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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소혈황제 유비 이야기
유비 이야기
중국 삼국시대 촉한(혹은 계한)의 초대 황제.
하지만 당시 본인은 새 황실의 개창이 아닌 400년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초대 황제가 아니라 한나라의 제30대 황제다.
그가 세운 촉한은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 때문에 한이라고 국가 명칭을 공표하였지만, 삼국시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오늘날까지 전한과 후한을 따로 구분하는 것처럼 파촉 지방에 할거한 한나라라는 뜻에서 촉한이라고 불린다.
당대 역사서를 보면 촉한 사람들도 한고제와 광무제의 한을 구분해서 전한과 후한이라고 했는데, 이는 유비가 후한 황족이 아니라 전한 황족의 후손이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촉한은 스스로를 전한과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나라'란 뜻에서 계한(季漢)이라고 칭했다. 실제로 후대에 나타난 한나라 황실은 유비와 비교하면 혈통적으로 많이 딸리거나 사칭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술하겠지만 사실상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2][3]
유비는 밑바닥부터 역경을 딛고 올라서서
난세의 흐름 자체를 바꿔버렸으며, 끝내 삼국 정립을 이끌어내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보통 다른 시대라면 조조나 원소 같은
강력한 군벌이 가뿐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 왕조를 여는 혼란기 정도였을 후한 말기를(다른 시대의 주원장,수문제,이세민을 생각하면 된다.) 수많은 창작과 민담의 무대로 만든 사람은 바로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낸 유비였다.
삼국지 이야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황건적의 난 시기에 나타난 수많은 군웅 중에서 미약한 기반으로 시작했으며[4], 그중에서 살아 있을 때 황제의 자리에 올라 후계자에게 대업을 전한 인물은 유비 단 하나뿐이다.
유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주군에서 복무했고
할아버지가 효렴으로 동군범령을 지내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나름대로 출세한 집안에 속했지만[5], 아버지 유홍을 일찍 잃고는 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조부는 현령, 부친은 지방 관리직을 지냈다고
유비가 부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서 나왔듯이 유비는 그 아버지를 어릴 적부터 잃고 가세가 영락한 상황이고 집안의 가장이 일찍 죽어 자식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건 오늘날에도 종종 있는 일이다.
씀씀이는 그대로인데 가장이 죽어
갑작스레 수입이 끊기면 가세가 빠르게 기우는 법이다. 거기에 유비가 노식에게 학문을 배울 때 말과 음악, 개,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금으로 치면 명품, 스포츠 카 등을 좋아했다는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것들에 관심은 많으나 정작 본인이 구입하지는 못하는 안습한 상황은 넘치고 넘쳤는데 이게 유비가 부유했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조조의 경우 황제를 옹립하고 있었기에
대의명분상 황제를 칭할 수 없었고 조비 대에 황권을 강제로 이양받는다. 정작 이게 혼란의 끝을 자랑하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작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6]
기반 자체는 유비보다 훨씬 나았으며,
손권은 3대째로 초창기 군웅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손견이 조조, 유비와 같은 연배이다. 그 외에 '초창기 군웅이면서 황제가 된' 케이스인 원술은 그 시작 기반 자체가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기 때문에 유비와는 비교할 수가 없고, 원술의 칭제는 후대에 와서는 조롱거리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
원소와 조조가 부유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명성을 얻고 일어선 군벌이고, 손견이 중앙 정부에 사관하여 무관으로서 명성을 쌓은 케이스라면 유비는 유협 집단의 전통 하에서 그 기반을 찾을 수 있는 케이스이다.
선주전에 보면 집안 어른들 중 유원기라는 사람이
싹수가 보이는 유비를 친아들처럼 대하고 친아들과 같이 노식 휘하에서 공부시켜주고 학비를 대주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의 부인이 (친척이라지만) 어찌 항상 따로 일가를 꾸린 유비에게 학비를 대줄 수 있겠느냐면서 반발하는 부분이 엄연히 정사인 정사 삼국지에 똑똑히 적혀 나온다.
즉, 유비 자신을 비롯해 친족들이라고
그렇게 여유만만한 집안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초기 유비군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씨 집성촌으로부터 유비가 딱히 도움을 받았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반면 선주전에는 노식 휘하에서
공부할 때부터 꾸준히 유비가 주변 호협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이 유비에게 귀부하고 지역 유지나 호족들과 상관없는 상인 집단인 장세평과 소쌍의 지원을 받아 더 많은 무리를 꾸릴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즉, 유주 인근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던 장세평이나 소쌍의 이런 행위는 장래성이 보이는 유비 무리에게 지원을 해주면서 후한 말 혼란한 시기에 위협적인 도적 무리나 기타 다른 위협에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유비는 반동탁 연합에 참여할 때까지
황건적의 난으로 얻은 벼슬을 독우 매질 사건으로 버리고 여기저기 떠돌았으며, 한번 정착하면 인근 지역의 백성들을 도적들로부터 지키고 그들과 섞여지내며 후하게 덕을 베풀면서 인심을 얻었고, 이 과정에서 지역의 유지와 마찰을 빚어 암살 위협을 겪기도 하는데 당시 유비 집단의 성격이 그만큼 일반 백성들이나 유협에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조상인 유방이 유협 집단을
이끌고 다니면서 세력을 키운 것과 유사한데, 유방은 고향의 지역 관리 소하나 하후영 등과도 친분이 있었고 해당 지역 토박이로서 거병한 반면 초기의 유비는 관우, 장비, 간옹 등의 몇몇 측근들만을 대동하면서 그냥 몇 년간이나 고향을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그만큼 초기 유비군은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오로지 맨주먹으로 집단의 생존과 향후의 기반을 닦기 위에 고군분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7]
당장 당대의 수많은 군벌들
(유표, 유언, 유대, 유요 등)은 물론이고 거기다가 숙적인 조위의 중신 중에서도 한나라 황족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 대업을 이룬 이는 이들 중 거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일어난 유비 1명뿐이라는 것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영웅이였는지를 보여주는 근거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로,
유비는 형주의 잔존 세력들을 모아서 오와의 동맹으로 적벽대전을 설계하여 조조의 천하 통일을 박살냈으며, 한중에서 승리하여 촉한을 삼국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굳건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시에 자신과 한고조 유방을 동일시하여 한 황실의 부흥을 천명하고 황제로서 즉위하는 데 성공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조조가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이루고 죽은 셈. 나이 차이도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러한 유비도 말년에는 이릉대전에 대패를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촉한은 자체 국력의 문제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풀에 큰 치명상을 입었으며,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제갈량의 고군분투 속에서 10년 이상의 시간이 더 소모가 되었다. 무엇보다 관우의 전사로 인해 형주를 잃고 난 뒤, 북벌의 루트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고 만다.
유비가 군웅으로 살아간 평생을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대의명분이다.
당시로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의 나이에도 위험한 전장을 떠돌면서도 황제가 되고 죽는 날까지 이 명분을 더럽히는 행동을 한 적이 없어 인내와 처세술의 교과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명분이나마 한의 황실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역사적으로 그가 반동탁 연합군에 가입한 일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영웅기》에는 영제(靈帝, 재위 168년 ~ 189년) 말 유비는 수도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에서 무리를 모았다가 영제가 죽자, 유비 또한 군을 모아 동탁(董卓) 토벌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조조와 다소간의 친분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주석을 믿는다면 조조는 유비를 곁에서 보며 그 역량을 확인할 충분할
시간이 있었던 셈이다.
연의 또는 연의 이후에 만들어진 창작물에서는
보통 이때부터 조조와 유비가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다만 연의에서 유비는 공손찬과의 친분을 살려 공손찬의 부장으로서 동탁 대항전에 참전했다고 묘사되지만, 공손찬은 동탁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다.[8]
명나라 시대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자 고전인
《삼국지통속연의》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다. 그 사후엔 그의 유지를 받든 제갈량이, 제갈량마저 죽은 이후엔 강유가 주인공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총 120회인데 유비가 죽는 회차가 85회고, 이후 주인공 포지션을 물려받은 제갈량과 강유도 선제(先帝)의 유지를 이유로 북벌을 한 걸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삼국지연의 전체의 진 주인공인 셈이다.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삼국지연의의 이런 설정은
한고조 유방과 유비를 최대한 동일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는데, 유방은 실제로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의 악과 깡, 패기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마인드를 가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타인을 휘두르는 데 유능하지만 자신도 충분히 유능하다는 점에서 유비와 비슷하기도 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부려
천하를 차지하였다는 점도 있었고. 연의에서는 유비를 유방과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그의 한중왕 선언이나 칭제에 큰 카타르시스를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정사에서부터 스스로를
한 고조의 현신같은 이미지메이킹을 했는데, 이는 제갈량과 조식의 논쟁으로도 알수 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또한 '한 고조의 풍모가 있었다'고 인증했다. 이러니 삼국지연의에서 한 고조와 동일시되던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소설 초반에 나오는 황건적에게 대항하는 의병을 조직한 뒤, 대장간에서 쌍검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이후에는 군주가 된 유비가 직접 전쟁터에 나설 일이 없으니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 말지만.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포지션은 '몰락한 황족의 귀공자'다.
그러나 그가 지녔던 황족이란
타이틀로 인하여 그가 얻은 실익은 없었고, 또한 삼국시대에는
유우 등의 그보다 더 유력한 황족도 많았다.
연의에서 유비의 최고의 무기는 눈물로써,
오죽하면 유비냐 울기도 잘한다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천하를 차지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이미지와 정사의 이미지 차이를 망각한 것으로, 실제 정사 삼국지의 유비는 요즘 말로 하면 마피아 보스 출신이라서 오히려 젊은 시절 독우를 두들겨패는 등 성깔 있는 사람이었고, 우는 게 아니라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9]
삼국지의 1세대 군웅할거를 한 군웅 중에서
현세에 후손을 남긴 인물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공교롭게도 3대 군벌인 손권과 자기 부하였던 제갈량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아예 무덤 자체 진위 여부가 논란이 있고
그나마도 도굴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조조나 무덤터가 남아있지만 무덤 자체의 행방이 묘연한 손권과 달리 온전히 무덤이 보존됐다.
이런 면에서는 최후의 승자라고 볼 수도 있다.
가난했던 흙수저라는 타이틀과 함께 황족이라는 고귀한 신분, 황제의 밀명을 받아 조조에게 맞서는 모습, 조조에게 쫒기는 피난길에서도 백성을 챙기는 자애로움, 고난을 겪은 뒤 마침내 한중에서 조조를 꺾어 한중왕에 올라 제3의 한나라인 촉한을 건국하고 인생의 정점에서 의형제인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이릉대전을 일으키나 이윽고 패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의 드라마 같은 인생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귀가 어깨에 닿고 손목이 무릎에 닿는 기이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는 사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외모라고 한다. 정사에서 유비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장은 7척 5촌(172.5cm)[10]에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선주전
유비가 말했다.
'안 됩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
(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
후한서 여포 열전
이후 선주(유비)가 돌아가자 공(조조)은
사람을 풀어 선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게 하였다. 선주는 그러한 사정을 알아채고는 밭에서 파를 뽑으며 하인에게 돕게 하였는데, 파가 단정치 않은 모양을 하고 있던 고로 하인을 몽둥이로 후려팼다. 이를 조조가 듣자 말했다.
'귀 큰 녀석(大耳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화양국지 유선주지
유비에게는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깨우친 것이다.
주군전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제갈량전
즉, 유비가 팔이 길고 귀가 크다는 건 정사에서도 나오는 사실이다. 귀 큰 건 후대에도 대표적인 유비의 아이덴티티였는지, 오죽하면 조선의 용비어천가에서도 유비는 大耳兒로 나온다.[11]
또한 장유와의 일화에 따르면
그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 수염이 없는 건 유비 스스로도 콤플렉스로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12]
다만, 이를 고증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유비가 맏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대부분 충분히 수염을 달고 나온다. 당장 유비의 황제 시절 모습을 그린 고대 삽화에서조차 유비가 수염이 별로 없다고 놀림받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수염이 풍성하다.
그외에 제갈량전을 보면 유비에게 웅자한 자태가 있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유비 현덕'이라는 표기는
일본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국에서 쓰는 건 일본의 영향이다. 한국에 널리 퍼진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13]가 60~70년대 한국에도 번역되어 널리 퍼졌는데 한자로 성 2자+이름 2자가 기본인 일본인답게 유비 현덕, 관우 운장으로 4글자에 맞추어 이름을 풀어 써[14] 표기하는 등의 오류를 저질렀다.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선주,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이런 모습이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삼국지2 ~ 공명전)과 범우사판 삼국지인데, 전자는 일본식으로 4자에 맞춰 표기하고 후자는 대만판의 번역이라 유현덕, 관운장, 관 공(公)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화권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각자 하나씩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한 번에 이름과 자를 같이하며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15]
단적으로 중국의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아예 자막에 이름을 넣고 자는 따로 표기한다. 즉 유비를 소개한다면 <유비 자(字) 현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16]
예컨대 유비를 부를 때는 헌제처럼 윗사람은 유비라고 부르고, 동급인 다른 군주들은 '현덕'이라 부르며, 아랫사람은 유예주, 유좌장군(예주 자사 및 좌장군을 제수 받은 적이 있으므로)등 관직명으로 부르고 현덕공이라고 자에 높임말을 쓰는 것은 오류이다.
그냥 현덕이라고 부르든가(
윗사람 또는 친구), 직책 이름인 유예주 내지는 그냥 유 공(아랫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다. 편지를 쓸 때는 족하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하였다.[17]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요컨대, 이름이야말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친한 사람이라고 함은 친구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등 그야말로 혈연 관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공식적인 문서에는 인물의 이름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그냥 벼슬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꽤 존중해주는 지칭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에서는 좀 다른 부분이다. 김 사장, 김 교수, 하고 부르는 것은 그 호칭을 받는 대상자의 명백한 윗사람이거나 최소한 같은 나이대, 같은 지위에서나 존중하는 표현이지 아랫 사람이 이렇게 부를 경우 굉장한 실례가 된다.
어쨌거나 유비의 이름과 자의 뜻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비의 이름인 비(備)는 첫째, 근신하며 준비한다는 뜻이다. ≪소대예기(小戴禮記)≫에는 "일을 경계해 근심하지 않는 것을 지비(知備)라 한다(事戒不虞曰知備)."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역경(易經)≫<계사(繫辭>에 "역(易)의 글됨이 광대해(우주의 모든 문제를) 그 속에 전부 갖추고 있다(易之爲書也, 廣大悉備)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하다, 모두 갖추고 있다'는 뜻이 있다.
유비의 자(字)는 더 특별하고 무게감도 있다.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는 현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으며, 길러도 주재하지 않는 것을 이르러 현덕이라 이른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간단하게 해석하면 현덕에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첫째,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이불유(生而不有)이다. 즉 자신이 심은 사과라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뜻으로,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둘째,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위이불시(爲而不恃)이다. 즉 내가 한 일이라 해도 자랑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겸허하게 행동하며 과장해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장이부재(長而不宰)이다. 여기서 재(宰)는 주관을, 장(長)은 장년을 뜻하는 말로 권위 있고 존귀한 위치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권한을 이양하고 부여할 줄 안다는 뜻이다.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비(劉備):
본명.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는 부모나 스승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었으며, 평대가 되기에 아군이라면 당연히 쓸 사람이 없고, 오히려 적이 많이 썼다. '유비 놈'이라든지, '네 이놈 유비'라든지. 아니면 이보다도 더 낮춰 불러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했다.
•현덕(玄德):
자. 현덕이라는 그의 자는 도덕경 10장에서 따온 어휘로 여겨지며, 이를 풀이하자면 우주에 드러내지 않은 채 만물을 다루고 변화하게 하는 깊은 도리(대자연의 질서), 묘한 덕 또는 매우 깊은 덕이라는 뜻이다.
•유현덕(劉玄德):
성+자. 딱히 벼슬이 없을 때는 이 호칭이 자주 쓰였다.
•귀 큰 놈(대이아大耳兒/혹은 대이옹大耳翁):
적대 군주가 유비를 욕할 때 부르는 이름 + 여포가 죽기 직전 부른 이름이다.
예를 들어 여포의 유언이 있다.
◦비슷한 별명으로
당나귀같이 귀가 큰 자(기령), 돗자리나 짜던 촌놈[18] 등이 있다.
•유 예주(劉 豫州):
도겸, 조조가 상표하여 예주목을 벼슬로 받았을 때의 호칭.
사실 유비가 자주 있던 소패는 예주 패국 패현으로 추정된다.
•유 황숙(劉 皇叔):
연의에서 헌제와 만난 다음 족보를 뒤져보고 황제의 숙부뻘이라 하여 붙은 호칭이다. 주로 아군 측에서 유비의 혈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쓴다.
•좌장군(左將軍):
유비가 한중왕에 스스로 등극하기 전 조정에서 정식으로 받은 최고 관직은 좌장군이다. 출처는 노숙전, 오서 인용 주석, 관우의 말. 사실 과거나 현재나 직함이 있을 경우 그걸 붙여 호칭하는 게 일반적이라 그 사람의 행적을 조명할 때나 어떠어떠한 지위를 거쳤다고 적는 거지, 그렇게 불렸다는 출처를 표기하라거나, 그것들을 일일이 불렸던 호칭이라고 열거하는 건 의미가 없다.
•한중왕(漢中王):
한중왕에 오른 뒤에 쓰인 이름이다.
•선주(先主):
촉한의 앞선 군주라는 뜻. 정사 삼국지에서 쓰인 호칭이며, 삼국지연의에서도 유비가 황제가 된 후에는 해당 표현이 쓰인다. 성+선주라고 해서 불린 적이 있는 듯하다. 북송 시대의 기록 가운데 삼국지를 소재로 한 연극을 보고 한 농부가 의자를 머리에 쓴 다음 "유 선주 같지 않나?"면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있다.[19]
위의 정통성을 이은
진의 사가인 진수가 촉한을 꽤나 존중했음을 나타내는 칭호다.[20]
유비의 뒤를 이어 촉한의 황제가 된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불린다.
•소열제(昭烈帝):
시호+제(帝)를 붙여서 황제로 취급한 것. 정통성을 인정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는 호칭이다.[21] 물론 시호이므로 생전에 저렇게 불린 적은 없다.
◦소열, 한소열:
帝는 떼고 시호만 부르는 명칭이다. 한국에서 조선 시대 왕들을 부를 때 보통 묘호를 부르듯, 조선 시대에 유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시호인 소열로 부르는 기록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음흉한 놈, 사기꾼, 배신의 달인, 유통수, 당나귀 귀:
촉까들이 종종 쓰는 호칭. 물론 촉까가 아니어도 유비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중 음흉한 놈이란 호칭은 그 유서가 깊다.
•유패왕:
유비 패왕설에서 기인한 명칭, 인터넷 상에서 많이 쓰인다.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
유비군이 기본적으로는 임협의 성격이 강했기에 나오는 말. 은근히 한국 인터넷상에선 많이 쓰인다. 실제로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기반 세력을 탁군 저잣거리의 유협 집단으로 해석한 뒤 도원결의 부분을 그에 대한 2차 창작으로 적어놓았다.
생애
나무위키상세내용 자세한 내용은 유비/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평가
유비/평가 문서를
혈통 논란[편집]
유비/혈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가족 관계
유비의 아내로는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했으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비의 후손은 아래 단락에 나온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 조상님이 거병하기 전에 했던 같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22]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고대에 여성들은 금수저가 아닌 이상 전리품 취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른 이도 아닌 조조의 숙적 유비의 딸이었으니 조조 본인이 분풀이로 취했거나 조순에게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 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유봉에게 좋게 언급한 것인데, 번성의 포위가 풀리기까지는 2달이 걸렸다.[23] 2달이면 지원을 가기에 충분한 기간적 여유가 있었으며, 형주자사와 상용 동쪽 남향군 태수가 위군을 지원했다가 관우에게 토벌당해서 상용 동쪽은 공백지라 지원이 가로막힐 가능성도 없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아 보급 문제도 있던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만다.
내부의 반란이 우려됐으면 유봉이나 맹달 중 한 명은 반란에 대비할 병력만 남기고 남은 한 명이 갔어도 됐다. 애초에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파견한 이유가 상용에서 관우를 언제라도 지원할 것을 염두에 뒀으며, 실제로도 신속히 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배치인데 반란 우려를 핑계로[24] 서로 주도권 싸움이나 해대며 결국 관우와 남형주를 잃었으며, 상용도 결국 빼앗겼으니 후계자 문제 이전에 큰일을 그르친 것만으로 처형당할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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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에 추증한 묘호다.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면서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명, 즉 서한의 창건자 고조, 동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체적으로는 이때 열조의 시호를 받지 않았나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 열조는 조선 인조의 원래 묘호였으나, 더 좋은 묘호를 주기 위해 며칠만에 기각되었다.
[2] 엄밀히 따지면 초대(1대) 주인공이다. 2대 주인공은 제갈량으로 평가받고 있다.
[3] 다만 전체 분량을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해도 제갈량 대는 1세대 대부분이 죽고 (소설적으로 보면) 인기캐릭터들이 적어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제갈량의 고군분투로 요약되는 수준이라, 천하의 온갖 걸물들이 대결하는 구도인 1부, 그리고 1부의 주인공인 유비의 인기가 전반적으로 더 높다. 이밖에도 1부에는 유비 이상 인기를 자랑하는 캐릭터들 (관우, 장비, 조조 등)이 있는 반면 2부는 거의 제갈량의 독무대이다. 제갈량 사후 3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존재감이 낮긴 하지만 제갈량의 후계자이자 촉한의 마지막 병사 강유가 주인공격으로 다루어지는 편이다.
[4] 물론 확실한 세력을 가지기 전에도 유비는 관우와 장비라는 인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고 간옹이나 전예라는 인재들도 보좌하고 있었으니(전예는 유비가 서주에 간 후 북쪽 고향에 남겨둔 노모 때문에 작별했다. 유비로서는 진군과 더불어 아쉽게 놓친 인재.) 어디까지나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내세우고 보유한 영토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5] 당시 유비의 할아버지가 뽑힌 효렴은 한주에서 뽑힐 확률이 얼마 되지 않았다.
[6] 사실 소빙하기로 인해 살기 어려워진 이민족들이 대거 남하하는 상황이라서 늦든 빠르든 수백 년의 혼란기는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진남북조 시대가 그렇게 정신 사납고 피비린내 넘치는 막장 시대가 된 것은 삼국지 시대가 원인이다.
[7] 대신에 유방은 완전 평민 출신인 것에 반해 유비는 성장 배경은 평민이였을지언정 명목상으로 혈통만은 황족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평민 출신인 게 황제가 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유방이 유비보다 더 불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미 본인보다 더 유력한 황족들이 고관에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데다 전한과 후한을 거치며 널리고 널린 게 유씨였던 상황인데 결국 제위까지 올라 그 혈통을 유용하게 만들었던 건 오로지 유비의 능력이었다.
[8] 하지만 그것보다 핵심은 공손찬의 휘하에 든 이후. 유비의 출세는 여기서부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원상(태수급)까지 되었는데 평원의 위치를 보면 원소와 싸우는 최전선에서 격렬하게 치고받은 걸로 보인다. 거기서 군공을 많이 세웠으니 평원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청주로 가서 주둔하는데 조조의 공격을 받은 도겸이 도움을 요청하자 출병하여 조조와 싸운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도겸의 목이 붙어있게 된 데 유비의 공이 혁혁해서 도겸은 유비를 예주자사로 삼는다. 이후 도겸이 죽고 서주의 유력 호족들은 유비를 서주목으로 추대한다. 처음부터 유비가 서주 먹으려고 간 것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도와준 건 사실. 194년도 즈음에 이미 그만큼 유비의 명성이 드높았다는 뜻일 것이다.
[9] 그러나 유비는 자기 보신이나 이익에 눈이 멀어 걸핏하면 무고한 사람이나 자기 부하들을 토사구팽하는 마피아들과 달리 민심을 중요하게 여기고 되도록이면 포용하는 면이 강했다.
[10] 현대에서는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지만 당시에는 꽤 큰 키였다.
[11] 용비어천가 29장. "한덕(漢德)이 비록 쇠하나 제주(帝胄, 황제의 자손)가 중흥하실 것이라, 귀 큰 아이(大耳兒)를 와룡(臥龍)이 도왔나니. 세란(世亂)을 구하러 나시어 천자(天姿, 하늘이 내린 자질)가 기이하고 크시기에 귀 큰 관상(大耳相)을 중국 사신(詔使)이 일컬으니." 조선 태조도 용 같은 얼굴과 큰 키, 유별나게 큰 귀로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12] 현대에도 마초성을 강조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인상적인 수염인데, 고대는 오죽하겠는가.
[13] '오늘도 황하는 도도히 흐른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며 유비가 황하를 바라보다가 장비와 만나는 삼국지이다.
[14] 단 제갈량을 '제갈 공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성인 제갈과 자인 공명을 합쳐 제갈공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표기이기 때문. '유비 현덕'은 굳이 따지자면 '제갈량 공명'이라고 쓴 것과 같다 실제로 일본에서 나온 코에이의 삼국지 영걸전, 공명전 등에는 제갈량 공명으로 등장한다..
[15] 신삼국에서 유비 휘하의 부하들이 자신의 소속을 밝힐 때 주공의 이름을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긴 했다. 단 위에서 말한 성+이름+자의 구조로 말하는 경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16] 다만 화양국지 같은 사서에서는 멀쩡히 '하동의 관우운장, 동군의 장비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성명과 자를 붙여서 사용한다.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나 공적인 성격의 문서의 경우 趾源仲美처럼 병기된다. 이렇게 성명과 자를 아울러 언급하는 것은 호칭으로 쓰지는 않지만 비석 등에서는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이는 그대로 부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정보 전달용이다. 비석을 세우는 데 기여한 사람의 명단을 적을 때, 대부분 관직-이름-자 순서대로 붙여 쓴다. 드물게 이름과 자 사이에 '字' 자를 적어 구별해 놓는 경우도 있다.
[17] 최근의 삼국지 드라마인 대군사 사마의 후반 에피소드를 보면 흑화한 사마의의 모습에 실망한 둘째부인 백령균이 딥빡친 목소리로 '사마의'라고 부르자 사마의도 당황해서 지금 날 뭐라고 불렀냐고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18]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9]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
[20] 참고로 진수는 위나라의 시초가 된 조조는 황제로서 추존된 명칭을 따 무제기, 한을 멸망시키고 정식으로 위를 세운 조비에 경우 문제기, 오나라 황제 손권은 오주전이라고 쓰고 본문에는 이름으로 적었다, 사마의는 당시 진수가 봉직한 서진의 추증 황제로 '선제'라는 명칭이 따로 있었는데도 그냥 진나라가 왕국이던 시절의 추증 명칭인 '사마선왕'이라고 적었다.
[21]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다.
[22] 그런데 일설에서는 짚신 장사는 일종에 마케팅이고, 실제로는 릉 관리자라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돌보는 격이다.
[23] 8월에 도착하여 지원병을 충분히 받은 서황이 만총과 연계해 10월에 번성 포위를 풀었다.
[24] 맹달은 상용이 지키기 유리한 곳이라고 언급까지 했다.
[출처] 한나라 소혈황제 유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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