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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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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꿀뚝 스크랩 성류굴 이야기
으뜸빛 추천 0 조회 6 13.02.16 06: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성류굴(聖留窟)
별 칭 :  선유굴(仙遊窟), 탱천굴, 장천굴(掌天窟)
소재지역 :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

별칭 설명
- 장천굴(掌天窟)
1) 보천은 늘 신령한 계곡의 물을 떠서 마셨다. 만년에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 유사강 밖에 이르러 울진국 장천굴에 머물렀다. (보천은) 아침저녁으로 수구다라니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굴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제가 굴의 신이 된지 2천 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를 들었습니다. 청컨대 보살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보살계를 받은 다음 날 굴은 또한 형체도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21일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서 다시 50년간 수도를 하였다.

2) 보질도태자는 언제나 계곡의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육신이 공중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 후)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 도를 닦았다.

- 성류굴(聖留窟)
이곡(李穀: 1298~1351)의 「관동유기(關東遊記)」에 ‘성류굴’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성류굴’이라 하면서도 옛날에는 ‘탱천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동굴의 최초 이름은 ‘장천굴’로 통일신라 때(8세기 전후)부터 불리어 왔으며, 늦어도 고려 시대 말(14세기 초)부터는 ‘성류굴’로 불린 것 같다. 그리고 ‘탱천굴’은 한자로 보아 장천굴의 장(掌)자를 탱(撑)자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선유굴(仙遊屈)
‘선유굴’은 경치가 우아하여 신선(仙)들이 놀던(遊) 곳이라 하여 불렸으며, ‘성류굴’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부근에 있던 성류사란 절이 소실되자 그 절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유래되어 성불(聖佛)이 머문(留) 곳이라는 뜻이라 하나, 이미 고려 말에 성류굴이라는 명칭이 나오므로 신빙성이 없다.

경관연혁
- 성류굴(聖留窟)
1963년 5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으며 1966년 4월 2일 군유재산을 취득하였다. 1967년 3월 3일 동굴을 공개하고 민간 위탁 관리를 했다. 1976년 1월 1일부터 울진군이 직영 관리를 하고, 1977년 6월 11일에 울진군 성류굴 관리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사실 성류굴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굴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보아 그전부터 지역에서는 이 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굴 내부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의 이곡(李穀)은 「관동유기(關東遊記)」에서 “좌?우측이 더욱 기이하여 혹은 깃발 같기도 하고 혹은 부처 같기도 하다. 수십 보를 가면 돌들이 더욱 기괴하고 그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더욱 많다. 그 깃발 같고 부처 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크다. 또 4, 5보를 더 가면 불상(佛像)같은 자도 있고, 고승(高僧)같은 자도 있다. 또 못 물이 있는데 매우 맑고 넓이가 두어 묘(畝)는 될 만하며......”라고 했다.
이 동굴은 선유산 북서쪽에 있어 입구(해발 약 20m)에서 북동쪽으로 발달해 있으며, 주굴의 길이는 약 330m, 지굴의 길이는 약 540m로 총연장은 약 870m로 이중 약 270m를 개방하고 있다.
성류굴은 전체적으로 수평 동굴이고 동굴 내 여러 개의 다양한 크기의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굴은 석회암이 순수한 물에 녹아 생긴 것이 아니라, 지하수에 녹아있는 산(酸)에 의하여 용식작용이 일어난 석회동굴(石灰洞窟)로 생성 시기는 2억 5천만 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굴 내에는 종유석,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 다양한 생성물 덕분에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어 ‘지하금강’이라고 불린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동굴동물로는 박쥐, 곤충류 등 10강 24목 43과 49속 54종이 서식하고 있다. 2007년 한국동굴연구소의 조사에서 국내 최초로 수중구간이 약 85m 발견되었는데, 대형의 종유석, 석순 등의 동굴생성물이 물속에 잠겨 있으며, 이는 과거 빙하기 동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 진동굴성 쥐며느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성류굴주변의 암석이 하부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 6천만 년~4억 7천만 년 전) 동안에 퇴적된 것이라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명소
- 토착신앙소(土着信仰所)
성류굴은 지역 토착신의 하나인 굴신의 개념으로 중시되었다. 노중국, 1999,『고대 울진의 역사』「한국고대사회와 울진지방 3편」에서 ‘굴신은 울진지역의 토착신으로서 중요한 제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울진지방에서는 우유국 아래 성류굴 지역을 신성지역으로 여기고 지역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제의 행사에는 장천굴의 굴신을 모셔다가 신좌(神坐)에 두고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즉 장천굴의 굴신은 고대 울진지역에서 대표적으로 신앙된 토속적인 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라고 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옛날부터 지역민들은 성류굴을 신성시한 제의(祭儀)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류제향이다. 울진군의 오래된 축제인 성류문화제의 경우 행사의 시작은 성류굴 앞에서 올리는 성류제향이다.
- 지하금강
성류굴은 석순과 종유석이 아름답게 발달하여 있다. 동굴 안에 형성된 못(池)과 어우러져 마치 ‘금강산을 보는 듯하다.’라고 하여 ‘지하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 단애청류(斷崖淸流)
깎아지른 절벽과 성류굴 앞을 휘돌아가는 물의 풍광은 한 폭의 한국화다. 절벽에서 자라는 측백나무, 분재 같은 크고 작은 나무들과 풀은 절벽의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졌다. 그 아래는 응당 있어야 할 돌아 흐르는 물과 모래톱이 풍경의 완성도를 높인다. 화가에게는 절로 화심(畵心)을 돋우고, 문인에게는 어찌 시 한 수 읊어지지 않겠는가. 조선 3대 화가요,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인 겸재(謙齋) 정선(鄭?)도 이곳에 와서 그림을 남겼다. 그가 1734년에 그린 성류굴도(聖留屈圖)는 절벽을 극명하게 강조하여 표현한 걸작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봄날 성류굴 앞에서 절벽과 흐르는 물을 보면서 읊은 시가 있다.

“굴 앞 봄풀은 이끼 낀 돌 위에서 일렁이고 바위산 꽃들은 빛나게 떨어진다.
맑고 그윽한 맛 더욱 새롭고 밤 깊은데 인기척에 놀란 학이 집 속에서 날아가네
(窟前春草?苔磯 山後巖花暎落暉 更有一般淸意味 夜深巢鶴警人飛)”

또 조선 시대 울진의 문인으로 평생, 이 고장에 살면서 지역의 여러 명소를 시문으로 남긴 청파(靑坡) 장만시(張萬始)의 ‘성류굴(聖留窟)’이란 시에

“속이 뚫린 굴이 봉래(蓬萊)로 접하는데
건곤 일월을 뱃속에 감추었네
석종의 만고 사연을 묻지마오
선인이 머물다 간 흔적은 이미 창망하네”

라고 읊었다.
- 대산낙조(對山落照)
서쪽으로 구산리와 수곡리의 뒷산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물은 그 산 어디쯤 시작되어 이곳으로 온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처럼 구름은 무심히 산 너머에서 올라온다(雲無心而出岫).
또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이란 시에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고, 단풍 숲의 저녁 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다(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風林晩).”라고 했다.



관련인물
- 보천태자, 원효대사,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 김시습(金時習),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청파(靑坡) 장만시(張萬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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