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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묵 오버마운틴클럽 원정대장
▲ 아딜피크 북서벽 제1피치를 등반하는 필자.카네빙하 일원의 암봉들이 날카롭게 솟구쳐 있다.
“형, 올라가자!”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100m 구간은 80도 경사의 실 크랙이 55m 정도 이어지고, 그 위로는 홀드 하나 없는 페이스다. 우리에게는 암벽화가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배낭을 내려놓고 최소한의 장비만 챙겨 출발한다. 아이젠이 바위를 긁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오른손 피켈이 실 크랙에서 계속 빠지면서 머리를 때린다.
1시간30분간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정상 50m 아래 도달했다. 마지막 마디(피치)는 홀드 없는 80도 경사의 페이스다. 게다가 마지막 5m는 루프다. 이곳을 돌파하려면 적어도 훅으로 서른 동작 이상은 전진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훅이 없다. 우리가 가진 장비라고는 리벳과 볼트 2개, 나이프와 앵글하켄 각 1개, 스노바 1개, 그리고 필요없는 프렌드 1세트가 전부다.
▲ 5.000m급 봉우리가 여럿 솟아 있는 카네 빙하
6개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봉 선택
7월7일 새벽, 카네(Khane·2,700m)의 날씨만큼 불안한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했다. 벌써 세번째 방문이다. 공항에 마중 나온 많은 현지인들과 소란한 경적소리는 여전하다. 명제형과 동식형은 이목구비 뚜렷한 현지 아가씨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사흘간 이슬라마바드에서 체류하려 했지만 스카르두(Skardu)에 전화해보니 쿡을 맡기로 한 이스마일이 우리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나흘째 기다리고 있다 한다. 출발을 서둘렀다.
로컬버스를 타고 19시간40분, ‘역대 최단시간 기록’을 세우며 도착한 스카르두는 1년 전이나 변함이 없다. 올해는 등반팀과 배낭 여행객들이 적어 텅 빈 호텔에서 여유롭게 즐기며 사흘간 식량과 장비를 구입하며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11일. 지프 한 대로 카네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6시간의 지프 캐러밴으로 도착한 카네는 2년 전 낭마(Nang Ma) 계곡의 브락장피크(Brakk Zang Peak) 등반을 끝내고 하루 머문 적이 있어 낯설지 않다. 눈에 익은 출렁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자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따뜻한 포옹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 아딜피크,왼쪽 봉이 정상이고,북서벽은 뒤편에 있다.
카네 빙하는 미국과 오스트리아의 트레킹단을 제외하고 원정대로서는 우리가 처음 진입하는 곳이란다. 이것이 우리들이 찾은 이유 중 하나다. 사진 한 장 없고 정보는 전무한 등반지다. 모든 것을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해야한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런 면이 큰 매력이기도 하다.
넓은 초원이 BC로는 안성맞춤이다. 맑은 물이 옆에 있고, 나무들도 보인다. 그러나 카네 빙하의 진면목은 언덕 위에서 좌우로 모습을 드러내는 6개 봉우리다.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펴본 다음 언덕 위 4,200m 지점에 BC를 구축하기로 잠정 결정한다. 도보 캐러밴에 10시간은 걸릴 것 같다.
이튿날 오전 7시, 출발을 서둘렀다. 포터 20명을 고용, 11시간만인 오후 6시쯤 BC 예정지에 도착, 캠프를 건설했다. 눈이 조금씩 내린다. 해발 3,800m까지 멀쩡하던 동식형이 4,000m을 넘어서면서 하체 무기력증을 심하게 나타낸다.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고소증에서 오는 증세다. 사다와 포터 2명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 업어 내릴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하산을 권유했지만 그래도 BC까지 가본단다. 하기야 하루에 고도 1,500m를 올렸으니 멀쩡할 리 없다.
이후 사흘간 캠프 정리와 정찰로 시간을 보내면서 모두들 정상 컨디션을 찾았지만, 동식형은 등반에서 제외시켰다. 등반 대상지를 결정해야했다. 캠프 주위로는 인상적인 봉우리가 6개 솟아 있다. 그 중 한눈에 마음을 사로잡는 봉은 아딜피크(Adil Peak·5,300m)와 구리피크(Gury Peak·5,500m)였다.
악전고투의 연속인 북서벽 등반
▲ 120m 침니로 들어서는 필자.
그 날 저녁 회의를 열어 아딜피크 북서벽으로 등반대상지와 루트를 결정했다. 우리가 준비한 400m 길이의 고정자일을 설치한 후 한 번의 시도로 정상까지 밀어붙이기로 했다. 세미알파인스타일이다. 알파인스타일도 생각해봤지만 미등봉에 첫 시도로는 위험이 너무 컸다.
16일. 날씨가 잠시 맑은 틈을 타 장비와 식량을 챙겨 3시간 거리에 있는 등반기점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등반을 시작하려니 갑자기 번개와 우박이 정신없이 쏟아진다. 모든 장비를 큰 바위 밑(4,350m)에 데포시키고 BC로 탈출했다.
악천후는 18일까지 이어졌다. 19일 다시 식량과 장비를 챙겨 출발한다. 다행히 날은 흐렸지만 조금씩 구름이 옅어진다. 드디어 첫발을 내딛는다. 첫 마디는 낙석 위험이 많은 경사 65도의 썩은 크랙이다. 60m를 올라 앵글하켄을 박고 바로 다음 마디 등반에 나선다. 30m 오르니 등반선이 없다. 아래는 수직의 15m 직벽이고, 오른쪽과 왼쪽은 등반불가다.
다시 하켄 2개를 설치하고 15m를 하강, 북서벽 쿨와르로 내려섰다. 이후 50도 경사의 120m 설벽을 향해 스노바 2개를 들고 출발했다. 100m 자일이 다 돼서 피피로프로 등반을 이어간다. 불안한 암질에 겨우 앵글과 나이프를 하나씩 설치했다. 오른쪽은 쿨와르이고, 왼쪽은 다시 북서벽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침니다.
▲ 쿨와르 안의 설벽을 등반중인 대원,대원 위쪽에 군함바위가 튀어나와 있다.
바로 등반에 나섰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니도 15m 오버행 벽 앞에서 끝을 보인다. 이 벽을 넘어서는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힘이 모자라 손이 풀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며 겨우 공제선을 넘어 볼트와 리벳을 하나씩 설치했다. 위로는 길고 긴 설사면이 55도 경사로 이어진다.
오후 2시를 넘기고 있다. 명제형이 올라왔기에 스노바를 달라고 하니 아래에 두고 왔단다. 필요도 없는 스크류를 들고 다시 출발한다. 조심조심 등반, 드디어 군함바위에 도착하자마자 나이프피톤 2개를 설치하고 바로 하강에 들어갔다. BC에 복귀하니 오후 8시가 넘었다. 지겨운 눈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19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과 비는 25일까지 1주일간이나 이어졌다. 악천후가 등반을 멈추게도 하지만 사색의 즐거움도 준다. 등반 후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고, 대원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점들은 좋건 싫건 하나씩 알아간다. 이스마일은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다.
▲ 헤드월 직전의 설벽을 등반중인 필자,위쪽 궁형 크랙이 등반선이다
“형 미련 있어요?”, “아니….”
26일 새벽 1시, 뿌연 하늘, 차가운 기온 속에 정적을 깨고 출발한다. 그간 내린 눈으로 고정자일이 안 보인다. 겨우 찾아 주마를 건다. 그나마 얼어 있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오전 7시 마지막 고정자일에 도착, 곧바로 등반에 나선다. 150m 설벽을 끝내고 앵글하켄 2개를 설치했다. 위로는 수직의 썩은 얼음이 25m 정도 이어졌다. 등반 중 가장 어렵고 위험한 얼음이었다.
10m 지점에 스크류를 겨우 설치하고 전진한다. 피켈이 얼음에서 계속 밀린다. 떨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몸이 굳어진다. 겨우 빙벽을 넘어서니 스노샤워가 계속 떨어진다. 신설이 문제였다. 재빨리 오른쪽 암벽에 붙어 다시 앵글하켄 2개를 이용해 마디를 끊었다. 이후 길이 200m, 경사 40도 설벽을 세 마디 오르니 정상 헤드월이 보인다.
마지막 설벽 등반에 들어가 60m를 오르니 바로 헤드월 밑이다. 루트를 살펴볼 때쯤 본격적으로 눈이 내린다. 경사 80도의 실크랙이 55m, 그 위로 이어질 줄 알았던 크랙라인은 물길이다. 명제형이 올라와 암벽화를 달라고 하니 안 가지고 왔단다. 당혹감에 말을 잃었다. 내려갈 수는 없었다. ‘저 위가 정상인데…’. 가다 떨어지더라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젠 긁히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형 잘 봐!” 소리를 지른 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무언가가 가슴에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왜 저 벽을 못 넘어’라는 오기와 등반열정이었다.
이제 정상 직하 50m 전이다. 여기서 중요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했다. 위로는 경사 80도의 홀드 없는 넓은 페이스고, 좌우로 또한 홀드 없는 경사 80도의 페이스를 확보물 없는 상태에서 50m 이상 트래버스해야 한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오후 3시가 가까워오고 있다. 고도계는 5,250m을 가리킨다. 침묵을 깨고 내가 물었다.
“형 미련 있어요?”
“아니….”
“내려가죠.”
▲ BC에 모인 대원과 쿡,왼쪽부터 이동식,필자,이스마일,현명제.
밤 11시가 넘어 캠프에 도착했다. 한 번 더 시도하느냐 마느냐, 많은 생각을 했다. 식량 부족, 대원들의 체력저하,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눈 등 여러 이유가 내 마음의 약한 곳을 건드렸다.
28일, 마지막 회의를 열어 다음날 아침 철수를 결정했다.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상 50m 전까지 우리가 개척한 루트를 ‘에인젤2002’(Angel2002)라 명명했다. 비록 정상을 밟는 데는 실패했지만, 우리는 이 등반에서 소중한 것을 얻었다. 실패의 좌절감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할 것이고, 이런 많은 감정들이 체험으로 소중히 간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우리가 의미를 처음 부여한 아딜피크는 하행 캐러밴 내내 구름에 가려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등반정보
허가없이 등반 가능한 5,000m급의 보고
파키스탄 카라코룸의 카네 빙하
등반기점 마을인 카네(Khane·2,700m)는 100가구 정도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서 후세(Hushe)쪽을 보면 마셔브룸 남벽이 장관을 이룬다. 빙하의 진입은 마을 뒤 입구가 아주 좁은 협곡으로 들어서면 된다. 계곡은 점점 넓어지고 시야 또한 좋아진다. 5시간 정도 운행하면 방목지인 스토고스팡(Stogo Spang·3,800m)에 도착한다.
여기서 보이는 그레이트타워(Great Tower·5,800m) 동벽은 2000년 한국산악회가 세계초등한 낭마 빙하의 그레이트타워 서벽의 뒤편이다. 수직고 1,500m가 넘는 거벽으로 서벽만큼이나 어렵고 가팔라 보인다. 서벽보다 바위질이 좋지 않아 낙석의 위험이 크지만, 등반을 못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레이트타워를 등반하려면 이곳에 BC를 건설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5시간 동안 급경사를 오르면 구리티약(Gury Tiyak·4,200m·좋은 물이 나는 자리)에 도착한다. 좌우와 정면에 6개의 거벽이 장관이다. BC를 기준으로 오른쪽 밑에서부터 사미피크(Sami Peak·약 5,000m), 구리피크(Gury Peak·5,500m), 트윈피크(Twin Peak·5,500m)가 있고, 왼쪽으로 아딜피크(Adil Peak·5300m)가 있다. 정면으로는 사나피크(Sana Peak·5,800m)와 칸림피크(Khanlim Peak·5800m)가 있다.
·사미피크 : 벽 길이 700m 정도. 산 높이보다는 삼각형의 아름다운 암봉이다. 벽 길이는 짧지만 경사가 가팔라 어려운 인공등반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구리피크 : 벽길이 1,000m가 넘는 거벽. 정상 능선에 올라서기까지 비박지가 없어 보인다. 벽은 눈과 바위가 혼합된 형태이며 설벽의 각도가 심지어 65도 되는 곳도 있다. 이곳을 등반하려면 정상능선까지 900m를 하루에 등반할 수 있는 강한 등반력이 요구될 것 같다. 눈사태의 위험도 상존하는 어렵고 위험한 봉우리들이다.
·트윈피크 : 등반 스타일은 구리피크와 거의 비슷하며 벽 길이 또한 같다. 오른쪽 능선을 등반선으로 잡는다면 구리피크보다는 쉬운 등반이 예상되며, 비박지 또한 양호할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봉우리가 능선으로 연결된 쌍봉이다. 주봉은 오른쪽 봉우리다.
·사나피크 : 접근부터 힘들다. 아이스폴 지대를 건너야 등반시작 지점에 도착한다. 많은 크레바스가 있다. 벽길이가 1,500m를 넘는 거벽이다. 혼합등반이 필요하며, 하단부 바위지대가 고빗사위이고, 이곳을 돌파하면 정상 설릉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칸림피크 : 사나피크 오른쪽에 있으며 여러 날 관찰했지만 쉽게 등반선을 찾을 수 없었다.
□접근 및 식량·포터
국제선 여객기가 닿는 이슬라마바드는 파키스탄의 수도다. 깨끗하고 나무와 잔디밭이 많은 아름다운 도시다. 이곳에서 공산품 위주의 식량과 장비를 구입해야 한다. 스카르두보다 조금 싸다. 준비가 끝나면 설악산에 가기 위하여 속초에 들르는 것과 같이 등반기점 도시인 스카르두로 향해야 한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스카르두까지는 경비 절감을 위해 로컬버스를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버스의 종류에 따라 1인당 850~1,600루피(9월 말 현재 1루피≒18원) 정도다. 사람이 많을 경우는 버스를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 12인승 미니버스는 12,000루피 정도다. 스카르두까지 20시간 정도 걸리고, 비가 많이 오면 가끔 길이 끊어지지만, 도로는 잘 정비돼 있는 편이고 보수공사 역시 빠르다.
스카르두에 도착하면 농산품 위주의 식량과 장비를 구입한다. 운이 좋으면 중국배추를 구해 김치도 담글 수 있다. 숙박료가 다양한 호텔과 로지가 여러 곳 있다. 중급 숙박업소의 경우 3인용 방 한 칸에 약 300루피.
스카르두에서 카네까지는 지프차로 6시간 정도 걸리며, 대절비용은 2,000~2,500루피 정도 한다. 카플루를 지나면 시욕강과 브랄두강의 합수지점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은 캐시미르 분쟁지역인 금단의 시아첸 빙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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