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소장가의 낡은 벽장 뒤졌더니… 장욱진 첫 ‘가족’ 그림, 60년만에 한국으로
처음으로 돈 받고 판매했던 작품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2023.08.17. 03:00
화가 장욱진의 1955년작 ‘가족’이 작고한 일본인 소장가의 낡은 아틀리에 벽장에서 발견됐다. 사진은 지난 6월 발견 당시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꼭 한번만 찾아봐주세요. 이런 그림, 집에 없습니까?”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몇달 전 한 일본인 미술품 소장가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그림은 화가 장욱진(1917~1990)의 1955년작 ‘가족’. 1964년 반도화랑에서 열린 첫 장욱진 개인전에서 일본인 시오자와 사다오(1911~2003)에게 팔렸지만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작품이다. 전화기 너머 소장가의 아들 시오자와 슌이치씨에게선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아버지가 외국에 출장 나갈 때마다 그림을 자주 사 오셨지만, 그런 그림은 제 기억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화가 장욱진의 1955년작 ‘가족’이 작고한 일본인 소장가의 낡은 아틀리에 벽장에서 발견됐다. 장욱진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작품의 액자 틀은 월북 조각가 박승구(1919~1995)가 조각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장욱진 회고전을 준비하던 배 학예사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시오자와 부부를 설득해 오사카 근교에 있는 소장가의 오래된 아틀리에를 찾아갔다. 그리고 찾아냈다. 그는 “2층 다락방 낡은 벽장 속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그림을 발견했다”고 했다. “벽장 문도 제대로 안 열려서 반만 열고 비집고 들어가 휴대전화 조명을 켰더니, 안쪽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액자 하나가 보였어요. 설마 하면서 집어보니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장욱진이 그린 최초의 가족 그림이 일본에서 발굴돼 60년 만에 공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음 달 14일 덕수궁관에서 개막하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서 이 그림을 전시한다고 밝혔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 학예연구사가 일본 오사카 근교에 있는 소장가 아틀리에 다락방에서 그림을 발견할 당시의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왼쪽)와 소장가 시오자와 슌이치씨. 배 학예사가 들고 있는 작품이 장욱진의 1955년작 '가족'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가족’은 생전 30점 이상 가족을 소재로 그린 장욱진이 항상 머리맡에 걸어둘 만큼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자 생애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매한 작품이다. 장욱진은 이 그림을 판매한 돈으로 막내딸에게 바이올린을 사줬다고 한다.
가로 16.5㎝, 세로 6.5㎝ 크기의 작은 그림이다. 붉은 배경 한가운데 집 한 채가 있고, 가족사진처럼 네 식구가 앞을 내다보고 서 있다. 집 좌우로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고, 두 마리 새가 한가로이 날아간다. 배 학예사는 “장욱진의 가족 그림 중 유일하게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이들만 함께 그려진 사례”라며 “전쟁이 끝나고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으로서 생계에 대한 책임감 등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
장욱진의 1972년작 '가족도'. 1955년작 '가족'이 일본인에게 팔린 뒤 화가가 아쉬운 마음에 이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전해진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이 그림이 팔린 뒤 장욱진은 아쉬운 마음에 1972년 비슷한 도상의 ‘가족도’(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를 다시 그렸다. 화가의 부인 고(故) 이순경 여사는 “조그마한 가족도였는데 두고두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고 언급했고, 큰딸 장경수씨도 장욱진의 대표작으로 이 그림을 꼽은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가를 설득해 이 작품을 구입했고, 다음 달 공개를 앞두고 보존 처리 중이다. 미술관은 “평생 가족 이미지를 그린 장욱진 가족도의 전범(典範)이 되는 그림이자 최초의 정식 가족도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큰딸 장경수씨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그리신 나무의 우둘투둘한 질감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봤던 기억이 난다”며 “다시 만나니 눈물이 난다”고 소감을 전했다.
장욱진, '가족'(1973). 캔버스에 유화물감, 약 13.5×20cm, 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