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수백년 뒤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거라는 걸 예견이나 했던 듯 파란(波瀾)과 반전(反轉)으로 점철되었던 숙종시대는 1720년 6월 숙종이 즉위 45년 10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정점으로 치닫는 정쟁의 한 가운데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아야 했던 경종. 그런 경종의 등극은, 장희빈을 죽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노론에게 정치적 박해가 뒤따를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경종으로서는 즉위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그다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경종(당시는 세자)의 나이는 14세였다. 한마디로 ‘알 것 다 아는’ 나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 엄청난 사건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이후 경종은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없었다. (그가 후사를 잇지 못한 이유로, 일설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신 직후 옆에 있던 경종(당시 세자)의 ‘거시기’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확인된 사실이 아니기에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숙종은 세자의 이런 약점들을 거론하며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연잉군에게 왕세자 대신 편전에 참석하여 정치를 배우라는 명을 내렸다. 소론이 대뜸 이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다. 건강을 핑계로 세자를 바꾸려는 수작을 즉시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소론과 노론 간에 너죽고 나살자는 식의 싸움이 벌어졌고,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숙종이 사망하자 경종이 가까스로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워낙 병약하여 ‘종합병원’으로 불리는 경종이다 보니, 즉위 초부터 소론과 노론 간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터져버렸다.
첫 번 째 사건은 그해 7월 유학 조중우의 상소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조중우는 상소를 통해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의 명호(名號-이름과 호)를 높일 것을 건의하였다. 즉 장희빈의 작호(爵號-관작의 호칭)를 빨리 회복시켜 나라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은 선대왕마마(숙종)의 엄중한 결정을 위배하였다 하여 조중우를 죽이고, 동조자인 박경수 등을 귀양 보내 버렸다.
이후 경종을 만만하게 본 노론은 곧바로 또 다른 도발을 획책하였다. 노론계인 성균관 유생 윤지술은 숙종의 묘지문에 장희빈이 민비 시해죄로 처형된 사실을 명백히 기입하자는, 임금 앞에서 감히 하기 어려운 방자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소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의 망언을 규탄하고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노론의 비호로 무마되고 말았다.
이 두가지 사건을 기화로 노론과 소론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야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노론은 이정소라는 자를 앞세워, 임금이 비실비실 하는데다 후사까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하여 사직이 흔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소론의 반대가 거셌지만, 경종은 노론의 위세에 눌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이에 소론 유봉휘가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의집중포화를 맞고 유배에 처해졌다.
한데,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로 안다고, 그 두 달 뒤 노론은 조성복을 앞세워 이번엔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왔다. 요컨대, 경종이 병도 많거니와 1717년 선대왕(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케한 사례(정유고사)도 있었으므로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경종으로 하여금 아예 정사에서 손을 때라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이 요구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론의 좌참찬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이 간절히 말리고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지방의 유생까지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취소를 간청하고 나섰다. 게다가 당사자인 연인군 또한 4차례나 이의 철회를 간청하고 나섰다. 노론은 결국 자신들의 주장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종은, 한 번 내뱉은 말 바로 거둬들이는 건 체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여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려버렸다. 그러자 노론측은 경종의 마음이 대리청정 쪽으로 굳어졌다고 판단하여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대리청정 요구 취소'를 다시 '취소'하고는 재차 대리청정을 요구하게 되었다.(이를테면 경종과 노론간의 심리전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노론의 태도가 다시 대리청정 요구 쪽으로 선회하자 이번에는 경종이 적이 당황하였다. 의례적인 '립서비스' 차원의 '외교적 하교'일 따름이었는데 노론측이 이를 자신의 참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소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이의 해결을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대리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데다 병이 중하여 부득이 행한 조치였으나 지금은 전하의 나이가 불과 34세이고 즉위한지도 1년밖에 안될 뿐더러 병세 또한 숙종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므로 대리청정은 부당한 것'이라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 측은 얼마 전 재차 올렸던 대리청정 요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또다시 이의 '취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대리청정 요구를 두고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한 노론 측에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졌음은 물론이고, 정적인 소론으로부터도 무차별 적인 비난성명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한편, 명분에서 앞서있던 소론은 이 기회에 노론을 박멸하기로 하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버렸다. 그 해 12월 김일경 등 ‘7인의 특공대’가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노론의 4대신(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에게 '부당하게 정권교체를 획책한 역모자'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 ‘한 방’으로 갑술환국 이후 지속되어 왔던 노론의 권력기반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동안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물경종’이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던 경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4대신을 파직한 후 지방으로 내쫓아버렸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 또한 대부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던 것이다.(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판 엎기(환국)’이다보니 적절한 타이밍에 이를 제대로 한번 써먹은 셈이다)
그리고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을 기용하는 등 소론의 중심인물들을 정권의 최일선에 배치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소론정부시대’의 도래를 만방에 알렸다.
한편, 조정을 장악하면서 탄력 한번 제대로 붙은 소론은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헛되이 보내랴를 줄창 외치며 노론측 인사들에 대한 축출작업을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한데 타이밍 한번 절묘하게도, 그즈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이란 지관이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 : 칼로 살해, 소급수 : 약으로 살해, 평지수 : 모해하여 페출)을 들고 나와 주었다.(하지만 소론이 노론 척결을 위하여 목호룡을 매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숙종 말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노론이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는데, 신분상승을 위해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곡예를 하던 목호룡이 소론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새삼 예전의 음모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심상길․홍의인․김민택 등 대부분 노론 4대신의 자식 또는 조카, 혹은 추종자들이었다.
조정은 다시 발칵 뒤집어졌고, 노론의 운명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 되었다. 경종은 기다렸다는 듯 국청을 세웠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처단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쫓겨가 있던 노론 4대신 또한 한양으로 압송하여 도륙을 내버렸다.
당시 노론의 피해상황을 보면, 사형된 자가 20여명, 맞아 죽은 자가 30여명,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끌려와 죽은 자가 13명, 귀양 114명, 자살한 부녀자가 9명 등으로, 졸지에 불어닥친 피바람으로 노론 집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이 모해음모사건의 보고서에는 왕세제 연잉군도 가담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례로 봤을 때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를 왕자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연잉군이 대비 인원왕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까지 내놓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결백을 호소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노론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소론은 강경파인 준소(峻小),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는 청류(淸流) 등으로 나눠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폭로한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하여 역사는 이를 ‘신임사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임사화 이후 조정은 소론세력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늘 비실비실하던 ‘비운의 왕’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만인 1724년 8월, 소론이 권력의 단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훌쩍 세상을 떠났으며, 그를 떠받쳤던 소론의 전성시대도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52년)을 재위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살았던(83세) 타이틀 2관왕의 소유자 '영조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