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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6-16 그대들도 알거니와
이제 야곱이 아내들에게 고향 가는 일을 설득하고, 또 아내들이 반응합니다.
1. 본문 6-12절은
⑥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⑦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⑧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⑨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⑩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⑪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⑫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입니다.
모세는 사실 전모를 상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1) 그러나 6절에서처럼 야곱은 자기 아내들에게 “그대들도 알거니와” 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았던 생활 전 과정을 말합니다.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많은 증거에 의해서 남편 야곱의 정직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또 한편 자기들의 아버지 라반의 학대와 기만 그리고 탐욕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2) 또 7절 내용과 같이 야곱은 자기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다고 불평합니다.
열 번이라는 수는 단지 많은 회수입니다. 라반은 육 년 동안 협정을 여러 번 어겼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간여하시고 개입하셨습니다. 7절에서 11절까지가 전부 그런 내용입니다.
3) 때마다 일마다 함께 해 주시고 라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극단을 금하시고 또 야곱으로 그것을 피하게 하시며 마치 라반이 가진 소유를 빼앗아 자기에게 안겨주신 것 같은 실예가 8-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체로 양은 일년에 봄가을 두 번에 걸쳐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번식 시기는 야곱이 라반을 위해 봉사한 그 햇수의 두 배에 해당할 것입니다.
4) 그런데 이 기사 다음 10절에서 11절 부분에는 꿈 이야기가 뒤따라 나옵니다.
이 꿈 이야기는 야곱이 하나님 명령 없이는 아무 일도 착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든 일들이 야곱의 잔꽤에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로 기록됩니다. 모세는 앞에서 단지 사건 자체만 언급할 뿐입니다. 야곱이 했던 행위에 근거가 되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모세는 그것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합니다. 모세는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속이려고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암시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참되고 가식 없이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야곱이 꿈꾸지 않고서 이런 말을 했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 됐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읽은 대로 하늘 문이 그에게로 열리던 꿈과 이것을 연결 지어서 생각할 때 그가 거짓을 말했다면 그것은 가공할 만한 불경건을 범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2. 본문 13절은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1) 성경 다른 곳에서와 같이 천사가 하나님 신분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산 거울처럼, 자신을 계시하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자기 지혜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기 말씀으로 또는 특별한 천사 형태로 나타나신 때문입니다. 아니면 일반적으로 천사들이 하나님 명령으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 선지자들은 이런 형식으로 주신 말씀에 익숙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존전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지고 계신 엄위로우심이 그 선지자들이 증거 하는 메시지 가운데서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우리는 이런 형식으로 표현된 의식과 말씀하신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어떤 한정된 장소에 국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본래는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렇게 자청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이 하신 약속을 자기 종 야곱에게 새롭게 기억시키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는 야곱이 아직 단순한 근본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참 교훈에 대한 계시가 매우 적었습니다. 그나마 교훈에 대한 계시 자체도 많은 그림자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거의 온 세계가 거짓 신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3) 그 지역에 사는 야곱의 장인집안 조차도 거룩하지 못한 미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방해물 중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대한 자기 신앙을 지키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
(1) 따라서 야곱에게는 첫째로 순수한 신앙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가 여러 가지 잘못가운데 있을지라도 야곱만은 그가 알던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예배를 끝까지 그대로 고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 둘째로 야곱이 전에 받았던 약속이 다시 새롭게 주어지면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항상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하신 언약,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고정시키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특별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상대로 세우신 언약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지시하십니다. 그곳은 그의 기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현세에서 주신 복 때문에 야곱의 마음이 메소보다미아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신 조처였습니다. 또 야곱은 얼마 안 가서 그런 복을 누릴 것이었습니다.
4) 이 같은 하나님 말씀은 전에 했던 말씀에 추가해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중에 내리신 은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첫 번째 의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야곱이 전에도 참 되신 하나님과 참 종교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설교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가장에게 잘 어울리는 태도였습니다. 야곱의 아내들이 이전에 이 놀라운 이상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했다면 그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고 말한 것도 이 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라반의 신과 자기가 섬기는 신을 공공연하게 구별하는 듯한 말투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내들과 친숙하게 대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화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진지한 경건을 소유하게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야곱의 잘못이 아닙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경건한 자들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염두에 두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버림을 받고 고립무원하게 보일 때조차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야곱이 추방당했을 때는 그가 하늘로부터 모든 도움을 박탈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늦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야곱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대하셨던 것과 똑같이 자기들을 향하고 계신다는 것을 심령으로 느껴야 합니다. 또 피부로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설령 악인이 어떤 면에서든지 신자들을 포악하게 압제하더라도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실 때까지 참고 견디어 내야 합니다.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택하신 백성들의 고난을 신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4-15절은
“⑭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⑮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롬8:28) 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과 레아는 그 아버지 라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대개 여성이 갖는 나약한 성품과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자기 남편이 소원하는 대로 기쁘게 그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들은 길도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그를 따라가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므로 설사 야곱이 아주 쓰라린 고통으로 상심할 만큼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이제는 지극히 만족할 만한 보상으로 원기를 되찾습니다. 그의 아내들이 아비 집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남편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만족할 만한 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당한 고생에 환멸을 느껴서 오히려 기를 쓰고 야곱이 도주하는 길에 동반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버지께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딸들도 가족 일원으로 존중되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와 같은 배척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지참금도 없이 치워버렸다 우리를 팔기조차 했다 또한 우리를 판매한 대금도 먹어 치워버리지 않았는가?”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돈(15절)이란 말을 판매가격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지참금은 커녕 자기들 남편이 착취당한 이윤조차 받지 못했다고 불평합니다.
탐욕스런 아버지는 부당하게도 그 이익조차 가로챘습니다. 그러므로 (감 ; 또한) 이란 단어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인 사이에서 충족을 도모한다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라반은 극히 점잖치 못한 거래에서 생겨난 이익도 삼켜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라반이 했던 행위가 치사하다는 사실은 세월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해 갔습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소용돌이 같았습니다. 하여튼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부인들이 그때 남편에게 전념하였고 전폭지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미련 없이 아버지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들에게 뻗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들은 야곱이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언약을 서슴치 않고 포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했던 대답 끝 부분에 보면, 그들이 자기 남편 소원에 따랐다기보다 하나님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렇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7. 본문 16절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입니다.
이 부분에서 라헬과 레아는 지금까지 야곱이 했던 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생하고 순전한 신앙 의식에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속되고 일상적인 태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단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하나님께서 자기 종을 불쌍히 여겨 독특한 은총으로 그를 존귀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설득력이 거의 없는 이유를 들어 자기들이 가져가고 있는 것은 마땅히 자기들에게 속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기업 중에 일부분은 자기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재물이 그 남편의 노력에 의해 정당하게 취득되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편취 당해서는 안되었고 합법적인 상속분을 박탈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또한 자기 자식들도 라반의 혈통을 물려 받았으므로 마찬가지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은 선하시지만 그것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그들의 심령에서부터 오염시켜 버리기 일 수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흐리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도 이상으로 방종에 빠져서 재물에 탐닉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런 수고로 인한 열매가 마치 자기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자랑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편이 했던 고생을 아주 하찮게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당하게 자기 권리를 박탈당할 때에 각자가 제 권리를 방어하거나 회복을 시도할 수 있도록 여기서 적절한 선례를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나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 그 순서나 그 형식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 정당한 순서와 체계를 따라야 합니다. 또한 형식은 하나님 이름을 앞세워서 우선시 하는 것 같으나 그 내용은 자기를 추겨 세우는 일도 부당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만큼 그 사람을 귀하게도 여겨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최우선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조직적이고 자세하며 부요한 성격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사는 삶은 엉성하지도 않고 대강 대강 줄잡아서 사는 삶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든지, 순종과 헌신의 열매를 말 할 때에는 좀 더 체계적이고 자세한 삶을 연계시켜야 합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