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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입 인사방 스크랩 미학이란 무엇인가?
유용근 추천 0 조회 61 07.04.25 22: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학이란 무엇인가?

 

 

 

Ⅰ.미학의 기본개념

 1.코레이아,카타르시스,미메시스

 2.뮤즈,엔토우시아스모스

 3,테크네

 4.노모스,캐논

 5,칼론

Ⅱ.18세기 미학

Ⅲ.20세기 초 미학

 1.아방가르드

 2.다다이즘

 3.레디메이드

Ⅳ.포스트 모더니즘

Ⅴ.맺음말

 

 

 

 

Ⅰ. 미학의 기본 개념

 

 서구의 미학사를 검토해 보면 미학의 문제는 미(beauty)와 예술(finearts)이라는 두 개념으로 좁혀지거나 귀결되고 있다. 미는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를 지시하는 개념이며, 예술은 인간의 활동들 중 특수한 가치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의 개념은 일의적인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역사상 근대라는 시기를 통해 개념상의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예술"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화인 아트"라는 말의 형성과 그 체제의 확립 및 근대적인 개념의 탄생 역시 18세기 근대라는 시기를 통해서였다.18세기의 미학은 조금 후에 알아보기로 하자. 미와 예술이 미학의 모든 문제는 아니다. 아름다운 예술도 있지만 숭고한 예술도 있으며, 심지어 오늘날엔 추한 예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술미 외에 자연미나 환경의 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적 범주와 미적 대상의 이 같은 다양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미나 예술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변천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근대 이후에 있어서도 그들 두 개념이 미학의 기본개념들이 되고 있다는 데에는 아무런 이론이 없다.

 그르므로 미의 개념이 전의 되어 오늘에 이르는 과정과 그 전에 없었던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가 확립된 후 고전적인 개념으로부터 근대적인 개념이 잉태되게 된 요인들을 알아봄으로써 무엇보다도 미학의 문제 그 자체의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발생적으로 미와 예술 두 개념에 관련된 그리스 초기의 여러 개념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1. 코레이아, 카타르시스, 미메시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코레이아"(choreia)는 춤과 음악과 시가 미분화된 채 융합되어 진행되는 인간 활동의 형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러한 형태에서 춤은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러했다는 사실은 "코레이아"의 어원이 군무를 의미했던 "코로스(choros)"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합창을 뜻하는 "코러스"(chorus)의 어원이 바로 이"코로스"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A.D.2세기경의 아리스티데스 퀜틸리안이 지적하고 있듯 그 특징은 감정이 표현이었다. 따라서 최초의 원시적 단계에서 코레이아는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그 후 점차 발전된  지적인 단계에서는 그것을 보거나 듣기만 함으로써도 감정의 표현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치유효과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춤은 후에 음악이나 연극에 의해 인수되게 된 역할, 곧 감정을 달래고 진정시켜 영혼을 세척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러한 정화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카타르시스(karharsis:catharsis)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동작과 음과 말로 이루어진 코레이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이러한 춤을 미메시스(mimesis:imitation)즉, 모방이라고 불렀다. 모방에 대한 이러한 최초의 의미가 후에 아파테(apate:illusion)의 개념과 결부되면서 그것은 연극과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 환영을 만들어 낸다는 재현의 의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있어서까지도 모방이라는 말은 그러한 재현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플라톤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렇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방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처럼 변천된 것은 고댈 그리스의 미술의 사실주의적으로 변모되는 미술 사적이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2. 뮤즈, 엔토우시아스모스

 

 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러한 연합형태의 코레이아로부터 추후음과 같이 말이 점차 떨어져 나가 독립된 형태를 이룬 것이 음악과 시이다. 이와 같은 분리현상은 뮤즈(muse)의 역할이 구분되고 있는 속에서도 감지될 수 있는 일이며, 여신의 체제는 당시의 이 같은 형상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1)탈리아(thalia):희극

2)멜포메네(melpomene):비극

3)에라토(erato):비가

4)폴리핌니아(polyphynmia):서정시

5)칼리오페(calliope):웅변과 영웅시

6)에유테르페(euterpe):음악

7)테르프시코레(terpsichore):춤

8)클리오(clio):역사

9)우라니아(urania):천문학

 

 위에서 보듯 여신의 체제에 의하면 시와 음악과 춤은 서로 다른 여신에 의해 주재되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춤과 음악과 시가 각기 독립된 형태로 서서히 발전되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시와 음악과 춤 모두가 똑같이 여신들에 의한 활동이 되고 있음으로써 그들 간의 상호 긴밀했던 관계를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표현적인 예술들이 여신들에 의해 주재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인간에 의한 활동이 아니라, 각각의 여신들에 의한 영감(inspiration)의 소산임을 뜻한다. 이 영감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가 엔토우시아스모스(enthousiasmos)로서, 그것은 "신에 홀린 상태"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본래 종교적인 용어로서 신에 사로잡힌 접신상티를 뜻하는 말이다. 추후, 그것이 시의 발생에 적용되어 불꽃같은 "시적 열정"(furor poeticus)혹은"시적 영감"이라는 말로 발전된 것이다.

 

3. 테크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동류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오늘날엔 예술이라는 범주하에 다 같이 포함되고 있으면서도 시각예술 쪽의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 등은 전혀 그들을 주재하는 여신들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시각예술이 여신에 의한 영감의 소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들 예술이 발전되어 온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 예술은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테크네(techn?)의 개념하에서 이해되게 되었다.

 영어의 "아트"(art)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이말 은 그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명백히 규정되기 이전에도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제작(poiesis:making)에 적용된 말이었다. 즉 ,그것은 1)자연에 의해 제공된 질료가 있어야 하고,2)일단의 규칙에 기초해야 하며,3)제작자 스스로의 작업에 의해 수행되는, 지적인 제작능력 일반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갖춘 인간의 제작기술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테크네"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테크네는"인식적이 아니라 제작적이며, 영감이 아니라 기술(skill)에 기초하고 있으며, 기계적 일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칙에 의해 의식적으로 인도되는, 자연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 생긴 모든 공예(craft)"0)일반에 적용되는

말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테크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테크네가 일반적인 규칙에 의해 의식적으로 인도되는 제작활동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목수의 테크네나 대장장이이의 테크네를 포함하여 일체의 테크네를 그들은 "직적인 활동"의 한 형태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 들은 테크네에 수반되는 지식을 강조했으며, 바로 그러한 지식 때문에 일차적으로 그것을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식의 창조의 개념이 없었다. 오늘날 창조로 이해하고 있는 여러 예술들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감과 기술의 개념에 관련시켜 놓고 있다. 그리고 영감에 있어서 와는 달리 기술에서는 제작가 준수해야 할 일반적인 규칙이 강조되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규범"(kanon:canon)이라 불렀다.

 

 4. 노모스, 캐논

 

 "규범"은 시각예술이 준수해야만 하는 형식 혹은 일반적 규칙을 뜻하는 말로서 음악에서는 이에 해당되는 것을 "노모스(nomos:law/order)라고 불렀다. 이러한 노모스를 수학적으로 연구하여(harmonia:harmony)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 및 그의 제자들이다. 즉, 그는 하모니아를 수(number)와 척도(measure)와 비례(proportion)에 입각하고 있는 수적 배열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음악은 여신의 소산으로서 영감에 관련되어 이해되는 전통으로 벗어나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이해되는 계기가 주어지에 되었다. 이에 비해 시가 테크네로 이해되게 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였던 만큼 그 후의 일이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서구 미학사를 통해 처음으로 독립된 장으로서의 음악에 대한 이론과 시에 대한 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애초 코레이아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춤에 관해서는 별도의 이론을 개발시켜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체에 관련된 활동이며, 신체에 대한 전통적이고 철학적인 불신 때문이었다.

 

 5. 칼론

 

 우리가"아름다움"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영어의"뷰티풀"(beautiful)에 해당되는 고대의 "칼론"(kalón)이라는 말은 근대 시기를 통해 사용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즐겁게 해 주고, 감탄을 유발시키는 일체의 것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는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시각이나 청각의 대상에 대한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과 전혀 다른 이유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많은 대상들, 예컨대 인간의 마음이나 성격에 대해서까지 적용되는 말이었다. "가장 공정한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델피 신탁의 선언은 그리스인들이 "칼론"이라는 말을 얼마나 넓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사용된 광의의 의미로부터 아주 서서히 좁은 의미의 미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좁은 의미의 미의 개념에 해당되는 말로서 처음에는 "칼론"이라는 말 대신 다른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좁은 의미의 미에 대해 음악에서는"하모니아"라는 말이 조각에서는 "시메트리아"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이러한 성질을 지닌 대상들에 대해서"칼론"이라는 말이 사용됨으로써, 그것은"하모니아"나 "시메트리아"와 같은 말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의미로서의 미를 뜻하는"칼론"이라는 말도 그적용의 폭이 광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즉, 그것은 행위나 습관, 제도나 사고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감각적인 대상들 중 시가적인 대상에서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미의 개념을 감각적인 미에 국한시키고자 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시각에만 제한시켜 놓고 있으므로 -발견되는 시메트리아를 지시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고대 말기쯤의 일이었다. 그리고 시각적인 대상들 중 미술작품에 대해서만 이 말이 적용되려면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6. 테오리아

 

 "테오리아"(theoria :viewing)라는 말은"관조"혹은"정관"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 영어의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이라는 말의 어원으로서 근대 이후에는 미적 태도를 취할 때의 특수한 지각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어 왔으나, 고대 그리스에서 이 말이 사용되었을 때는 그러한 특수한 의미로서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오늘날 과학적 탐구나 미적 관조라고 하는 것에 다같이 "테오리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름다운 사물을"보는"일과 일상적 사물을 "보는"일 간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은 채 이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러서도 미와 예술작품을 보는 일이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도 시사되지 않은 채,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옛날의 의미 그대로"테오리아"라는 말을 모든 봄에 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그들은 지각을 일종의 탐구로서 간주하기도 했고, 탐구를 일종의 지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사고(thought)는 지각(perception)보다 고차적인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지각들 중 오직 시각하고만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시각과 청각은 서로 다른 것이 라고 믿고 있었으며, 시각예술은 귀를 통해 지각되는 예술과 구별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음악이야말로 영혼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서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시각예술에 대해서만"아름답다"는 말을 적용하는 전통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의 개념은 애초에는 도덕적인 미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것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미의 개념이 감각적인 것에 국한되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시각의 비례에 제한시켜 놓았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미의 개념은 시각에 기초하여 형상과 색에 의해 정의되는 전통을 낳게 되었다.

 

Ⅱ. 18세기의 미학

 

 앞에서 고대 그리스의 미의 개념에 살펴보면서 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러나 미학은 18세기 이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학 분야의 하나로 태어나게 되는데 그 현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다시 언급하지만 고대 서양 사상사로 보면 철학자들은 언제나 미?·조화·극치에 대한 혹은 좀더 직접적으로 당대 예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가령 플라톤은 그의 영원불변의 이데아(진·선·미)사상과 병행하여 아테네 시 안에서의 예술역할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그가 창조와 관련된 창작(poïétique)활동을 수사학적으로 실험 활동보다 열등하게 본 것은 그 시대 자신은 《시학(poétique)》을 비극에만 국한시킨 탓이며, 한편 플라톤과 반대로 자연에 대한 예술적 모방을 공인시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 기원부터 미학적 부류이며 이론과 사유에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예술이 철학의 지대한 관심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기실 철학의 관심은 언제나 예술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철학적 학설들이 '미학적 부류'라고 말할 때에는 한편으로'미학'이라는 개념의 근대적 의미에 잠정적인 기초를 두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이 특수하고 자율적인 자체적 카테고리를 가진 지식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요컨대, 본래 과학·논리학·수학·물리학 등등의 특수 학문들이 서서히 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이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학도 오랫동안 철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단지 미학의 자율화는 좀 더 차후에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인 1750년에 프랑크푸르트-안데르-오데르 철학 교수인 알렉산더 고틀리브 바움가르텐(Alexan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은 새로운 철학 분야에 대해 정의내린 바있다: "인식과 감각적 표출 양식의 학문을 미학이라고 한다. 만약 그것의 목표가 사고와 감각적 담론을 최하위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수사학이며, 만약 그것에 대한 보다 큰 완성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 시학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무엇보다도 감성의 학설이며 아직까지도 '하등'하다고 평가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진'광명의 이성'시대에 바움가르텐은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논리학 분야와 감성·직관·상상의 다소 불분명하고 혼돈스러운 막연한 영역 사이의 관례적인 구분을 더 이상 간과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미학 협회는 이러한 예술과 미 탐구에서 기인한 인식과 분명한 과학 사이의 서열을 기필코 무너뜨리려 하였다.

 칸트가 건넨 칭찬의 표현에 의하면 이성학파에서 '탁월한 분석가'로 성장한 바움가르텐 역시 당시에는 시인 이었다-그는 살면서 시를 한 편도 쓰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는 미학이 그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약 이성이 그 권력 행사를 자제하고 감성안에서 이성과 동등한 능력(유사이성,analogon rationis)0)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정했다면 그 시대 등한시 되었던 어떤 광범위한 영역이 철학적 연구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예술품에 대한 영역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술 창조가 야기하는 직관·상상·감동·열정·관능적 쾌감·유희의 영역에 말이다.

 18세기와 같은 그런 이성주의 시대에서 감성의 해방을 독려하였다는 것은 분명 역설적인 듯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데카르트 이후 주도권을 갖게 된 이성은 인간미를 띠게 되고,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욕망과 의지에 부합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하게 된다. 아마도 이렇게 인간화의 영향으로 바움가르텐의 미학의 가장'아름다운' 정의들 중 하나인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정의를 착상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0)는 18세기에 정평이 난 이른바 이성주의의 모호함에 주의를 기울이는 바움가르텐 견해의 명철함과 독창성을  부각시키면서 그에게 깊은 경의를 표현하였다. 카시러는 자신의 저서 《빛의 철학(Philosophie des ilmières)》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드디어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통하여 동녘이 밝았다. 우리는 이미 계봉주의 시대의 정치철학·법률철학·종교철학·윤리학의 구조 안 어디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와 같은 사상을 발견하였다. 나날이 계몽주의 시대는 전적으로 형이상학적 의미로의 '절대(absolu) ', '신성한 인식의 이미지'로서의 인식의 이상을 부인하고, 계몽주의 시대가 언제나 보다 정확하게 규정하고 보다 완전하게 달성하려고 노력해온 순수하게 인간적인 이상으로 그것을 대치한다."

 

Ⅲ. 20세기 초 미학

 

1.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서로 동질성을 찾기가 어려운 수많은 표현 방식과 문학 형태가 그 이름아래 모아져서 아방가르드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는 어느 특정한 예술 사조나 전통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이상의 여러 현상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래파, 다다이즘, 그리고 초 현실주의이가 아방가르드의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으로 손꼽힌다.

 "Avant-garde"는 원래 군대 용어로서 주력부대의 전진을 위한 길을 정찰하고 예비하는 임무를 갖는 전위대 (前衛隊)를 의미한다. 예술 분야에서는 급격한 진보적 성향을 일컫는 말이다(=전위예술).

 아방가르드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사회적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투쟁 속에서 과격에서 탈피하고 자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로 이어져 나타난 것을 가리키며, 이는 인위적이고 비인간적인 전통으로 가득 찬 과거와의 단절과 새롭고 진정한 예술을 향한 몸부림과 고뇌를 발판으로 인간과 예술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이다.

 아방가르드의 성격을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가 있는데 첫째, 아방가르드는 개척정신가 선구자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지금까지의 예술 표현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표현을 가지고 새로운 정신을 발굴하고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적군에 대항하는 軍과 같이 자기의 운명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항하여 선전포고한다.

 둘째, 아방가르드는 공격적 성향을 가지고 자신을 펼쳐 나간다. 아방가르드는 힘과 참여를 동반하여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공격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고 한다. 미래파의 선언문에서는 용기, 공격, 투쟁의 美 등이 언급되어 있고, 표현주의자들의 선언문에서는 행동과 폭동이 언급되어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텍스트는 물론이고 작가의 언어 즉 욕설이나 빈정거림 그리고 행동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셋째, 아방가르드는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타협을 거부한다. 아방가르드는 인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현상이다. 르네상스이후 그 어떤 예술도 감히 인간이 자연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모방한다는데 대한 반발을 하지 못했다. 그 반발은 모더니즘 혹은 그 이후 시대, 즉,아방가르드 에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본 원칙하에 아방가르드는 4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던 것이다. 이 후로 예술은 자연의 현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예술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보아도 무관한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을 아방가르드는 수용하고 촉진시켰으며, 과거의 전통을 매장시켜 결국 예술의 근원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인 의식의 일차적인 모소속감과, 반 순응주의로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들인 무소속, 고립, 계급, 탈락, 방랑 등의 단절을 재현·강화한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하며,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한다. 그리고는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단절을 통한 자기 고립만이 목적이 아니라 원래의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 단절은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을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 의해 실질적인 단절이 가지고 온 것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까지 하게 하는 것이고, 이는 분노로써 삶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를 형성하고 삶을 하나의 문제거리로 보게 만들게 하였다. 끊임없는 반항은 도덕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항의 미학은 결국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다.

 넷째,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과 가치의 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즉, 선과 악, 미의 기준은 다다이즘에 따르면 상대적 개념이거나 단순한 언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느끼는 허무주의는 바로 절대적인 예술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 예술,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예술, 바로 예술의 자유를 그리고 있는 것이며, 유토피아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적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예술을 절정의 상태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의 꿈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현실에 대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보이지만 결코 미래에 대한 빈관론을 보여주고 있지 않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그 적극적이고도 재생적인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미를 향한 힘이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미래 지향적인 아방가르드 인데 미래란 말은 아방가르드의 선언문이나 작가들의 말에서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미래에서 모든 것을 기다리는 아방가르드는 그 미래성 때문에 폭동의 정당성을 획득 할 수 있으며, 그 비현재성 때문에 현재의 모욕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본질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며 ,작가는 그것의 성공을 불수도 ,아니면 영원히 산다 할지라도 그 성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미래로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2. 다다이즘

 

 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 해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 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급기야 전쟁이전의 인류를 찬양하고 보조하려 했던 그 모든 문명의 결과와 정신을 부정하는 형상이 싹텄다.

 그것이 다름 아닌 다다(dada)였던 것이다. 다다라는 명칭은 1916년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그룹이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중축한 화랑을 위해 시인인 트리스탄 짜라가 선택한 것이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프랑스어로'목마'또는 '장난감 말'이란 뜻을 지닌 말이고 독일어로는 출산의 기쁨, 유모차, 바보스런 순진함의 의미를 지녔다. 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온 유럽을 급속히 전염시켰고 결국 현대미술에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 되었건 결국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보조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아주 나쁜 문명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도록 한 것이다. 다다는 미래주의(fururism:Italy)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가학기술을 찬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긍정한 반면 다다는 정쟁을 반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라고 하며 격렬히 반대 했다, 다다는 이이성과 합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지향했으며 부정과 파괴, 다시 말해 '반 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작업 태도를 보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었고 오브제(object)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다다이즘 발생배경 1914년에서 시작하여 1918까지 계속되는 전쟁은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붕괴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다는 세계대전의 불안감이 인류의 심리를 지배하면서 그 이전의 문명과 사회체제를 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에 의해 현대 문명이 약속 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세계 제1차 대전의 결과 과 예술언어의 성격을 변화 시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종교,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들은 유럽 문명국들이 앞장선 대랑 학살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정 되었으며,정치인과 군인뿐만 아니라 지성인과 예술인까지도 점차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감각 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기성의 것과 전통을 거부하는 다다가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다다이스트들과 당시의 예술가들의 눈에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이미 파멸 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 과학, 정치, 등 모든 것이 이제는 다른 기반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다다이스트 중에 슈비스터라는 작가가 잇는데 그는 시와 조형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사람인데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메르츠 바우'라는 것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만든 기중기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쥬의 선구적 예이다. 콜라쥬는 다다의 유력한 무기로서 일찍이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슈비스터는 폐품을 이용한 정크 아트를 한 작가이기도 했다. 퀠른에서는 에른스트와 바르겔트가 활약했다. 바르켈트는 잡지'선풍기'를 창간 하였고 아상 블라쥬 작업을 했다.에른스트의 기법은 콜라쥬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쥬전은 이제까지의 회화 개념을 바꿔 놓았다. 그는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 하였는데 프로타쥬 기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거의 큰 차이가 없는 종이 한 장차라고 할 수 있었다.

 다다이즘은 제2차 새계대전 후에'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어 전후 고조되던 기계문명 ,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 생겨났으며 대표적 작가는 리히텐 슈타인,쟝 팅겔리,올덴버그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초반에 다다는 대중적인 의식에 대한 조직화된 공격이나 타락한 사회 예술적 가치의 단호한 공격수로서의 효용성을 상실 하게된다. 다다이스틀의 난동이나 도발적인 해프닝도 표준적인 일들로 간주되었고 충격적인 모든 일들이 점차 내 성화 된 것이다.

 

 3. 레디메이드

 

 레이메이드(ready-made)가 예술품인가에 대한 해답은 첫 레디메이드 이후 10년이 지난 1923년에 다름 아닌 마르셀 뒤샹 자신이 다음과 같이 자문하였을 때 분명 간접적으로 제시되었다; "예술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상업적으로 생산된 대량의 도구 중에서 임의로 선택된'이미 만들어진' 오브제의 역사는 1913년에 시작되었다. 뒤샹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 하나를 올려놓고 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후 그는 (시청의 바자회에서) 병 건조대 하나, 눈삽 등등을 샀다. 이러한 잡다한 물건들의 수집은 신중하였으며 총 40개정도로 한정되었고 '레디메이드' 브랜드를 달고 그렇게 작품으로 인정되었다. 레디메이드의 문제는 물론 그것이 취미-좋건 나쁘건-와 상관없이 그 어떤 심미적인 동기도 없이 제멋대로 임의적으로, '무료'로 얻어졌다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오브제들이 예술품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1927년 뉴욕의 독립 예술가 협회(주)R.Mutt라고 서명된 전시 오브제,<샘(Fountain)>이라는 작품명의 소변기를 받았을 때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레디메이드, 뒤샹의 '작품'은 거절당했고, 거세된 이 스캔들은 차후에 발표된 사진으로 인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샘>이 가진 모순점은, 한편으로는 분명히 발생한 일도 아닌 한 사건에 둘러싸여진 어떤 비밀스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자 티에리 드 뒤브(Thierrt de Duve)0)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계 안에서 그 반향, 그 대단한 여파 사이의 불균형 속에 존재한다.

 몇몇 사람들이 모던예술의 시조처럼 여기는 이 행위를 거점으로 다양하고 상반적인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도발 ,장난 ,유머 ,혹은 루머 적 표현이나 ,체제·전통·미의 숭배에 대한 다다 적 함정은 아닐까? 아마도 그 전부일 것이다. 이미 그 '샘-소변기'에 대한 표명된-뒤샹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아무거나 주어 삼키게" 할 수 있다는 증거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결론적으로 오늘날에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사유는 ,여하튼 이 같은 행위가 특히 동시대 예술의 위기라는 상황 안에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얽매이는 보편적인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허용한단 것에 있다. 뒤샹은 이젤 위의 이차원적 그림에 대하여 '망막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예술 영역에서 상업적·수공업적인 오브제가 출현한 것은 그것이 서명되었건 아니건, 인위적이건 원상태로 놓여 졌던 간에 일반적인 심미적 지각을 혼란시킨 것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오랜 세기 동안 지켜오던 예술 재현 체계와 결별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재현 체계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제는 전통적인 예술의 정의에 대한 문제가 부상될 것이다. 레디메이드는 어쩌면 연금술에서와 같이 단숨에 예술품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대열에 끼지 못한다. 다만 사회체제로 하여금 매번 적절한 해명을 찾아내도록 강요하며, 예술가와 예술의 역할에 대한 해묵은 개념에 견주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보다는 덜 불경한, 다다적 제스처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Ⅳ.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은 modernism의 토대위에서 그 한계를 비판하며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지 모더니즘의 아류라거나, 반대로 이것을 출현이 너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살펴보기에 앞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간략하게 비교해보면 예를 들어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놓여 있다. 그 사과는 빨갛고 잘 익은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한 면을 보면 벌레가 먹고 썩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빨갛고 잘 익은 부분을 취하는 것이다. 즉, 이분법적으로 흑과 백, 선과 악 이런식 으로 규정짓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빨갛고 잘 익은 부분  뿐만 아니라 벌레가 먹고 썩은 부분 까지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첫 번째 특징은 불확정성(indeterminacy)이다. 불확정성이란 현대문화의 여러 가지 특성들-에매모호성,불연속성,임의성,반역,곡해,무작위,해체,변용-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분열함을 거부하지 마록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는 절대성이란 없으며 삶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단편화(framentation)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이 어떤 질서나 통합에 대한 동경과 향수로 가득한 채 그것들의 회복을 위해 단편화의 수법을 사용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단편화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세 번째는 탈 정전화(decanonization)현상이다. 정전(正典)이라 함은 이제껏 고전이라고 모셔져져왔고, 혹은 보편적 가치의 구현물 처럼 생각되어온 것들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런 것들이 한낱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거나 서구 중심주의, 엘리트주의, 남성 중심주의의 표상이라며 비판한다. 이러한, 탈정전화는 필연적으로 대중주의를 탄생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위 고급문화나 엘리트 주의를 거부하고 대중 속에 위치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는 추리소설, 공상과학소설, 여성문학등이 등장하고 미술에서도 코카콜라병이나, 슈퍼맨의 만화를 이용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들이 높이 평가 받게 된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우선 진보적이다.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반성하고, 한 계층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을 거부한다. 대중과 유리되는 예술을 지향하며 ,대중에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한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현대에서의 다양하고 복잡한,그리고 파편화된 삶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그대로 보여 준다'는 의미는 realism의 재현(再現)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재현 자체 속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며, 좋은 형식이 주는 기쁨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비정치 적, 비 역사적인성격을 가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치는 관심밖에 있으며, 역사는 불연속 단절로서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또한, 그들은 예술에 대한 일체의 가치기준을 거부한다. 예술은 가치판단이나 가치 지향적 요소가 개입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신 식민지적 간접재배의 교묘한 이론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가치 지향적 요소가 제거된 예술품은 자본주의의 상품유통에 편입되어 상품생산과 예술 창작 행위가 동일시되며 그런 맥락에서 대중주의는 예술의 대중화라기보다는 대중을 소비자 대중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다국적 자본이 예술의 영역을 장악하여 신식민지의 문화적 침략에 있어서 이용당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가 하는 의문을 제가 하는 견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탈 근대주의라고 할 때 서구사회는 근대의 과정을 오랫동안 거치고 나서야 탁 근대주의가 형성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근대'의 개념조차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 즉 근대적인 것과 전 근대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탈 근대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시가 상조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히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전 단계의 문학들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 속에서 출발했으며, 고급예술이나 한 계급, 계층만을 상대로 하는 것을 지양하고 대중 속에 위치하는 예술을 추구함도 바람직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수용되든 어떤 방향으로 진전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처럼 이미 확정된 의미를 지닌 예술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형성적 개념이고 불확정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Ⅴ. 맺음말

 

 이렇게 대략적으로나마 미학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예술사학자이며 미학자인 삐에르 프랑카스텔(pierre Francastel,1900~19070)은 그의 저서《회화와 사회(peinture et 내챠été)》에서 인간의 모험, 특히 예술 영역 안에서의 인간의 모험에 대해 신뢰하고 있음을 표명하였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회 안에서 특별한 부류를 형성한다. 그들은 어떤 가능성과 그와 비슷한 것에 대한 욕구를 직접적으로 감각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어제의 그것과 별반 닮아있지 않으며 또한 미학은 최근 2세기 반의 역사 속에서 그 방법과 대상에 집중할 만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지난 30년 동안의 동시대 예술은 프랑카스텔이 예상했던 예술 창조와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였다.20세기 말의 현재 예술을 르네상스로 시작해서 인상주의를 통과 하여 입체파와 같은 선상으로 연장된 진전과정 안에 기입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아무리 예술창조의 다양한 현상을 포괄 하는 위대한 미학학설도 요즘에 와서는 낡아빠진 이론일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론이 되어버렸다. 후기 산업 사회 안에서의 문화적·예술적 활동의 위상과 또 그것이 가회체제와 국가·예술시장·미디어와 맺고 있는 복합적인 관계들은,18세기에 가까스로 얻게 된 심미적 자율성이라는 사고 자체를 더욱 역설적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심미적 경험을 차별화할 수 있는 취미판단을 조장하는 것보다는 이익을 고무하고 교환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우선적으로 소비와 커뮤니케이션으로 편중한 문화적 논리가 점차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 안에서 지난 역사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을 기대하고 있는 ,우리가"동시대 예술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탈적인 예술과 때로 그 자체가 이탈된 예술 이 아마도 겪고 있을 합법성의 부재 앞에서 예술계와 관중이 느끼는 불안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지고 예술의 내재된 죽음이나 그로 인한 미학의 소멸을 도출해내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일 것이다. 예술의 미래는 끊임없이 외부 세계에 행사하는 인간의 능력에 달렸다고 말하는 삐에르 프랑카스텔의 낙천적인 견해에 발휘하는 예술가들이 능력을 믿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카스텔이 생각 하는 것처럼 만약 예술품이 집단적인 커뮤티케이션을 요할 뿐만 아니라 숨겨진 관례 또한 필요로 한다면 심미적 성찰은 언제나,때론 난해하고 빈번이 말이 없는 그리고 언제나 신비한 예술품과 간객 사이에 가로놓인 피할 수 없는 통로 가 될 것이다.

 

 

 

*참고 문헌*

·오병남, 《미학 강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김웅권, 《미학이란 무엇인가》, 동문사2003

·임 염,  《동시대 미학》, 서광사 2003

 

 

순수미술학과 20024329 이 지 희

0 W.Tatarkiewica, Vol.I,p.26.

0 아날로곤(analogon);유사상(類似像),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그 대상

이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이 아날로곤 때문이며,바움가르텐은 미학을 논리학과 대응되

유사이성(analogon rationis)의 학문으로 보았다.

0 (1874~1945),독일 철학자이며 상징적 형식 철학의 창시자.

0 예술 사학자,예술 평론가.《회화 명목설(nominalisation pictural)》(1984),

《레디메이드의 반향(Résonance 여 readymade)》(1989)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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