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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광주에서 한 현대사 이야기를 정리하다
북한 현대사
김대식이란 카이스트 교수가 [이상한 나라의 뇌 과학]이란 책을 썼는데, 읽어보니 참 유식한 사람이더군요. 우리나라의 사회정치적 현상을 뇌과학 이론으로 풀이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현생 인류가 더 큰 두뇌를 가지고 있고, 힘도 더 센 네안데르탈인과의 생존 경쟁에서 이긴 이유가 픽션, 즉 신화(神話)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화를 만들어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인 커다란 무리, 인간 집단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족의 조상에 대한 신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는 거대한 무리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대 국가의 건국 역사도 사실은 그 기능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와 신화는 얼마나 다른가?
예를 들면 미국 사람들은 미국 건국의 역사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미국 건국의 역사는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건국 신화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미국 사람은 미국의 역사를 공유하고, 미국인으로서 자부심이나 애국심을 공유하는 인간 집단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과 건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간에 흥행에 성공하여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본 영화 [암살]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과연 실제 사실과 얼마나 부합할까요? 몇 퍼센트쯤 사실일까요? 1~2%쯤이나 될까요?(웃음) 거의 허구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일대 활극을 벌여 통쾌하게 일본놈들과 친일파를 물리칩니다. 되도록 이런 자랑스런 역사를 갖고 싶고, 그런 장면만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심리입니다. 그 영화는 바로 그런 심리를 파고들어서 흥행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즐기기 위한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서 보지만, 역사를 이렇게까지 뻥튀기를 해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역사가 거의 영화 수준으로 과장이 되고 미화가 되어 있습니다. 아니 어른들이 보는 영화를 넘어서 거의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나 고대국가의 건국 신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과장되어 있고요, 또 일인의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북한 현대사는 완전 신화예요. 신화를, 이야기를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명백한 거짓말도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났다 하는 이야기 같은 경우는 허구이지만 버젓하게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을 즈음에는 그가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 근처에서는 계속 항일 빨치산들이 나무에다 김정일의 탄생을 축하하고, 또 그 애기가 장차 민족을 이끌 광명성 같은 지도자가 될 것을 암시하는 구호를 나무에 새긴 ‘구호나무’들이 발견(?) 되었습니다. 거기는 북한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입니다. “우리 수령님이 여기서 태어나셨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삼일운동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일으킨 것이고, 어머니 강반석은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 해적선인지 상선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제너럴셔먼호는 김일성의 할아버지가 지도하는 평양 사람들에 의해서 불태워졌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두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요. 그러니까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4대조부터 구국의 영웅이고,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서술하는 것과 꼭 같습니다. 그래야만 김일성 개인이 아니라 김일성의 혈통이 훌륭하고, 아들과 손자까지 3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근거가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북한이 자기 나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공식 북한 현대사는 어이가 없는 신화 또는 만화라서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고요, 아마 그 책들을 금지하지 않고, 또 그 내용을 전파하는 북한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우리 국민들이 다 듣고 볼 수 있게 허용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반공 교육’은 없을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점은, 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을 비판하느냐, 북한을 되도록이면 이해해주려고 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진다는 매우 특수한 상황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 사람은 곧장 보수로 분류됩니다. 이런 현상은 참 독특한 한국적 현상입니다. [크로싱]이라는 영화를 영화배우 차인표 씨가 직접 주연을 맡아서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 한 번 보십시오. 잘 만들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보수 인사로 분류됩니다. 사실 부인 신애라와 차인표는 연예인 가운데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고아를 둘인가를 입양하여 찬사를 받는 크리스챤이죠. 그런데 그를 보수 인사라고 하면 아마 그는 조금 억울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그저 양심에 따라 북한인권 문제, 탈북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뿐이고 특별히 정치적인 배경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보수로 분류되고, 실제로 보수 진영 사람들과 만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하면서 점점 진짜로 보수 진영 사람이 되어 갑니다.
탈북자가 목숨을 걸고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나가면 공안에 쫓기는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쫓기는 신세다 보니 온갖 불리한 조건에서도 사실상 인신매매가 되어 젊은 여성들은 중국인 노총각과 억지 결혼을 하기도 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 지냅니다. 그런 사람들을 남한으로 보내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돈을 벌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브로커’라고 부르기도 하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와주려고 활동하는 분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둘 다 인 경우가 많겠지요, 여하튼 그런 분들의 안내로 몽골 국경이나 베트남 또는 라오스 국경을 넘어가서 그 나라의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면 일단 남한으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 남한에는 탈북자가 3만 명쯤 들어와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숫자이고, 남한에서 돈을 벌어서 북한을 드나드는 브로커들의 도움으로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고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들어옴으로써 북한 내부 사정은 거의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 그들 가운데 장차 통일에서 큰 역할을 할 인재들이 나오리라 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진보, 노동, 야당에서는 북한에 대해서 애써 모른 척하고, 북한인권 문제에 무관심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니 국민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오랜 진보의 습관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오직 저의 양심에 따라 북한과 북한 현대사에 대하여 오늘 말하려고 합니다.
김일성 우상화는 언제 시작되었나?
김정은의 공식 직책은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입니다. 아버지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입니다. 김정일은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국가주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는 영원히 아버지 김일성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김일성 주석은 여전히 살아 있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귀신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 유전자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른바 백두혈통 DNA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가 중국이 지지하는 고모부 장성택을 단칼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도 결국 장성택에게는 김일성의 DNA가 없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숭배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까 결국 김일성 자손 중에서 지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마침내 왕조가 되어 단군 조선, 이성계 조선에 이어 김일성 조선이 만들어진 것이죠.
김일성 주석은 1946년 2월에 권좌에 오릅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48년 동안, 1946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을 통치하였습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경우에 아마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 동안 재위한 영조만이 유일하게 이보다 오래 집권한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승만이 46년 6월에 정읍 발언을 해서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남북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한 내부에서 너무 빨리 이런 이야기를 한 죄밖에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신속하고 또 철저하게 진행되어 남한의 지지부진하고 또 대상도 농지에 한정된 농지개혁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물론 최근에 와서 연구를 더 깊이해보니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이 국가에 세금으로 소출의 40%를 냈다고 하니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지주가 개인에서 국가로 바뀐 정도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는 집단농장화를 하여 개인 농민들 입장에서는 다시 토지를 빼앗긴 셈이라 남한과 비교를 할 대상이 아닌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1946년 당시에는 북한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이루어진 토지개혁, 친일파 숙청 등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충격적인 소식은 이를 두고 찬반의 입장으로 남한 사회를 양분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또 북한의 토지개혁과 ‘민주혁명’의 여파로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100만 명이 월남했습니다. 기독교 세력, 조만식의 조선민주당계, 지주들이 죄다 월남해버렸기 때문에 토지개혁이나 이른바 민주혁명에 대한 저항도 별로 없었습니다. 남한이라는 도피처가 있으니 서로 편했는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남한에는 거대한 반공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서울의 광장시장,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는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악착같은 근성으로 상권을 장악합니다. 해방 전부터 이미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이북 출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김일성의 유일 지도 체제가 1950년대 중반 이후나 이루어지고, 연안파가 숙청된 후에나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1946년 7월에 이미 평양에 김일성종합대학이 만들어집니다. 해방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나이 35세 청년의 이름을 딴 국립대학교라니, 그건 무엇을 말합니까? 김일성은 이미 조선의 스탈린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사진을 보면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고 정치집회를 합니다. 박헌영 선생이 띠동갑이나 되는, 12살 어린 젊은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한데요, 그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서 월북할 때는 진퇴양난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북한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바로 김일성을 조선의 스탈린으로 세운 소련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너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세계 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의 권위는 지금 우리가 보는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의 권위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현실적인, 물리적인 힘, 즉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힘도 가지고 있었으니 교황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은 그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계의 공산주의자는 스탈린 대원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명예로 알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길고 긴 동부전선에서 죽어간 수백만 소련 병사들이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고 죽어갔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해방 전에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을 본 후에 조선공작단을 만들고 그 단장에 김일성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은 1941년부터 관동군에 저항하는 게릴라 투쟁을 멈추고 소련령으로 들어가서 1945년까지 4년 동안 휴식을 취한 것을 알려져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근처 연해주에서 여단장 중국인 주보중을 비롯하여 최용건, 김일성, 김책 등 조선인들도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모처럼 쉬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총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일본과는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해주는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소련은 일본의 항복이 다가오자 거기서 조선인들을 선발하여 조선공작단을 만듭니다. 와다 하루키 같은 학자는 140여명의 명단을, 조선공작단의 명단을 작성하였지만 대체로 150명 정도로 봅니다. 그 조선공작단의 단장이 김일성이었습니다.
12살 많은 띠동갑 최용건도 역전의 노장이었지만, 소련은 젊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팀은 정권을 잡고 권력을 휘둘러본 경험이 많은 소련이 밀어주고 지도를 하니 한 사람을 영웅으로 부각시켜 스타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는 대중정치의 시스템을 잘 알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팀들은 오랜 투쟁을 통해서 겨우 하나의 팀을 만들 수 있었고, 국내에는 박헌영을 지도자로 하는 경성 콤그룹이 겨우 하나의 팀을 만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국내파는 고질적인 분파투쟁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고, 응집력 강한 집단으로 똘똘 뭉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연안파(조선독립동맹)는 스타로 내세울 수 있는 무정이 있었지만 그를 중심으로 하나의 팀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무정은 군인으로서는 능력이 있지만 정치가로서는 재능이 좀 떨어지는 인물인 듯합니다.
김일성과 조만식
주사파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김영환이 반(半)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올라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보니 너무 무식하더라, 주체철학에 대해서도 잘 모르더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김일성은 길림의 육문중학교를 중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북항일연군 게릴라 부대 내에서는 그래도 유식한 편이었습니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일자무식이었습니다. 문맹률이 80%가 넘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봅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24살에 벌써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에서 중대장급 지휘관, 사장(師長)이 됩니다. 사실 항일 빨치산에서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체력을 가진 청년이 유리하기도 합니다.
김일성이 유명해진 것은 보천보 전투입니다. 사실 그리 규모가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압록강을 건너서 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몇 사람을 죽인 사건인데요, 동아일보에서 이를 크게 보도하여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 등의 청산리 전투 후 오랜만에 크게 보도된 사건입니다. 사실 조국광복회 등 국내 지하조직과 연계해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었고, 1937년 이 시기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매우 힘들 때입니다. 일제의 탄압에 항일운동이 거의 맥을 끊어질 듯한 이런 시기에 그런 사건이 일어나니 동아일보에서 일부러 크게 보도한 것이죠. 그 이후에도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은 나름대로 꾸준히 게릴라 투쟁을 지속하여 관동군을 괴롭히지만 일본군의 대토벌에 큰 타격을 받고, 결국 일본과 소련이 서로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더라도 중립을 지킨다는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소련의 지시에 따라 1940년에는 소만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철수합니다.
거기서 최용건은 중국 여자와 결혼하고, 김일성도 김정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이 태어납니다. 거기서 머무는 5년 동안이 김일성의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이면서 행운의 시기였습니다. 소련의 점지를 받은 것은 결국 5년 동안 소련 내에서 생활하고 소련공산당의 정치를 보고 배우고, 거기서 얻은 소련 사람들의 신임이 가장 큰 밑천이었습니다. 그리고 150명쯤으로 이루어진 강력한 하나의 팀의 대표주자가 되는 거니까요. 정치에서는 팀이 이루어져야 힘을 씁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하나의 팀이 신뢰관계로 뭉쳐서 역할을 분담하여 움직여야만 정치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김일성 팀은 게릴라 투쟁으로 뭉친 강력한 팀일 뿐만 아니라 소련이 밀어주어서 성공할 비전이 확실한 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잘 뭉치고, 또 더 가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연안파는 한글학자이기도 한 노(老)독립투사 김두봉, ‘여장군’ 김명시, 경성콤그룹의 투사 김형선의 누이죠, 최창익, 박일우 등 경력도 더 화려한 유명한 인물도 많고, 숫자도 더 많았지만 몇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국내로 들어온 것이 늦었습니다. 이미 판이 짜여진 후라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대중적 스타로 부각시킬만한 항일영웅으로 무정(1905년생, 성을 붙여서 김무정(金武亭)이라고도 하죠)이 있었지만, 그는 최창익(1896년생), 박일우(1903년생) 같은 선배와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무정은 대장정에 참가한 20명의 조선인 가운데 당시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고, 팔로군에서도 유명한 포병 지휘관이었으며 주덕이나 팽덕회를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아직 소련 공산당에 대항하여 친중정권을 북조선에 세울 생각을 할 여유가 없고 힘도 없었습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중국에서 최종 승자가 공산당이 되리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조차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소련이 김일성을 점지하여 민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바로 그를 조선의 스탈린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각 나라에는 소련과 마찬가지로 스탈린과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처음 북한에 들어 왔을 때 김일성 우상화에 가장 앞장선 사람들이 소련파였어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권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김창만 북조선공산당의 선전부장과 소련파 박창옥이 앞장서서 추진합니다. 소설가 한설야가 소설 [영웅 김일성 장군]을 씁니다. 시인 조기천이 대서사시 [백두산]을 씁니다. 당연히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학작품들이죠. 그런 소설과 시가 이미 1946년도에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김일성 우상화 문학은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 직후에 바로 쏟아져 나옵니다. 시인, 소설가 중에도 시류를 잘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46년부터 이미 김일성을 ‘위대한 영도자’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으로 추대된 것이 1946년 2월 8일이니 1945년 9월 19일에 원산항으로 조선공작단이 들어온 지 불과 5개월도 되기 전입니다. 소련군정이 밀어주니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됩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 권좌에서 내려온 일이 없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생입니다. 김일성의 선대는 지주 집안의 묘지기였다고 합니다. 양반 귀족이 아니었으니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버지는 김형직인데, 평양의 유명한 기독교 학교, 미션스쿨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강반석입니다. 강반석의 반석(盤石)은 베드로의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친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스탈린이 신학대학 출신인 것만큼이나 말입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드는데 이는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과 그 지도자 박헌영을 인정한다는 뜻이었습니다. 1945년 10월 13일이니 귀국한 지 한 달도 되기 전입니다. 하지만 권력 장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최용건이 조만식 선생의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기 위해서 일부러 입당하여 조선민주당의 당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북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공산주의운동보다는 기독교가 더 세고, 우익의 힘이 더 강했습니다. 조선민주당의 당원은 30만 명을 헤아리고, 조만식 선생의 영향력은 소련 군정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또 소련군정은 처음에는 민족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우파와 연합정권을 세우려는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12월에 불어닥친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정국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조선민주당은 반탁운동에 나서고 소련군정은 더 이상 조만식 선생을 참지 못하고 감금합니다. 그리고는 공작을 해서 조만식을 조선민주당에서 축출하고 대신에 조만식이 오산학교 교장을 하실 때 사랑한 제자였던 최용건이 조선민주당으로 입당하여 조선민주당의 당수가 됩니다. 1955년까지 조선민주당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최용건도 정치적 필요로 그렇게 했겠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김소월의 시를 감상하고 넘어가시죠. 조만식이란 분의 인품을 아득하게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J M S김소월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제이 엠 에스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재조 있던 나를 사랑하셨다.오산(五山) 계시던 제이 엠 에스십년 봄 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근년 처음 꿈 없이 자고 일어나며.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타듯 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그러나, 아아 술과 계집과 이욕(利慾)에 헝클어져십오년에 허주한 나를웬일로 그 당신님맘 속으로 찾으시오? 오늘 아침.아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기억하되 항상 내 가슴속에 숨어 있어,미쳐 거츠르는 내 양심을 잠 재우리,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날 때까지.
그리고 1946년 8월 28일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연안파의 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만들게 됩니다. 사진을 보십시오. 소련군정의 군정장관 스치코프, 김두봉, 김일성, 여맹위원장 박정애 이렇게 앉은 것 같습니다. 김두봉이 위원장이고 허가이와 김일성이 부위원장인데,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 그림을 뒤에 붙여놓고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위원장으로 선출된 환갑에 가까운 김두봉 선생(1889년생)은 대회장에서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습니다. 마침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하자 김일성은 내각 수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949년 6월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을 때 김일성이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됩니다. 박헌영과 허가이가 나란히 부위원장이 되고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긴박한 정세 속에서 내각 수상인 김일성이나 내각 부수상이자 외상으로 일하는 박헌영은 정부 일에 전념하고, 당 조직은 허가이가 주로 전담을 합니다.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의 숙청
여기서 잠깐 김두봉 선생 이야기를 하면 그는 주시경의 제자로 유명한 한글학자이기도 합니다. 3·1 운동 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김구와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달리하여 연안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을 만들고 주석이 됩니다. 조선독립동맹은 국내의 건국동맹(여운형)과 정신적 흐름을 같이하는 중도좌파적 흐름이고, 정통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모택동이 제창한 신민주주의에 공감하는 흐름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귀국하여 만든 조선신민당이라는 당 이름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서 남북협상을 위하여 평양으로 갔을 때 4김회담을 하는데 이때 4김이란 김두봉, 김일성, 김구, 김규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평양을 수도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역할을 한 사람을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허가이 네 사람으로 꼽을 수도 있는데요, 이는 만주파, 연안파, 국내파, 소련파 네 팀을 각각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조만식은 국내 우파의 대표이지만 일찍이 배제되었고요.
허가이(1904년생)는 소련파입니다. 그는 연해주에 이주해서 농사짓고 살던 고려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마 스탈린이 1937년경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킬 때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 같습니다. 그는 북조선로동당이 만들어질 때만하더라도 소련파를 대표하여 김일성과 나란히 부위원장이 됩니다. 그는 귀국하기 전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등에서 지방당 간부 생활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시절부터 당 조직부장을 맡아서 ‘당 박사’로 불리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당 조직을 전담합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중엔 1951년부터 김일성과 갈등을 일으켜 당권을 잃게 됩니다. 그는 아마 소련공산당 시절에 보고 배운 당 조직의 원칙을 조선에서 곧이곧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김일성은 같은 소련파인 박창옥을 내세워서 그를 공개 비판하고, 처음에는 농업 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되고 계속 권력에서 멀어지다가 1953년 7월에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전쟁 중에 만주 하얼빈으로 피난을 보냈던 그의 아들은 지금 러시아에 살아있는데, 1995년경 한국에 들어와서 자기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보낸 자객에 의해 타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북한 당국의 발표가 “허가이는 자살했다”라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1953년에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미 통일전쟁, 남조선해방전쟁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데 대한 책임을 남로당계에 묻기 시작합니다. 이주하와 김삼룡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피난을 가면서 두 사람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데리고 나와서 사살하고 갑니다. 그리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 감옥에 갇혀 있던 이관술은 함께 있던 수백 명과 함께 무더기로 학살됩니다. 이현상 선생은 잘 알다시피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장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북한으로 넘어가서 조선로동당에 참여한 분들입니다. 1953년 초 아직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 남로당계 12명을 반혁명·반국가 간첩죄로 체포합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한 것입니다. 박헌영 선생도 1955년 12월에 동갑의 최용건이 재판장을 맡은 공판에서 미국의 간첩 행위, 남한 내 민주세력 파괴 행위, 북한 정권 전복 음모 등 세 가지 조작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56년 여름에 소련 공산당이 박헌영 재판에 대하여 김일성 북한 지도부에 유감의 뜻을 전달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에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남로당계의 숙청은 전쟁을 일으킨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지우면서 연안파의 무정이나 소련파의 허가이에 이어 박헌영까지 제거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에 대한 잠재적 도전 세력은 거의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1956년 2월에는 큰 변화가 오게 됩니다.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스탈린은 이미 195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스탈린의 여러 가지 악행이 폭로되자 세계 여러 나라의 작은 스탈린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헝가리에서는 1956년 10월에 소련으로부터 벗어나서 서방식 민주화를 하고자 하는 헝가리 사태가 일어나서 결국 소련이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2,500명의 헝가리 시민들이 죽기도 합니다. 사실 스탈린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습니다. 스탈린이 숙청하여 죽인 사람의 숫자는 몇 백만인지 모릅니다. 그는 혁명이 성공하기 전에는 정말 강인한 투사였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혁명 후에 정권을 잡자 동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레닌은 스탈린의 이런 잔인한 성격을 알고 그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지 않으려고 말년에 노력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은 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당의 모든 의견들이 다 드러나고 토론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가장 중간의,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자기도 찬성합니다. 그래서 당원들이 지도자들 가운데 스탈린을 가장 합리적이고 무난한 사람, 가장 사고치지 않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의견이 아니라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책에서는 정적(政敵)을 죽여 놓고 태연하게 정적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도 합니다. 트로츠키를 죽여 놓고 트로츠키가 주장한 정책을 실천하고 부하린을 죽여 놓고 부하린이 주장한 정책을 실천합니다. 트로츠키야 너무 잘난 척하고 레닌 다음으로 혁명에 공이 많다고 자부하여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니 숙청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부하린은 그야말로 동지들 중에서 가장 막내이고 고분고분하고 똑똑한 후배였는데, 결코 살려두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덩샤오핑을 살려두었던 마오쩌둥과는 비교가 되지요. 마오쩌둥은 심지어 자기가 죽고 나면 4인방이 아니라 덩샤오핑을 비롯한 우파가 정권을 잡을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을 하방을 보내 고생시키기는 하면서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복귀한 덩샤오핑이 혁명 1세대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전환, 마오쩌둥의 노선을 뒤집는 결단을 합니다. 그러면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숱한 사람들이 죽고, 많은 지식인들은 고초를 겪었는데도 마오쩌둥에 대하여 공칠과삼론(功七過三論)으로 퉁치고 넘어갑니다. 중국인들의 이런 면모는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여하튼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니 졸지에 전 세계의 공산주의운동 진영의 분위기가 바뀐 거야, 소련에서 개인숭배 비판하니 우리도 해야 하지 않나하는 분위기가 일어납니다. 아무래도 소련파들이 영향을 크게 받고 동요를 합니다. 연안파도 동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8월 종파사건’입니다. 1956년 8월 30일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불평하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막상 회의에서 나서서 호응하는 사람이 너무 적었습니다. 모두들 무서워서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김일성 충성파들이 들고 일어나 회의는 아수라장이 되고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이 출당되거나 당직이나 정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은 중국으로 도망갔습니다.
1956년 10월에는 헝가리 사태가 일어나고 1957년 중소분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58년 3월 전원회의에서는 다시 수 백 명의 연안파, 소련파, 화요파, ML파 등 일제하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모든 분파 출신들이 숙청됩니다. 이로서 마음속으로 김일성 독재에 대하여 불평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제거되고 이론상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진작에 소련에서부터 일당독재로 변질했지만. 북한에서 일당 독재는 다시 김일성 개인 독재로 변질되었습니다. 보통 대중정치의 필요에 의해 스타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내부의 의사결정은 정치국 회의, 중앙위원회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집단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그나마 여러 나라 공산당의 관습인데, 북한에서 그런 당 기관들은 김일성 개인의 권위 밑에 있게 됩니다.
주체사상은 종교, 북한은 신정체제인가?
그리고 중소분쟁 와중에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니 그 틈바구니에서 중립을 지키고, 그 틈을 타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안 받겠다고 작정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체사상을 내세웁니다. 저는 70년대에 북한에서 송출하는 대남방송을 호기심에서 듣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대남방송을 듣다가 들키면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지된 책들도 어렵게 구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체사상의 내용 중에는 모택동 사상을 그대로 베낀 것이 많았습니다. 동아시아의 상태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관점이나 그 사회에서 어떤 혁명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특별히 모택동 사상과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모택동 전집을 제가 다 읽어보았는데요, 주체사상의 주요 내용은 거의 거기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특별히 달라 보이는 점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아직도 황장엽 선생 등이 말하는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관념적 인간론 이외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체사상은 일종의 종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신도의 수로 보면 세계 종교 가운데 10위권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북한은 정교분리가 되지 않은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어버이 수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대체하였습니다. 일당 독재는 원래 공산당이 집권한 나라에서는 대다수 나라에서 다 한 거지만 1인 독재왕조의 창설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고, 더욱이 왕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김일성을 창시자이자 신(神)으로 하는 종교가 만들어진 점에서 매우 독특한 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정치학자 전인권이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일컬어서 ‘진리의 나라’라고 불렀지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북한은 더 격렬한 ‘진리의 나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체제는 너무 단단하고 유연성이 없어서 스스로 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평가의 말들이 있지만, 워낙에 상대가 북한체제라는 너무나 독특한 체제이기 때문에 외국 이론이나 합리적인 추론과 기대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찬바람이든, 따뜻한 햇볕이든 외투를 벗기게 할 수는 있지만, 결국 최종적 순간에 외투를 벗는 것은 그 외투를 입고 있는 자기 자신인데, 불행하게도 외투가 딱딱한 철제외투라면 벗고 싶어도 벗을 수가 없는 거죠.
세계 사람들이 비웃고 희롱하는, 코미디의 소재로 삼는 북한이 같은 동포이고, 바로 서울에서 수십 킬로미터만 북으로 자동차를 타고 가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항상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납치되어 북한에 몇 년 가 있었잖아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갔어요. 처음에는 강제로 납치되고, 나중에 간 신상옥 감독은 부부 간이니까 자의반 타의반으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하여 미국에서 살다가 지금 신상옥 감독은 죽었지만 최은희 씨는 아직도 살아 있거든요. 최은희 씨가 본 김정일은 스스로도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왜 자기가 가야만 움직이는지, 자기가 지시해야만 무언가를 만드는 지, 사람들이 왜 알아서 창작하고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결정해주어야 무언가를 합니다. 그것은 주체사상이 말하는 인간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은 지독한 모순입니다. 사람들은 수동적입니다. 수령님은 공화국의 뇌수입니다. 인민은 손발입니다. 그러니 뇌수가 편단하고 결정해주어야 손발이 움직입니다.
현지 지도라는 것을 다닙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공장, 그 농장은 며칠 잘 돌아갑니다. 역시 수령님의 영명(英明)하신 지도력이 대단합니다. 일일이 깨알같이 지시를 하고 간부들은 받아 적습니다. 그런데 수령님이 현지 지도를 나갈 공장으로 인근에서 원자재와 전력이 집중 공급됩니다. 그러니 얼마간 돌아가는 거죠. 모든 것은 수령님의 영명하신 지도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북한 전역에 흩어져 있는 김일성 3대의 동상이 수 만 개 된다는 데요, 통일이 되면 전부 철거하여 녹이면 상당한 동과 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묘향산, 금강산, 칠보산 등 큰 바위에 새긴 김일성 3대를 찬양하는 글자들은 일일이 다 지워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의문입니다. 북한은 왜 중국의 개혁개방이나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을 따라하지 않았을까?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가 햇볕정책의 전제입니다. “북한을 도와주자, 그러면 틀림없이 개혁개방으로 갈 것이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전제로부터 출발했지만 북한은 거꾸로 갔습니다. 기대했던 개혁개방은 안 하고 핵무기를 만들어버리니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북한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단어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란 원래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만주에서 1938년 말부터 1939년 봄까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하여 100일 동안 행군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의 정신을 되살려서 배급제가 무너진 식량난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자는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난과 대규모 아사는 흔히 1995년과 1996년 대홍수, 1998년 가뭄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인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에 의하면 아무리 큰 가뭄이나 홍수가 나도 다수가 아사(餓死)하는 경우는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없다고 합니다. 실상이 바로바로 국제 사회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긴급구호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북한의 경우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구호는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아사자의 숫자는 30만에서부터 300만까지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당시에 성장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남한사람보다 키가 머리 하나 만큼 작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을 굶겨 죽인 정치가가 무슨 핑계로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낯짝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북한은 큰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 해가 아니라도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깊이, 만약 사회주의자라면 더 깊이, 고뇌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의 인간관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핵심은 바로 집단농장 해체였습니다.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이 굶어죽는 참상을 목도한 덩샤오핑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아야 한다는 ‘흑묘백묘론’을 제기합니다. 그의 흑묘백묘론은 책상에 앉아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집단농장 해체는 그의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사실 그 넓은 우크라이나의 흑토대와 러시아의 끝없는 대지를 가진 소련이 1917년 혁명이후 1992년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한 해도 식량을 자급한 적이 없습니다. 북한도 집단농장을 해체하면 농업생산량이 두 배는 늘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 왕조의 기초가 흔들릴 것이 두려워하여 집단농장을 해체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다섯 농가씩 묶어서 하나의 경영 단위를 만들어서 집단농장을 나누어 주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더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 북한은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대신에 야산의 높은 지대까지 다락밭을 개간하고, 또 나무를 취사와 난방을 위한 땔감으로 죄다 베어버려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산은 물을 저장하지 못하고 가뭄과 홍수에 더욱 취약해졌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는 남한보다 북한의 국력이 우세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합니다. 일단은 일본제국주의가 남겨놓은 유산이 달랐습니다. 해방 당시로 돌아가 보면 북한과 남만주가 일본 본토에 이어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의 패권을 다투려고 할 때 일본 본토의 자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수풍수력발전소와 푸순탄전을 개발하여 장춘, 선양 등에 공장을 돌리고, 개마고원에서 물을 동해로 떨어트리는 장진강, 부전강 발전소의 전력으로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돌리고, 무산 철광산을 개발하여 청진제철소를 가동시켰습니다. 원산과 성진, 나진에도 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자연히 함경도 지방에는 일본인들 기술자도 많이 들어오고, 조선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의 아버지, 딸을 찾으러 돌아가서 헤어져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아버지는 흥남 비료공장의 간부로 나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반에 남북한의 국력은 역전된 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차이가 벌어져왔습니다. 지금은 30:1, 또는 40:1이라는 비교 수치들이 있지만 10:1을 넘어서고부터는 체제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북한 경제는 기묘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급이나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 출근했다 도장 찍고서는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북한에는 장마당이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흡사 우리가 조선시대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고 장시(場市)가 발전하였다는 현상을 보았던 바로 그런 현상을 북한에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북한에서도 자본주의의 맹아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제비’라는 말은 들어보셨습니까? 부모가 죽고 고아가 되어 장마당에서 구걸해서 사는 거지아이들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면서 온정은 사라지고 인심은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는 생지옥 속에서 사람들은 눈치백단이 되고 각자도생하게 된 듯합니다. 당을 믿기보다는 돈을 믿게 되었고요. 또 뇌물이, 특히 달러가 정말 잘 통하는 사회가 된 듯합니다. 돈만 있으면 사람을 빼내 올 수 있습니다. 브로커들이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들어가서 탈북자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냅니다. 중국인 브로커에게 돈을 송금하면 이들이 북한 내 화교에게 연락해 현지에서 수수료를 뗀 액수를 곧바로 북한 가족에게 내준다고 합니다. 수수료는 많게는 30%나 떼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북한 내 화교는 돈을 보낸 남한의 탈북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북한의 가족에게 바꾸어줍니다. 그래야 돈이 전달되었는지 확인이 되니까요. 그래서 이젠 오히려 탈북자 가족이 이웃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답니다. 외국돈이 들어오니까요.
이 정도면 기강이 무너진 것 아니냐, 그런데 왜 민주화운동은 일어나지 않는 건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조그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 하급 당 간부, 반장 비슷한 권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조그만 권력을 향유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북한에서는 조금만 반체제 언동을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삼족(三族)을 멸해버리니까, 집단적이거나 조직적인 민주화운동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는 것입니다. 사실 저가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다지만, 당시의 탄압이란 것은 청년들 간덩이를 키워주기 적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서울의 봄’이란 특수한 때이기는 했지만, 부마항쟁 후에 출소해보니 저는 작은 영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맛이 있어야 청년들이 민주화운동을 하게 되는데, 북한은 너무 가혹한 탄압을 하니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웃음)
북한에 대해서 관찰하면서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왜 무너지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직 명쾌한 설명이 없습니다. 항상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과 북한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맞서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맞았습니다. 실제로 무너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무너지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북한의 지배층이 워낙 잘 단결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이영훈 교수는 고려가 대몽항쟁을 할 때의 고려 무인정권과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고려에는 개성에 사는 사람 10만 명을 국인(國人)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평양 시민들과 같은 하나의 특권계급이죠. 그들은 워낙 잘 단결되어 있고, 또 그들 이외의 백성들이 몽골 군대에 짓밟히거나 오랜 전란에 고통 받는 것에 대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몽골부대가 강화섬을 제외한 전 국토를 휩쓸어도 고려는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에서는 고려를 다른 지역처럼 점령하여 직할 영토로 만들지 못하고 부마국의 지위를 인정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남북 관계가 풀리면 남한의 요인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옵니다. 갔다 와서 하는 가장 흔한 이야기가 “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평양시내일 뿐이죠.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특권층입니다. 평양에 가서 북한 당국이 보여준 사람들만 만나보고서 마치 북한을 다 본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평양 밖에는, 아니 평양 안이라도 북한 당국이 보여주는 세상 밖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막연한 추측보다는 팩트(fact)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개성공단에서 지금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가 5만 명이 넘습니다. 그 분들이 받는 임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개성공단의 최저임금은 처음에 아마 50달러로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5%씩 인상하기로 계약을 했을 겁니다. 2004년부터 개성공단에서 첫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니 십년쯤 지났습니다. 올해는 남북 간에 최저임금을 협상하여 74달러로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환율이 얼마인가요? 그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대충 8만 원 정도 될까요? 물론 기업 입장에서는 초과근무수당과 사회보험료도 15%씩 가산하여 부담하기 때문에 일인의 노동자당 평균적으로 155달러를 부담한다고 합니다. 임금은 노동자들에게 직접 지급되지 않습니다. 북한 당국이 받아서 일부는 현금으로, 일부는 배급표로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물론 당국이 챙기는 부분도 많겠지요.
2007년인가, 당시 개성공단 최저임금이 57달러쯤 된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이른바 ‘주사파’라고 하는 민주노동당 내 친북 성향의 당원들과 새해 등산을 갔다 내려와서 뒷풀이 하면서 제가 작은 상품을 걸고 퀴즈를 냈습니다. “개성공단 노동자의 임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맞추어 보세요. 정답에 가까운 분에게 선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분들은 북한 동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분들이고 통일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답을 하신 분, 저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가신 분의 대답은 정답의 열 배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분들은 그보다 더 큰 차이가 나는 답을 하셨던 겁니다. 그 분들의 관념은 현실과 열 배 이상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 중에서 자신의 관념과 현실의 차이가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성찰하여 자신의 세계관을 바꾼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성찰은 개인에게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혹시 나중에 집단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위험보다는 내가 집단으로부터 왕따를 당할 위험은 더 확실한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아무리 황당한 교리의 종교집단이나 종파라도 일단 150명 이상의 집단을 형성한 후에는 쉽게 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백석대 한화룡 교수는 1990년대 후반 탈북자의 수기와 면담을 통해서 북한 주민들의 의식 구조가 네 가지 신화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1) 김일성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서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해방 신화’(2) 북한이 1950년 북침한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승리 신화’(3) 북한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낙원 신화’(4)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불쌍한 남조선 동포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통일 신화’, 이렇게 네 가지 신화가 북한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4대 신화입니다. 특히 북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두 제국주의’(일본, 미국)를 물리쳤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간에 외부 세계의 정보가 들어가면서 이 신화는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까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고 정보를 통제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큰 동굴 속에 2,5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현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괴한 나라가, 신정체제(神政體制)가 바로 우리나라의 북한 지방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북한을 공부하면서 또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선군정치(先軍政治), 많이 들어보았죠? 그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들은 성군(聖君政治)와 혼동을 하시더군요. 노동운동의 투사로 유명한 분인데 말입니다. 너무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던 사람에겐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하여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군대를 우선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물자든지 인력이든지 군대에 먼저 배정한다는 방침이죠. 지금 저의 머릿속에 문득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안연편 7장인데요, 공자께서 군대와 식량(경제), 백성의 믿음 세 가지 중에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의 믿음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공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군대가 아닌 경제를 먼저 포기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북한이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가장 중요한 ‘백성의 믿음’을 지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백성의 믿음’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화가 무너지면 백성의 믿음도 흔들릴 것입니다. 위정자의 입장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역시 믿음이란, 신화에 바탕을 둔 맹목적 믿음이라면 위험하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웃음)
우리나라 역사는 지금까지 정말 드라마틱한 드라마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드라마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통일이 남았거든요. 지금 북한하고 남한의 소득 격차는 아마 30대 1쯤 이나 될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직한 사실은 북한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라고 규정하였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 제1조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인권 개념이 북한에는 없습니다. 얼마인지도 모르는 정치범들이 사소한 실언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북한이란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입니다. 그 나라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중국에는 수십 만 명 있고, 그 중에서 제 3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 이 분들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 아닙니까? 민간 차원에서도 하고 국가에서도 하는데, 힘들어 해요. 이 분들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민의식이라든지 자기 알아서 하는 이런 게 통 없대요. 처음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통 안 하려고 하고, 그리고 어떻게든 힘 있는 사람과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볼까 이런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북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고 당당한 권리를 갖지 못하니 또한 자립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벌써 논어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립적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자는 설 립(立)자를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과 평등한 관계를 맺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며, 스스로 자기 노력으로 자립하는 것을 立이라고 하더라고요, 공자 자신이 바로 피나는 노력으로 자립한 인간입니다. 혜당 황승우 스님의 자서전 [가시밭도 밟으면 길이 된다]를 다들 읽어 보셨죠? 혜당이 그 가난 속에서도 영어를 배워서 立을 하잖아요. 근데 이게 되지 않으면 근대인이 안 되는 겁니다, 근대 시민이 안 되는 거야. 앞으로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데 우리가 풀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낙관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왔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나타났습니다. 1987년에 노태우가 집권했을 때 황당하고 DJ도 밉고 YS도 미웠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까 그 분들도 순서대로 대통령을 하고,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역사란 게 큰 흐름과 작은 스토리들이 엮여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마 해방정국 10월 폭동 때가 아닐까 싶은데요, 대구가 한국의 모스크바라는 이름을 얻고, 그보다 훨씬 전이긴 하지만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다니 참 까마득한 이야기죠. 그것은 근대화의 주도권을 두고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헤게모니를 다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또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갈등으로 새로운 장을 써내려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자본주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가 만들어갈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