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용, 강명도, 김유송과 5.18광주 침투 북한특수부대
1.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은 전 북한인민군 특수부대 대위 출신이다. 그는 2009년 탈북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을 발간했었고, 이에 앞서 2006년 12월20일에는 5.18단체들을 향해 “5.18광주침투 북한특수부대”를 두고 공개토론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그들의 반응이 없자 2010년 천안함폭침 사건이 발생한 후 남북의 첨예한 긴장관계 하에서 또 다시 5.18단체들에 대해 진실 앞에서 더 이상 숨바꼭질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 5.18북한군침투 문제를 두고 공개토론 하자고 했으나, 5.18단체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어둠의 자식들은 밝은 곳을 싫어한다.
임천용은 2010년 5.18북한군 광주침투를 두고 5.18단체들에게 공개토론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심에 어린 충고와 조언을 했는데, 그 주요부분을 발췌 해 보았다.
“5.18광주사태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서 실질적인 주체나 위치에 있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저희들이 이 사건에 의욕을 가지고 증언록까지 출판하면서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딱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5.18광주사태는 북한정권과 남한의 김대중세력이 국가전복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짜고 친 고스톱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직접적인 피해자이고 당사자인 광주사람들은 가로 보나 세로 보나 틀림없는 희생양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전말이 나오게 되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행위는 물론, 김대중의 반국가적인 음모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있고, 희생자들과 광주시민들의 적이 엉뚱한 국군이 아니라 김정일과 남쪽에 숨어있는 그 추종자들로 가려지게 됩니다. 광주사태의 살인자를 국군으로 몰아가는 것은 착오이기 전에 자살행위와 같은 짓입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들먹거려서 죄송한 일이지만, 하늘나라에 가있는 그들도 자기들의 죽음이 북한정권의 악랄한 조작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대한민국 국군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살아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절대로 내부싸움을 하지 말고 단합해서 김정일과 싸우라고 당부할 것입니다.”
임천용 대표는 또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5.18”에서 5.18광주 침투 북한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서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300명)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여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 300명)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년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1980년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2. 경민대학 교수, 동포사랑전국연합 대표, 강명도(서울광수로 지목)
이제 지난 1994년 탈북해 현재 경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강명도 교수가1995년에 쓴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에서 적은 내용을 알아 본다.
“당시 대남공작 총책이었던 김중린 비서가 1,20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차출해서 남한의 광주에 침투시켜 사태를 격화시키고자 했었다. 실제로 일선급 특수부대에서 인원선발도 끝났고 세부계획도 마련돼 있는 상태였지만, 북한측이 예상했던 것보다 광주사태가 일찍 남측에 의해 진압돼버리는 바람에 투입하지 못했고, 김중린은 시기조절에 실패해 엄청난 문책을 받았다.”
3. 대왕버섯 사업가, 김유송 (서울광수로 지목)
한 때 시스템클럽과 500만야전군에서 지만원 박사와 대한민국 애국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필명 다윗, 김유송이 2012년 “산자의 외침”이라는 글에서 주장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다.
“저는1997년 평양출장길에서 총참모부 모간부와 함께 전 인민군정찰국장 오룡방 대장과 전124군부대 여단장을 하던 신수룡 상장을 만나 간담에 시간을 가졌습니다. 북한군에서 청와대 습격과 5.18광주침투를 비롯한 내란작전을 직접 조직 지휘하여온 인민군정찰국장 오룡방과 124군 여단장 신수룡은 당시 북한군최고사령부 작전 조에서 김정일의 대남작전을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오룡방은 저희들에게 “수령님께서 생전에 통일의 기회를 두 번 잃었다고 회고하시며 4.19와5.18때 더 많은 역량을 투입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고하며 우리군대는 70,80년대가 제일 전투준비가 잘 되여 있었다고 그때 통일 시켜야 했었는데 하며 후회 했습니다.
또한 인민군 총정치국 지시로124군부대에서 한국에 파견 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황해남도 삼천군과 안악군에 “남조선혁명가묘소”를 만들어 놓고 부대원들의 충성심교육과 계급교양에 이용하여 왔습니다. 60구에 달하는 묘소 중 12구 묘에 사망 일자를 1980년 5월로 표기 하였습니다. 북한 로동당은 광주5.18사건은 수령님께서 구상하시고 장군님께서 진두지휘하신 남조선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전하며 김정일의 우상화 교육의 장으로 이용 하였습니다.”
4.
임천용, 강명도, 김유송의 증언에 나타난 5.18광주 침투 북한특수군
첫째, 임천용은 전 북한인민군 특수부대대위 출신으로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한 후 변함없이 5.18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침투하여 김일성의 후방교란작전에 동원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그가 탈북군인들로부터 확보한 증언에 의해 기술한 북한특수부대의 남침과 북으로의 귀환 루트가 너무도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그가 말한600명의 특수부대는 지만원과 노숙자담요가 과학적으로 증명한 이른바 “전투 조 광수 600명”임을 쉽게 알 수 있다. 戰鬪 組는 해상루트를 통하고 工作 組는 땅굴을 통해 침투했었다는 가정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