방에 앉아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을 어깨 너머로 구경만 했다.
全斗煥 병력동원 계획 없었다.
총리공관에서 崔대통령에게 全斗煥본부장이 鄭총장 연행결재와 관련된 보고를 올리고 있는데 부속실에 있던 부관 孫杉秀중위가 전화를 받으니 許和平비서실장이었다. 『李鶴捧 중령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각하께 보고중입니다.』
『그래도 바꿔 줘.』
孫중위는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부속실 근무자에게 부탁하여 李중령을 불러냈고, 李중령이 전화를 받고 들어가더니 全본부장이 나왔다. 全본부장은 『이왕 일이 그렇게 됐으면…』이라고 하더니 다시 崔대통령 방으로 들어갔다. 李중령은 먼저 보안사로 떠났다. 李중령은 보안사에서 서빙고 수사분실로 전화를 걸어 거기로 연행돼 온 鄭昇和 총장에 대한 행동 지침을 시달했다. 李중령은 그날 밤을 서빙고분실에서 보냈다. 총장공관의 총성은 全斗煥 장군의 거사계획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全장군은 鄭총장 연행과 대통령의 연행재가를 동시에 성취하려고 하였다. 연행재가를 받아 총장연행을 합법화시킨 다음 연희동 요정으로 달려가 鄭柄宙, 張泰玩, 金晋基장군을 설득, 기정사실화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盧국방장관-尹誠敏 육군참모차장으로 이어지는 군의 지휘체계에 대해서는 군통수권자인 崔대통령의 재가를 들이밀면 될 일이었다.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단장 張世東대령)으로 초대해 둔 유학성(兪學聖) 국방차관보·黃永時 1군단장·車圭憲 수도군단장·盧泰愚 9사단장·朴俊炳 20사단장·白雲澤 방위사단장·朴熙道 공수1여단장·張基梧 공수5여단장·崔世昌 공수3여단장·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 등 10명의 수도권지휘관들과는 鄭총장 연행 이후의 조치를 의논할 예정이었다.
全장군은 병력동원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다. 군부 내의 충돌에 대비하려고 했더라면 경복궁의 10인은 자신의 부대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하자 그들은 부랴부랴 자신의 부대를 장악하려고 서둘렀다. 이날 밤 박준병(朴俊炳) 소장은 20사단의 지휘권을, 김진영(金振永) 대령은 33경비단의 지휘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박희도(朴熙道)·최세창(崔世昌)·장기오(張基梧) 세 공수여단장은 황급히 본대로 돌아가야 했다. 총장공단에서 총격이 일어나고 崔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불러 오라』면서 연행재가를 미루는 바람에 계획했던 「합법적 연행」은 「불법 납치」가 돼 버렸다.
이 불법성 때문에 육군본부는 全斗煥 장군 측을 반란군으로 몰면서 진압을 계획하게 되었다. 全장군이 조용한 연행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12·12사태는 流血충돌로 치달으면서 쿠데타의 1단계 조치, 도는 군사변란으로 그 의미가 증폭된다. 본의 아니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全장군 그룹은 12·12사태로 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