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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나는 요즘 것들의 공동체Ⅰ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_김훈(2007, 중앙일보 인터뷰)”
요즘은 아파트도 공동체가 대세!
최근, 십여년이 넘게 공동체에 대한 화두는 사회 곳곳에서 넘실대었다. 한국 사회에서 꽤 오랜 기간 ‘종교’와 ‘지역’에 강력한 소속감과 통합성을 부여했던 공동체가 제도와 정책으로 공공화(公共化)된 후 ‘아파트’ 같은 건축과 건설에까지 접목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공동체 논의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같이 빠르고 응축적이다. 제도 정책으로의 편입은 ‘속도전’을 방불케 했다. ‘공동체 회복’은 동질성뿐만 아니라 기술복제의 ‘동일성’을 가졌다. 새마을운동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공동체는 전통적 공동체에 대한 인식적 향유를 가지지만, 산업화의 과정에서 제도 정책과 결합 되어 획일화된 접근 방식으로 전개된 특성이 있다.
공동체는 배제를 전제로 한다.
사실 공동체의 본래 속성은 배제를 전제로 한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의 어원에서 볼 수 있듯, 공동체의 동질성은 ‘차이’를 배제함으로 유지된다. ‘차이’의 배제는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킨다. 과거, 우리 사회의 전통적 공동체는 혈연, 지연, 종교성에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었다. 피와 땅과 정신에 근거해 동질성을 공유하고, 이에 위배 되는 개인을 강력하게 배제함으로 유지되었다.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사유는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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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대에서 공동체란 뭘까? (철학에서 힌트 얻기)
공동체가 뭘까? 마을만들기, 주민참여, 사회적 재생 등을 공부하다가 문득 마을공동체, 지역공동체, 커뮤니티의 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공동체와 관련된 철학서적 몇 개를 살펴봤다.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생각보다 다양했고, 최근에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관점이 제시되고 있었다. 찾아보고 이해한 내용을 최대한 쉽게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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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크게 4번의 변동이 있었다.
첫 번째 변혁점은, 공동체의 특성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제시하는 사유이다. 1912년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가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와 이익사회(게젤샤프트)의 개념을 주창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가족, 마을, 종교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감정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공동사회와 정당, 회사와 같이 이익과 능률에 따라 의지적으로 형성된 이익사회를 구분하였다. 이는 공동체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에 의미가 있으며 이후 두 개의 개념 쌍 하에서 공동체의 특성과 형태, 과정 등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이어진다.
두 번째 변혁점은 공동체는 어떤 정해진 형태나 상황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개념으로서 공동체화를 제시하는 사유이다. 에밀 뒤르켐, 막스베버, 게오르크 짐멜 등과 같은 학자들은 과정으로서의 공동체화 속에서 다양한 논의를 이어간다.
세 번째 변혁점은 탈 전통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사유이다. 현대사회의 공동체는 모두 소멸하고 없다는 것에 반대하며 현대사회에서는 새로운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나타난다. 공동체의 유동성을 강조하며 ‘액체 공동체’를 설명한 지그문트 바우만, 공동체는 선택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유한책임의 공동체’를 설명한 야노비치, 복수로 중첩되어 복잡하게 공동체가 형성됨을 강조하며 ‘포개진 공동체’를 설명한 헌터와 서틀즈, 작은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강조하며 ‘공동체의 공동체’를 설명한 벤자민 바버, 공동체가 형성되는 절차를 강조하며 ‘의사소통 공동체’를 설명한 위르겐 하버마스 등 현대 시대에 나타나는 다양한 탈 전통 공동체의 특징이 제시된다.
마지막 네 번째 변혁점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각 끝에 서로의 융합을 제시하는 ‘자유주의적 공동체’를 제시한 사유이다. 개인의 정체성이 존중받는 상황에서 공동체적 삶을 어떻게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악셀 호네트의 사회적 자유와 인정이론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 모든 논의의 근간을 되짚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사유해 왔다면 앞으로는 ‘차이’에 기반한 공동체를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4번의 변동과정에서 발전해온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공동의 목표, 자원, 의식 등에 의해 형성되어가는 무언가로 전제해왔다. 그러나 동일성은 당연히 이질성을 배제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으며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밀어내려는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일성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사유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고,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또한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파괴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동질성’이라는 특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발현하지 않거나 숨겨야 공동체 내에서 존속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배제의 확률이 높아진다. 제시된 그림처럼 한 지역에 오랫동안 대대로 상호작용하며 쌓아온 연대감을 가진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의 정체성 간의 이질적 요소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공동체에 속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 파괴해야 할 자기 정체성의 비중이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배경과 가치관 등이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다원주의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사회의 현상은 개인 간 동질적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게 만든다. 동질성에 기반한 공동체에 속한다면 나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파괴해야지만 공동체 내에서 존속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방어적 입장에서 개인은 공동체에 속하기보다는 이탈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진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배타성이 강조된다. 너무나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배제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배제되는 개인들이 소수일 경우 큰 공동체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규정되어 폭력적으로 억압당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또한 자기 파괴를 감수할 만큼의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사실은 반강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장 뤽 낭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학자들은 공동체의 사유에 있어 ‘동질성’을 거부한다. 특히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관점이 주목할 만한데, 그는 공동체를 면역 개념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결국 자기 파괴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 몸에 바이러스(자아와 차이가 있는 존재)가 침투했을 때 발생하는 면역체계에 빗대어 공동체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몰아내는 것과 같이 배타성에 의해 면역체계가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도 이질적인 것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반응하면서 자기 파괴를 방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면역이라는 개념은 이질성을 몰아내는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바이러스와 면역세포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항체라는 것을 생성하며 이를 통해 자기 파괴를 방어한다. 일시적으로 취약해지는 시기가 있을 수 있으나 이질성을 포섭하여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면역의 진정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은 공동체 사유의 중심을 ‘동질성’이 아닌 ‘차이’로 이동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지방 중소도시에서 지역성을 공유하는 커뮤니티(공동체)가 새로운 이주민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지역성에 공감하여 기여하는지, 얼마나 오래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이주민의 라이프스타일의 상당 부분을 파괴할 가능성이 존재하며, 동질성에 벗어나는 라이프스타일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언젠간 지역을 떠날지도 모른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관계인구는 당연히 지역성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 합류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차이’에 기반한 공동체에 대한 사유는 새로운 인구의 이주와 지역 변화를 연관지어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인구는 지역에 새로운 분위기, 상점, 직업 등을 만들어 정체되었던 중소도시에 변화의 발판을 마련할지 모른다. 우리와 다른 개인들의 차이에 집중하여 적극적으로 포섭함으로써 새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공동체 회복을 위한 활동은 동질성을 중심으로 기획되는 경향이 강하며, 전통 공동체를 상정하고 기획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옳은지 명확히 판단하기에는 이르나, 분명한 것은 공동체를 사유할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차이’의 공동체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는 철학계에서도 아직 논의 중인 사안이며, 누구도 쉽게 ‘차이’의 공동체를 기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공동체를 지속해서 고민하고 실험해 나갈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유지할 때 “동질성의 요소(공동의 목표, 자원, 의식)를 지키고 강화해야 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차이 나는 요소와 우리가 결합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은 뭘까?”에 집중해야 한다. 현대 공동체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가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욱진, 2020, 공동체, 한국학술정보
박세일 외 2명, 2008, 공동체 자유주의, 나남 출판
Hartmut Rosa et al., 2010, 공동체의 이론들, 라움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