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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역사문화연구원장 이 해준 박사 편)
1. 가계와 인맥
林得義는 淸難功臣 녹훈과 함께 平城君에 봉해져 평택임씨 平城君 派始祖이며 林得義 이전에도
선대인 錦湖 林亨秀, 松坡 林植, 觀海 林檜의 三淑姪이 行義 志節로 칭송을 받았고, 송파 임식의
경우는 아들 임득의 공적으로 인하여 자손들(八子九孫) 17명이 공신녹훈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며 이로 인하여 평택임씨는 충절의 가문으로 유명해졌다.
평택임씨 평성군파가 홍성 결성에 터전을 마련하는 계기는 부친인 林 植이 청양 화성에 은거 하면서
부터이다. 祖父 貞秀(1516-1583)가 청양현감을 역임하여 靑陽公으로 불려지게 되며 해미현감 해주
최씨 崔霽雲의 무남독녀를 맛며느리(林植의 부인)로 맞아 손자 得仁 과 得義를 낳고 사별하여 현재
까지 청양화성 임씨 문중에서 최씨 내외 산소를 모시고 시제를 지낸다. 林貞秀는 林畯(? - 1548)의
3자로 1546년(명종 1) 생원시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 청양현감을 역임하고 청양에 선정비가 있다.
후에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임정수의 형이 바로 錦湖公 林亨秀(1514~1547)
이며 자를 士遂. 호는 錦湖라 하였고, 북병사 畯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1535년 문과에 급제하여 賜暇 讀書한 뒤 수찬, 회령판관, 전한 등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되었으나
1545년 을사사화 때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1년 후 파직되고 1547년(명종 2)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곧 사사되었다.
생전에 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李滉 ․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錦湖遺稿』가 전한다.
임정수의 장자이자, 林得義의 부친인 松坡 林植(1539-1589)은 자를 叔茂, 호를 松坡라 하였는데,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율곡 이이와 함께 17인이 동방급제하고 1572년(선조 5)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평안도사, 형조정랑, 영변판관, 구성부사, 강계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식은 44세 되던 1582년(선조 15) 정월에 충청도 청양관아의 부친을 찾아 뵈었다 하며, 50세 되던
1588년(선조 21) 4월 간신배의 음해로 강계부사를 그만두고 홍성군 결성면 교황리로 내려와
浮海亨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둔하며, 자호를 송파거사라 하고 시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해 조정에서 참의로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에 51세로 부해정에서 별세하였다.
2자인 平城君 林得義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릉부원군에 봉해졌다. 나주 금강사와
등림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松坡集』이 있으며(송파집서, 1846 洪敬謨 찬 : 중간서 1897 金福漢 찬), 증손 再喬
가 찬한 송파공 행적(1679년), 금석문으로 평릉 부원군 송파공 임식의 묘표(1764년, 兪彦述 찬),
송파공 임식의 신도비(1896년, 성대영 찬, 조희일서, 박봉빈 전)가 있다. 묘소는 청양군 화성면
덕명리에 있으며, 신도비와 재실인 山泉齋가 있고 덕명의 숙을 세워 문중과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존재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충절과 애국정신 교육을 하여 그곳 임씨 문중에서만 8명의 독립유공
자를 배출시키는 산실이 되었다.
구전되는 바로는 송파공의 깊은 문학과 높은 덕행으로 당대의 사표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이 명당으로 인하여 사후 부원군의 증작을 받고 아들과 손자(八子九孫)등 17명이 모두 淸難
原從功臣의 녹훈을 받아 국내가 떠들썩한 대문호가 되었다고 한다.
2. 충절 행적
林 得義(1558~1612)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子房, 본관은 평택이고, 北兵使 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랑 貞秀이고, 아버지는 부사 植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군수 崔 霽雲의 딸)이며
평택임씨 평성군파의 파조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육군으로 활약하였음을 『난중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94. 9. 27일조). 그러나 林 得義가 역사에서 크게 들어나는 것은 1596년(선조 29) 7월
李 夢鶴(?~1596)의 반란군에 의해 홍주성이 포위되었을 때 난을 평정한 공이다.
이 몽학은 임진왜란으로 온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민심이 뒤숭숭한 때에 홍산에서 적도
들을 규합하여 인접한 임천, 정산, 청양, 대흥 등을 모두 함락하고 홍주성을 포위하였다.
李 夢鶴은 왕족의 서얼출신으로 韓 絢등과 함께 홍산 무량사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조련을 실시하
였으며 同甲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세력을 규합하고 1596년 7월
6일 밤 홍산 관아를 습격하여 홍산 현감 尹 英賢을 사로잡았으며, 임천과 주변 군현을 함락시키고
기세가 오른 반란군은 7월 10일 홍주성까지 공격하였다.
반란군들의 기세가 등등한 반면 홍주목사 홍가신은 성을 거점으로 적과 대치하고 원군만을 기다
리면서 홍주 목사는 홍주 출신 무장 林 得義를 속히 불렀다.
林 得義는 홍주성의 위급함을 보고 즉시 의병 800여명을 모아 칼을 휘두르며 홍주성에 진입
하여 朴 名賢을 추천하고 辛 景行, 홍주목사와 함께 전략에 임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平城君은 원래 지략과 용력이 뛰어났고 음양 이수에도 밝아 며칠 안에 찬비가 내릴 것을 알고
성밖의 草幕들을 모두 불화살로 태워 적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며칠 후 찬비가 내리니 적들은 의지
할 곳이 없자 밤에 도주하기 시작하였고 남포현감 박 동선은 변란 소식을 접하고 수사 崔 湖와
군사를 이끌고 원군으로 합세하여 전세가 역전되는 틈을 타 林 得義와 朴 名賢은 성문을 열고
적들을 추격하여 난을 진압 하였다 한다.
이때 백성들은 평성군을 보고 신이라 일컬었다 하며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몽학 무리들은
어둠을 틈타 청양까지 도망하면서 반란의 실패를 직감한 부하 金 慶昌, 林 憶明, 太 斥등 3인이
이 몽학의 목을 베어 가져 와 항복함으로써 이 몽학의 난은 끝이 났다.
林 得義는 이렇게 이 몽학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1604년 淸難 五功臣으로 책록되고 平城君에
봉해졌다. 『선조실록』37년(1604) 10월 29일(을해조)에 보면 당시의 淸難功臣 敎書에서
洪 可臣(1등), 朴 名賢과 崔 湖(2등)에 이어 辛 景行과 함께 三等에 봉해져 영정을 그리게 하고
관작을 높이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자급을 높이도록 명하였다. 또한 적장은 세습하여 녹봉을
받도록 조처하고,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이후 충청도 수군우후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12년에 서거하자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자일리 축성령(현 의정부시)에 사패지를 하사하고
예장하였다. 묘소는 인조 대에 홍성 서부 판교 청룡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林 得義가 청난공신에 녹훈되면서 그의 형제와 조카들까지 17명의 八子 九孫이 청난 원종
공신에 녹훈되어 전국에 이름을 날렸으며 가계의 공신 녹훈은 다음과 같다.
<林 得義 가계의 공신 녹훈표>
巑(청난원종3등)
집(청난원종3)
전(청난원종3)
우(청난원종3)
억(청난원종3)
崙(청난원종3)
岏(청난원종3)
岍(청난원종3)
奉南(청난원종3)
3. 사후 추숭과 포상
林 得義에 대한 국가의 포상은 선조 34년(1601) 4월 24일(신묘) 영의정 이항복 등이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洪州城 討逆功臣을 등급별로 기록하여 보고하기를 1등은 홍주 목사 洪 可臣이고,
2등은 朴 名賢, 수사 崔 湖이며, 3등은 병사 李 時言, 순안어사(巡按御史) 李 時發, 종사관 辛 景行,
파총 전 군수 林 得義, 천총 전 군수 朴 震男, 파총 전 군수 원지, 남포 현감 朴 東善, 보령 현감
黃 應星, 파총 전 현감 李 用沈, 생원 李 翼賓 등으로 보고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때에 논상이 완결되지 못하고 지연되다가 논공행상이 완료된 것은 선조 37년(1604)에
이르러서였고 공신의 범위와 등급도 재조정되었다. 이몽학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홍가신,
박명현, 최호, 신경행, 임득의 5인을 淸難 功臣으로 공신록에 기록하였다.
● 淸難功臣 敎書 내용(선조실록 37년 10월 29일(을해)
뒤엉킨 뿌리는 예리한 칼로 잘라서 이미 맑게 쓸어내는 공훈을 세웠고 상을 주어 면려하는 것은
공 있는 자를 기다리는 것이어서 포장하는 법전을 거행한다. 보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는다
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지난번 국운이 매우 어려웠을 적에 통분하게도 역적이 갑자기 일어났다.
거짓 문무 관원을 서임하여 從事하게 함으로써 은밀히 조아(爪牙)를 만들고 僧將과 俗將을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羽翼을 이루었다.
흉봉이 돌격하여옴에 성을 굳게 지킬 자 누구이겠는가. 사나운 형세가 치열함에 속수무책으로 방관
하는 이가 연이었다. 이런 때 진실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아니면 누가 광릉(廣陵)의 사나움
을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당상에서 군대를 운용함에 승산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겠거니 흉중에
갑병(甲兵)이 있는데 어떻게 소범(小范)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이미 험요지에 응거하여 군대를
면려하니 풍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왔다. 백의로 분발하여 위급함을 구제하니 의기가 늠연하였고,
수사를 이끌고 응원하니 성세(聲勢)가 충천하였다. 연막(蓮幕)의 요속(僚屬)이 협동하였고 유영(柳營)의 편비(褊裨)가 보좌하였다.
우레 같은 위엄으로 앉아서 개미떼처럼 흩어지게 만들었고 군병의 날램으로 곧바로 사나운 고래를
베었다. 황지(潢池)의 나쁜 기운이 걷히니 의심하던 자들이 스스로 안정되었고 회채(淮蔡)의 소굴
을 탕척하니 강역이 평안하였다. 성대한 공훈이 이러하니 그 공훈을 높여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다.
궁시(弓矢)를 내리고 노창(鹵鬯)을 하사하는 것은 과거의 법전을 상고함에 증거가 있으니, 종정
(鐘鼎)에 새기고 기상(旂常)에 쓰는 것을 오늘날에 있어 늦출 수 있겠는가. 길일을 택하여 예식을
거행하고 策命을 내려 선양하는 바이다.
이에 홍가신을 1등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세 자급 초천(超遷)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세 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甥姪)과 여서(女壻)를 두 자급 초천
하라. 그리고 적장(嫡長)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하며 영원히 사유(赦宥)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伴倘) 10인, 노비 30구, 구사(丘史) 7명, 전지 1백 50결, 銀子 10냥,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
朴 名賢과 崔 湖를 2등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두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라. 그리고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하며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辛 景行과 林 得義를 3등에 봉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고 아들이 없으면 생질․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하게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하며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게 하라.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아, 모습을 그려 기린각(麒麟閣)에 거니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하게 되었고 산하대려(山河帶礪)
의 맹세를 이루었으니 영원토록 그 훈업을 보존하게 되리라. 때문에 교시하노니 잘 알아둘 것이다.
이때에 임 득의는 奮忠出氣 淸難功臣 折衝將軍 行 忠淸道 虞侯의 교지를 받는다.
임 득의는 1605년4월16일(선조 38년) 임진왜란 참전의 공으로 宣武 原從功臣 1등을 받고 1607년
임금님 피난길에 호종한 공으로 扈聖 原從功臣 1등에 봉해지면서 3공신으로 유명해졌다. 한편
사후인 1647년(인조 25)에 아들 林전이 沈器遠의 역모를 사전에 제거한 공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지 훈련원사의 추증을 받는다.
4. 관련 유적과 유물
林 得義 관련유적으로는 묘역이 1995년 충남도 문화재 제 340호로 지정되었고 정충사 목조건물이
2009년 충남도 문화재 제 401호로 지정되고 영정이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 203호로 지정되었
으며 정충사 내 신주함이 지방 동산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 입구에 홍주
청난사와 홍양청난비 가 있다.
1) 林得義 墓所
林 得義(1558~1612) 묘소는 원래 광해군 4년(1612)에 하사받은 사패지인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자일리 축성령(현 의정부시)에 예장으로 모셨으나 그 후 인조대(1647년)에 왕명으로 지금의 홍성
에 다시 사패지를 하사받아 서부면 판교리 산 95-1 청룡산 하에 묘를 천장하고 정충사와 숭모재
를 건립하여 平城君의 부조묘도 내린 것으로 각종 기록에 남아있다. 묘소에는 1786년(정조 10)
7대손 林永中이 건립한 묘비가 있다.
2) 林得義 神道碑
정충사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으며 정․측면 1칸의 비각으로 후손 林宗鎬의 주도로
1917년 건립되고 비문은 志山 金 福漢이 찬하고, 글씨는 尹 用求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