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伸春前後
李 鐘 桓
上章, 暴雪의 季節
혈뇨(血尿)가 나오는 것을 보고 변 시유(卞時有)는 깜짝 놀랐다.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마는 소변기에I 잠깐 고였다가 빠지는 오줌 속에 분명히 흘그스레한 빛깔이 섞여 있는 것이다. 놀라는 바람에 오줌이 뚝 멈추어져 더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가까운 비뇨기과 간판 걸린 병원으로 달러갔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팽개쳐둔 무책임했던 벌이 닥쳐온 것이다.
이층에 있는 병원에는 간호원 하나만 앉아 있었다.
“친찰 좀 받을까 하는데요.”
“네, 어디가 편찮으세요.”
간호원과 긴 얘기할 성질이 아니다.
“선생 님 계신가요.”
“네, 지금 점심진지 잡수세요, 곧 나오실 거예요. 앉으세요.”
흰 커버 씌운 걸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개인병원이라고 해서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생겼을까 싶어하며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고 있었다.
곧 의사가 나온다.
잇사이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쭉쭉 들여빨며 다가온 의사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김치 냄새를 풍 내뿜는다.
“혈뇨가 나와서요.”
“네, 어디 검사해보십시다. 여기 들어가서 소변을 보십시오.”
진찰실 안에 있는 침대 곁 노리끼하게 쩔은 커튼을 걷고 유리컵 하나를 들려 들여보낸다.
금방 다방에서 소변을 본 다음이라 오줌이 곧 나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옆에 누가 있을 떼는 신경이 쓰여서 오줌이 잘 나오지 않는다.
한찹만에 삼분의 일 컵 정도를 보아 내밀어주었다. 이번에는 피는 섞이지 않
았다.
오줌이 든 컵을 들어 비춰보더니,
“결핵이군요.”
한마디로 단정한다.
“검사도 안하시고 어떻게.”
“오랜 경험으로 빛깔만 보면 압니다. 그렇지만 검사를 해놓을 테니까 내일 다시 들르십시오.”
벌써 칠팔 년 전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그것도 곧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름철이라 워낙 신통치 않은 건강으로 수술 그 자체를 견디어나지 못할 것 같아 곧 하겠다고 해놓고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마침 누가 용하다는 한의사를 소개해주어서 약 한 반제가량 먹고는 파스만 계속 복용했다.
그러던 중 한번 다방에서 우연히 S병원 비뇨기과 과장과 과원들을 만났다. 과에서 함께 저녁이라도 먹고 다방에 들른 듯했다. 시유를 보더니 과장 이하 과원들이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후에 병원에 통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아마 어디서 죽었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 오늘날까지 잊어버린 듯 병을 팽개쳐두고 살아왔다. 그 병이라는 것이 통증이 있거나 당장 몸에 불편함을 주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게으른 천성으로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종로에 있는 그 개인병원에 다시 들렀더니 의사는,
“균이 나오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나 결핵에 틀림 없읍니다.”
자신있게 말하고 치료방법을 설명하면서 가부간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개인병원이라 미덥지 않아 그길로 곧 B종합병원으로 갔다.
역시 소변검사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소변을 보아주고 이튿날 다시 갔다.
이번에는 결핵균이 나왔다는 것이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합니다. 얼마나 나쁜지.”
그래서 이튿날 새벽 같이 나와서 엑스레이를 찍고 그 다음날 결과를 보러갔다.
사진은 되어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신장이 이렇게 두 갈래로 나와야 하는데 이쪽은 보이지 않잖습니까. 이게 썩은 겁니다.”
사진설명은 간단했다.
“곧 수술해야겠읍니다. 곧 하지 않으면 이쪽까지 침범하게 됩니다. 이쪽마저
침멈당하면 그때는 큰일입니다.”
나머지 한쪽마저 침범당하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두 쪽을 다 떼내고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신장을 하나 떼다가 이식수술을 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결핵인 경우에는 하지 않는 법이다. 새로 이식한 신장으로 금
방 옮아가기 때문이다.
“언제 입원하시겠읍니까."
키가 자그맣고 가무잡잡한 얼굴의 레지던트인 듯한 젊은 의사는 다그쳐 말
했다.
“형편 되는 대로 하지요.”
형편이란 우선 막대한 수술비용이 준비가 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연재물들을 적어도 두어 달 분량은 써 넘겨놓아야 한다.
“그러시면 우선 치료를 받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약물로 나을 수 있는 거라면야 그렇게 말씀드리지요.”
이래서 일 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받아왔다. 병원에 갈 메마다 의사는 언제 입원하느냐고 물었다. 키가 좀 크고 얼굴이 희멀건 의사와 키가 작고 가무잡잡한 대조적으로 생긴 두 젊은 의사는 변 시유를 볼 때마다 언제 입 하느냐가 인사였다.
금방 수술받을 형편은 되지 않고 매번 인사받기가 귀찮고 거북스러워 얼마 후부터 병원가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약만 사다가 먹었다. 하루 세번이나 네 번 먹는 건데 제때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신장에 결핵균들이 우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조금 성한 쪽도 새까맣게 썩어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해가 바뀌었다.
여전히 〈형편〉은 닿지 않았다. 우선 원고를 여유있게 써야 되는데 용이하지 않았다. 돈도 쉽게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의학사전을 펴보면 신(腎) 결핵은 오래 두면 방광결핵 전립선(前立腺) 결핵으로 발전한다고 되어 있다. 변 시유는 이미 전립선으로까지 번져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자면 한쪽 신장마저도 이미 많이 침범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각하면 초조스러워 못견디었으나 〈형편〉은 좀처럼 달라지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면서 속의 창기가 썩어들어가고 있는 데는 기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그저 일부분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생명을 앗아가는 균들의 활동이 왕성 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또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올 겨울은 웬 눈이 삼월을 접어들었는데도 쉬지 않고 퍼붓는지 알 수 없다. 점심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나더니,
“선생님, 누가 왔나봐요.”
식모가 와서 이른다.
창문을 열었다.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누가 왔단 말인가.
나무로 얽어 만든 대문 위에 스카프를 쓴 얼굴이 하나 들여다보고 있다.
“음, 진영(珍英)이구나.”
그는 반가움이 앞서는 마음으로 눈 위로 정원을 가로질러가서 대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언제 보아도 싱싱하고 젊음이 넘쳐터지는 듯한 진영의 얼굴이 화사하게 웃음을 띄운다.
“웬일이야, 이렇게 눈이 오는데.”
“눈이 오시니까 선생님 뵙고 싶어져서요.”
부츠라는가 하는 긴 신을 신고 성큼 마당으로 들어선다.
서재 겸인 홀로 들어왔다.
진영은 들고 온 국화를 병에 꽂아 책상 위에 놓는다.
“눈이 굉장하지, 버스가 다니던?”
“택시 합승했지요. 오면서 보니까 버스가 두 대나 눈구덩이에 빠져있어요.”
난로가에 앉으며 ,
“선생님 좀 달라지신 것 같애요.”
“늙었지 머.”
“아니에요, 늙으신 거 그런 거 말고 어딘가 좀 달라지신 것 같애요.”
병색이 나타나보이는가 싶다.
“그래, 졸업 때는 알려줘야지. 신문 보니까 작 이십삼 일에 졸업식 거행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잖아. 날짜를 알려줬으면 나가보았을 건데, 섭섭했어.”
“뭘요, 선생님 건강은 어떠세요.”
“나야 그저 그렇지 머.”
“혈압도 괜찮으시고요."
“재보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있으니까, 어떤지도 모르지.”
“아이 참 선생님도. 선쟁님 건강은 선생님이 알아서 보셔야지요.”
진영은 삼년 가까이 비서노릇을 해주었다. 변 시유가 갑자기 혈압이 높아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부터, 그러니까 이학 년 때부터 와서 원고를 받아썼다. 사람을 데리고 원고를 받아쓰일 처지도 아니었으나 원고 쓰는 일은 혈압에 나쁘다고 해서 할 수없이 그 방법을 취한 것이다.
토요일 일요일은 제외했지마는 거의 날마다다시피 이 먼데까지 열심히 나와주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졸업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만두었다.
“그래, 졸업 후에 계획은?”
“시집가야지요 머. 동무애들은 모두 취직한다고 법썩들인데 저희 집에서는 시집보낼 궁리˙만 하고 있는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게 제일이지.”
찻주전자를 만쳤더니 진영이 얼른 받아 커피를 넣어 난로에 얹는다. 언제나
칠칠한 솜씨다.
“진영이 신랑은 누가 될지 모르지만 진영이 데리고 가면 큰 땡 따지.”
“솜씨 좋고 일 잘하고 부지런하지.”
“하긴 그렇지우. 그래서 누구 주기가 아까워 시집 못 가겠어요.”
“그런 이기주의가 있나.”
변 시유는 오래간만에 웃었다. 진영도 따라 웃는다.
“아드님들 자주 휴가 나와요?”
“음, 여름 때나 한번씩 나올 것같이 편지했더군.”
“다 잘 있대요?”
“고되긴 하겠지만, 아이들은 군대훈련이 썩 좋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좋은 단련이지.”
두 아이가 한꺼번에 작년 가을 군대에 나갔다.
“선생님, 쓸쓸하시겠어요.”
“쓸쓸하다기보다 적적 하지. 집이 외딴집이나 마찬가지지, 식모하고 강아지밖에 식구라고는 없으니.” ,
“그러기에 말이에요. 저 시험공부하면서 선생님이 시간쯤 뭘 하고 계실까 하
고 가끔 생각했어요. 또 혼자서 바둑이나 두실까…….”
변 시우는 진영의 웃음에 맞추어 또 한바탕 웃었다. 그는 정 심심할 때면 기보(棋譜)를 들고, 혼자서 가끔 바둑을 놓는다.
찻잔을 들고 눈쌓이는 정원을 내다보며,
“어서 눈이 멎고 봄비가 내려야 잔디들이 살아날 텐데.”
진영은 무슨 먼데 일을 생각할 때처럼 눈을 깜박거린다.
저녁을 먹구 나서 진영은 자리를 일어났다.
“어디, 눈길을 한번 구경 해볼까. ”
변 시유도 같이 일어났다.
“나오시지 마세요 선생님, 잔디가 마당에 파랗게 돋아날 때쯤 또 올께요.”
택시를 합승해 나와 다시 버스로 갈아타는 진영을 전송하다가 문득 가게에 놓인 귤을 보고 뛰어가 두 개를 사들고 버스 안의 진영에게 쥐어주였다.
다음다음날 진영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겟밤 이후로 저는 선생님께 대한 생각으로 점령되어 있읍니다. 어젯밤의 저는 진한 마약을 마신 것처럼 어지럽고 잠이 오지 않았읍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매력으로 저의 〈무딘 인간애〉에 도전하시는 게 아닌지 하고 의심이 듭니다. 선생님을 알게 된 후로 늘 선생님의 나머지 인생이 조용히 더워가기를 요구했어요. 인생의 브랭크를 채우고, 문학에도 좀더 열정적이시기를 바랐어요. 그러나 버스에 실려 돌아오는 동안 여태껏 그렇게 생각해온 것은 잘못이 아니었나 싶어졌어요.
선생님의 고독은 이미 여과된 것이고 저의 〈분주한 정열〉이란 아직 성숙치 못한 욕심에 불과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생의 생기를 선생님께 부어드리고 싶었던 것은 제 욕심이었읍니다만, 어젯저넉 이후 저는 선생님의 그 〈세련된 조용한 삶〉을 그냥 용서해드려야 옳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요히 가라앉은 샘물은 흔들어줄 것이 아니라 조용한 자세로 관조해야 하는가봅니다. 혹 가벼운 바람이라도 스쳐간다면 샘물은 스스로 움직이게 될 테니까요. 바람이 불어도 수량이 많은 샘물은 쉽게 흔들리지는 않겠지만요.
어째서 선생님이 갑자기 가까운 거리에 서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까요. 마치 예전부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제가 차라온 모습을 지켜보아준 사람인 듯 느껴지니 말입니다. 저의 연약함, 헛점, 유치함·…·등, 모든 치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주 정든 사람같이 느껴지는걸요.
제가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일까요. 선생님께 이런 편지를 다 쓰게 되고……
이상하게 선생님께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어제 직접 뵜을 때는 이런
얘기 한마디도 못했으면서.
참 엊저녁에 선생님과 헤어져서 꼭 한 가지 후회한 일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버스가 떠나기 전에 선생님 귀에다 대고,
“저, 선생님 약간 좋아요.”
라고 말해드럴 걸 잊어버린 것입니다.
동해 어느 조그만 섬을 찾아 떠나고 싶어집니다. 왈칵 밀려오는 이 실현성 없는 욕망을 달래며 펜을 놓습니다. 혹시 수술하시게 되면 제게 알려주실 것 잊지마세요.
지금 자정 십분 전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안넝.
선생님께.
진영 을림〉
편지를 읽고 나서 시내로 들어갔다. 원고료 받을 데가 있었다.
원고료를 받아 사홀 후 강릉까지 왕복 비행기표 두 장을 사고 진영에게 비행기 떠나는 아침시간 다방에 나오라고 편지를 써부쳤다. 진영의 아이디어로 좋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싶었다. 비록 당일치기이기는 하더라도.
그날도 역시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떠날 수 있을까 어떨까 생각하며 다방으로 나갔다.
“웬일이세요 아침 부터.”
진영은 눈을 털면서 들어온다. 낮에 보니까 외투랑 구두랑 학교다닐 때보다 다른 완전 숙녀용이다. 한결 성숙해보인다. 화장도 가볍게 한 모양이다.
“음, 잠깐 좀 보고 싶어서.”
“갑자기 왜요.”
“편지답장도 할 겸.”
“무슨 편지답장을 다방에서 해요.”
“꼭 글로 써야만 담장인가. 이렇게 보는 것도 답장이 되지.”
차를 마신 다음 시간 맞추어 항공사 앞으로 가 버스에 올랐다.
“어마! 이건 왜 타요.”
“답장이야.”
“답장이 이래요.”
“글쎄 어서 타라구.”
비행기는 떠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진영은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의아스러운 눈망울만 굴렸다. 자신이 담긴 입모습에 살짝 웃음이 뜬다.
“염러 마, 저녁 여덟 시까지는 집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눈보라를 헤치며 비행기는 동쪽으로 날았다. 대관령이 하얗게 눈에 덮여 내려다보인다.
비행창에 내려 탯시를 잡아 경포대 호델로 갔다.
진영은 아무말 없이 따라들어왔다. 제일 위층 방을 얻어들었다.
방에 들어서면서 변 시유는 커튼을 걷었다. 거기에는 푸른 바다가 넘칠 듯 펼쳐져 있었다.
“어마! 겨울바다도 푸르네요!”
진영은 손뼉을 찰깍 치면서 폴착 뛴다.
“왜, 겨울바다는 허열 줄 알았어?”
“그래도, 새삼 느껴지네요.”
“이쪽으르 와봐.”
반대쪽 장문 커튼을 열었다.
“어마, 이건 머에요.”
“경포대 호수. 유명한, 호수에서 달이 뜬다는 데 아냐.”
“어머나! 한쪽은 바다 한쪽은 호수! 정말 신나네요!”
진영은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동해 조그만 섬에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만하면 동해 구경을 하는 셈이지?”
“네 선생님! 섬이야 말이 섬이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보면 그만이지요 머.”
점심을 먹고 나니 피로가 몰려온다. 소파에 기대앉아 잠간 눈을 감았다.
“선생님, 침대에 누우세요, 피로하실 텐데.”
“음, 그럴까. 그럼 잠깐 실례. 커튼을 좀 쳐줘.”
변 시유는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내가 잠이 들면 어떡할래."
“깨실 때까지 그냥 두겠어요, 안심 하시고 주무세요.”
“내일 아침 까지도?”
“그럼요.”
“진영 집에서 소동이 나게?”
“소동 좀 나라지요 머. 정말 전 너무 착한 애였어요.”
“였어요라면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
“좀 아니고 싶기도 해요.”
누워 있는 동안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진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나싶어 두리번거렸더니 욕설에서 물소리가 난다. 그러고 보니 소파 위에 옷이 벗어져 있다.
이윽고 욕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변 시유는 얼른 돌아누웠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내지 않고 나와 옷을 입는 모양이다. 옷을 다 입고난 기색일 때 변시유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마! 그만 주무세요?”
“음, 많이 잤지?”
“아니에요, 한 한 시간은 저 목욕했어요, 그동안.”
“음 잘했어.”
탕에서 상기된 불그스레한 두 뺨이 귀엽다.
“선생님, 맥주 한잔 했으면 좋겠어요. 목욕을 하고 나니까 목이 컬컬하네요.”
“그러지, 마침 나도 생각나는 참이었어.”
전화루 맥주를 시켰다.
맥주잔을 치켜들며 진영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생글거린다.
“동해여행이 이렇게 금방 이루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어요.”
변 시유는 이번에 수술하게 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설사 한쪽은 아직 비교적 성하다고 한다손치더라도 방광전립선 등이 못 쓰게 되어 있어 결국 수술을 계기로 끝장난다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보겠지마는 아마 십중팔구는 한쪽마저 못 쓰게 되어 있으리라 싶은 것이다. B병원에 처음 간 지가 벌써 반년 가까이 되어온다. 그때 벌써 곧 수술해야한다는 것을 여태껏 미루어왔으니 그동안 진행이 여간 아니었을 것이 뻔하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혈압까지 높으다.
그러므로 잠깐 다녀가는 여행이지마는 〈여행〉이라고는 이게 마지막일 것이 틀림 없다.
변 시유는 맥주를 마시면서 진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앳되고 싱싱한 소녀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행을 한다는 감회에 온몸이 젖어드는 것이었다.
“선생님, 월 그렇게 보세요.”
“음, 진영이 얼마나 예쁜가를 보는 거야.”
“하이 참! 싫어요 선생님, 다시 못 볼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이세요.”
“그래? 마주앉은 사람 좀 바라보았기로서니 뭐 그리 야단할 것까지는 없잖아.”
이렇게 받아넘기면서 이 소녀는 어째 내 눈빛을 그렇게 잘 알아맞힐까 싶어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겨울 해는 짧았다.
“저녁을 먹고 가도록 하지.”
“그래요."
맨 꼭대기가 식당이었다.
식당에는 벌써 두서너 패가 와 있었다. 그중의 한 때는 얼른 보아도 신혼여행 온 남녀였다. 여자는 노랑저고리에 남색 긴 치마다.
“저 친구들도 동해를 어지간히 좋아하는가보군. 신혼여행으로 여기에 오게.”
변 시유는 식탁 앞에 앉으면서 말했다.
“저도 이리 올래요. 선생님, 저 신랑신부 중에 어느편이 동해로 가자고 했을
까요.”
“글세.”
“신부에요. 신부가 동해를 좋아할 눈을 하고 있잖아요. 짙푸른 벚이 눈에 돌
잖아요.
“어디 진영의 눈빛도 그런가.”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내려갔다.
비행기 시각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서 프런트에 택시를 부탁해놓았다.
아까 먹다가 남은 맥주를 마저 따라마시고 나서 변 시유는 바다 쪽 창문 커튼을 열었다.
“진영, 이리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인데, 바다 좀 봐.”
“네.”
진영은 사뿐히 일어서서 가까이 다가선다.
“선생님, 이제부터 저보고 소녀라고 하시면 화낼래요. 선생님을 거쳐간 그 많은 소녀 중에 하나로 끼고 싶진 않거든요.”
“그러지, 이제 학교도 졸업했으니까."
“선생님, 참 저 하나 여쭤볼 게 있어요. 뭐냐하면요. 선생님 가끔 약주 자수시면, 진영이 졸업만 했더라면 하셨는데 이제 졸업했으니까 말씀하세요. 졸업했더라면이 뭐에요.”
변 시유는 망설임없이 친영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나 한번 가볍게 안아보았으면 좋겠어.”
진영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가만히 말이야. ·…·이거였어, 졸업 만 해봐라 한건…….”
“선생님, ……·싫어요. 저의 아버지같이 저를 생각해주세요. 그냥 귀여워만 해주세요.”
“진영이.”
“선생님, 이러시지 마세요.”
진영은 어깨를 돌려 뽑는다.
변 시유는 확 무안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택시가 온 것이다.
비행기를 탔다. 변 시유는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뒤에 기대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 좀 하세요.”
“음.”
변 시유는 눈을 감은 채 선대답을 했다.
“아이참, 취하신 척하시지 말고 말씀 좀 하세요.”
변 시유는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소녀에게서 무안을 당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한번 안아보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안된 말이었을까.
서울에 내려 시내로 들어왔다.
“선생님, 차 마시고 가세요.”
다방에 들렀다.
다방에 들어가서도 변 시유는 입을 떼지 않았다.
“아이참, 말씀 좀 하세요.”
“내가 할 말은 다 했어.”
끝내 말 한마디 안하고 헤어졌다.
사홀 후에 편자가 왔다.
〈선생님, 화나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솔직이 말해서 선생님께 미안합니다마는 오늘 저는 흡사 통속소설의 실상을 실감하는 느낌이었어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안에 더블베드가 놓여 있고…….
오늘처럼 제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제가 어려서 그런 걸까요. 이상한 위화감이었어요.
그것으로써 선생님과 저 사이는 일단락지어졌어요. 이제 선생님과 저는, 어느 다방에서 만나거나 혹은 선생님댁 잔디밭에서 만나게 될 때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새출발을 하는 거에요.
선생님 이해해주시겠어요?
선생님께.
진영 올림〉
下章, 라일락의 季節
변 시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말았다.
한번 안아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위화감을 주어 거절당한 사실이 오히려 뜻밖이었다. 가령 진영이 말하듯이 〈삼류 통속소설〉적으로 일이 전개되었다고 하더라도 변 시유는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구나 전립선까지 침범당한 중환자로서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런데까지를 상상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 더구나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해놓고 있었는데. 그는 오래지않아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머지않은 장래에 앞두고 귀여워하는 소녀를 한번 가볍게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무리한 욕심이었을까.
그러나 아뭏든 주책없는 소리를 했다는 후회로 가득차 있다. 진영 같은 소녀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저주를 당한 자기 꼴을 생각할 때 스스로 얼굴이 뜨뜻하게 창피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삼월. 한 달 내내 미친 것같이 눈이 휘날리고 고르지 못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는 열심히 원고를 썼다. 여유있게 써서 넘기고 원고료를 미리 받아 입원하자는 생각이었다. 연재물은 연재물대로 그런 목적으로 열을 올려 쓰고 그밖엣 것들도 기를 쓰고 썼다.
사월 한 달이 다 가기 전에 어지간히 일이 끝났다.
연재원고를 한 뭉치 가지고 갔을 때 사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매번 날짜를 어겨 독촉 독촉하기가 일쑤인데 웬일이냐는 것이다. 입원하기 위해서라는 소리는 안했다. 입원을 하게 된다면 원고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리라 생각하니 가슴밑창에 슬픔 같은 것이 고이는 것이었다.
원고료를 두루 받아모아가지고 날짜를 기다렸다. 어느날 입원한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꽃이 좀 피는 것을 보고 싶었다. 입원해서 수술이 원만하지 못하게 될 때 이세상은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냥 얼마 동안 버틴다면 한번 꽃은 볼 수 있는 것이다. 얼마 동안 날짜를 끌더라도 꽃을 한번 더 보자는 심산이었다.
막연하게 라일락이 피면 입원하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라일락 향기가 정원에 가득할 때면 이미 웬만큼 볼 만한 꽃은 보는 셈이니까.
산수유가 맨 먼저 피었다. 노란 꽃실이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어날 때의 눈처럼 보시시 피어났다.
그리고 잇따라 개나리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다. 작년에 옮겨심은 큰 개나리가 어떨까 했더니 하나 가득 셋노랗게 꽃을 피워주었다. 진달래는 조그만 산을 발갛게 온통 흥분시킨다.
아침저녁으로 그는 꽃그늘을 왔다갔다하며 꽃나무들을 돌보았다. 쌌던 짚을 끌러준 장미는 곪아터질 듯한 노란 새 움이 볼록볼록 내밀고 있다.
이윽고 오월에 접어들면서 목련이 피기 시작한다. 잎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뭇가지에 주먹 같은 흰 꽃송이들이 웃음을 벌린다. 그는 목련을 무척 좋아하지마는 이 꽃은 공연히 불교와 연결되어, 극락, 혹은 지옥을 연상시킨다. 흰 꽃이지마는 화사하기 그지없다. 아침이슬을 함뿍 머금은 꽃송이는 슬픔 안은 소복한 여인 같다.
——내가 축은 다음에 소복한 여인이 하나쯤 찾아주었으면……
있을 수도 없는 공상이 날개를 편다. 그리고 그 공상은 그의 장례식으로 날아간다. 그가 죽으면 친구들이 몇 군데 전화라도 해줄는지 모른다. 그는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그가 나가던 교회 목사보고,
“내 영결식은, 목사님이 집례해주셔야 합니다.”
미리 말을 해놓았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그 목사는,
“아 글쎄, 부산엘 갔는데, 꿈에 당신이 죽었다고 하지 않아? 잠을 깨고도 당신이 하던 소리가 생각나고 걸려 집에 들어가는 즉시로 우리 집사람보고 변 선생 무슨 연락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 없다지 않아, 원, 나 우스워서. 이렇게 멀쩡한 사람보고 말이야.”
파안대소하는 것이었다.
시 쓰는 친구 하나는,
“당신이 만약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내가 멋진 조시를 쓰지. ……그런데 내가 먼저 죽으면 어쩌지?”
눈을 둥그렇게 해서 쳐다보는 것이었다.
“미리 조시를 써서 나한테 맽겨놓구려.”
이래서 또한번 웃었다.
그리고 영결식에 모인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니, 며칠 전에 봤는데 이게 웬일이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상당히 병이 짙어 있었어.”
이런 대화들이 오가는가 하면 바쁜 시간에 참석할까 말까 하고 무척 망설이다가 달려온 친구는,
“아니, 좀 한가할 때 가더라도 가지, 이렇게 바쁜 때 하필 갈 게 뭐람.”
원망쪼로 말할 것이다.
영구차는 쓸쓸하게 몇 친구를 같이 태우고 떠날 것이다. 별로 애통하거나 슬퍼해주는 사람을 남기지도 않고.
이무렴 아주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일제 때부터 여간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한번은 평안북도 용천인 그의 집까지 놀러가 신의주 가까운 신도라는 섬에 가서 〈농어〉를 먹으면서 하룻밤을 함께 새기로 했다. 그의 결혼 때는 변 시유가 들러리를 섰다. 나이는 둘인가 셋인가 아래였지마는 너무 일을 많이 하느라고 몸이 당쳐져 있었다.
그러나 변 시유를 만나면 항상 건강이 어떠냐고 걱정하곤 했는데 그가 먼저 가다니 참으로 뜻밖이라 아찔하도록 놀랬다.
부음을 들은 이튿날 저녁에 그를 추모하는 방송국 좌담회에 나가 앉았으면서도 자꾸만 생시인가 꿈인가 싶었다.
사회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던 친구라 영결식은 성대했다. 큰 학교강당이 꽉찰 정도로 조객이 많았다.
변 시유는 관 옆에 아이들을 거느리고 앉았는 부인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상가에 갔을 때보다 달리 슬픔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고개를 똑바로하고 의연히 앉아 있는 태도에서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순서에 따라 관을 타원형으르 두른 촛대에 수백 개의 촛불이 점화되고 마지막으로 한 소녀가 영정 앞 촛대에 불을 붙일 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야 하게 흘러버렸다.
변 시유는 친구의 영결식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이 한층더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을 실감했다.
마침내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다.
연보랏빛 꽃잎들이 동그스럼 한 송이로 원을 형성하며 눈부시게 피어났다.
변 시유는 라일락을 기다렸던 참이라 무시로 라일락꽃 그늘을 드나들며 향기를 마셨다. 불란서의 무슨 유명한 향수도 라일락 향기를 따넣어 만든다던가…… 향기는 코를 통하여 머리로까지 띵하게 스며들어 올라간다.
친구들이 두어 차례 술병을 차고 놀러왔다 갔다.
친구들은 정원이 아름답다고 극구 칭찬이었다.
그러나 변 시유에게는 그런 소리들이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이 여겨졌다.
한쪽 등가에서는 등꽃이 피기 시작한다. 라일락과 같은 연보라꽃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 이젠 꽃도 웬만큼 보았으니……
입원할 준비를 했다. 우선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야 한다.
화창한 봄날씨였다.
병원 비뇨기과에 들어섰을 때 그 의사들이었지마는 변 시유를 잘 못 알아보았다. 그전에 쓰던 진찰권으로 차트를 간호원이 찾아내놓으니까야 짐작이 가는 모양으로,
“아니, 그동안 어디 가셨댔어요?”
키가 작은 편인 가무잡잡한 의사는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네 좀.”
“그래 어떠세요."
“이제 입원할 작정으로 왔읍니다."
진찰이라야 청진기 한번 대본 적 없다. 소변검사와 엑스레이뿐인 것이다.
의사는 소변을 받아 검사실로 가져가라고 하며 내일 다시 들르라고 한다.
“아니, 엑스레이 다시 안 찍어봅니까.”
변 시유 편에서 채근하듯이 말했다.
“먼저 찍은 게 있잖습니까.”
의사는 다시 찍을 필요 없다는 의견 같다.
“그래도 오래 내버려뒀으니까 한번 다시 찍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얼마나 진행 됐는지.”
“그럼 그럭허세요. 엑스레이과에 가서 수속해놓고 내일 와서 찍으세요.”
소변을 검사실에 넘겨놓고 엑스레이과로 가서 수속을 했다.
“이 약을 먹고 내일아침 일곱시 반에 오세요.”
지난번과 같다.
아침 일곱시에 닿아오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의사가 다시 엑스레이 찍으라는 말을 안하는 것은 몇달 사이에 크게 진행되었을 거라고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변 시유는 자기 병을 자기가 잘 안다. 짐작이지마는 대개는 들어맞는다. 내일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놀랄 것이다.
이튿날 엑스레이를 찍고 그 다음날 사진이 나왔다.
무서운 것을 보는 마음으로 우중충하게 기분 나쁘게 생긴 필름을 들여다보았다.
작년 필름도 내놓고 있었다.
“이것보세요. 이쪽은 그대로 나오지 않잖았읍니까.”
의사가 설명을 한다.
“작년보다 어떤 셈입니까.”
“신우(腎盂)가 좀 흐리지 않습니까.”
작년 것을 가리키며,
“이것보다 좀 좋지 않아진 거지요.”
설명을 한다.
그 정도인가 싶었다. 작년보다 훨씬 못 쓰게 되어 있을 것 같았는데 마음이 좀 놓인다. 지레짐작했던 것보다는 크게 진행이 안 되어 있는 셈이다.
“아뭏든 곧 수술하셔야 합니다. 이만하기 만분 다행입니다.”
의사들도 아마 많이 진행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럼 결국 한쪽만 떼내면 당분간 지탱할 수 있는 셈이군요.”
“그럼요. 지금이라도 빨리 수술하면·…·물론 계속해서 약물치료는 해야지만,
……· 괜찮습니다.”
변 시유는 후우 한숨이 나왔다. 생각했기보다 얼마 동안 생명이 연장되는 것
이다.
곧 입원수속을 하고 다음날 입원했다.
며칠 동안 준비치료를 해가지고 수술한다는 것이다.
병실침대 위에 누우니까 다시 불안감이 온다. 맹장염을 잘못 수술해서 세 번씩 배를 쨌고 또 그래도 신통치 않아 탈장수술을 했고, 척추관절염으로 척추를 깎아내는 큰 수술을 하기도 했다. 모두 세 시간 네 시간씩 가는 수술이었다. 그 무서운 수술들을 치렀으면서도 웬지 이번에 수술을 하면 뭔가가 잘못되어서 끝장을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인 것이다.
그는 아무한테도 입원했다는 말도 수술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공연히 친구들을 성가시게 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잘못되어 이대로 간다고 해도 그만이고 다행히 살아난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병실 창가에서 라일락 향기가 무던히 강렬하게 불어들어오는 날 수술을 받았다. 휜 가운에 마스크를 하고 역시 횐 캡을 쓴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분주히 서둘고 있다.
전신마취를 하는 모양이었다. 주사바늘을 팔에 찌르고 하나 둘을 세라고 한다. 다섯 여섯까지 세다가 의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마취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가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몇 시가니안 지났는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높은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희뿌옇게 켜져 있었다.
간호원이 들어온다.
“여기가 어디요.”
“깨셨군요, 회복실이에요.”
“으. ……”
“수술 잘 되셨어요. 이제 조리만 잘하시면 돼요."
“음, ……”
ㅡ수술이 잘 됐다. …·그럼 살아난다는 말인가……
한숨이 나온다.
어쩌면 다시 정원의 꽃들을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산목련, 장미가 피고, 목백일홍, 능소화가 피고……
이런 공상을 하면서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오후가 되었다.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수술자리의 상처의 통증하고 다르다. 호흡이 가쁘다. 의사에게 호소했더니 의사들은 당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 그련가요.”
“네, 괜찮습니다.”
의사들은 괜찮다고는 하면서도 표정들이 심상치 않다.
ㅡㅡ내 출혈 이구나!
직감적으로 그는 깨달았다. 수술 후에 의사들이 당황히 서두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내출혈 인가요.”
“아, 아닙니다. 염려없읍니다.”
말로는 염려없다면서 염려없는 얼굴들이 아니다. 과장이 왔다. 심각한 얼굴로 환자를 만진다. 혈압을 재보더니 곧 수혈을 한다.
―ㅡ내출혈!
변 시유는 연전에 친부 하나가 위 절개수술을 하고 내출혈로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진다.
“선, 선생님, 의식이 없어질거라고 그래요.”
꺼져가는 의식속에 그는 말했다. 의사들은 주사를 연거푸 놓고 바쁘게 설친다.
“내출혈이라도 다시 수술하면 아무 일 없읍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으나 심상치 않다.
――그때 그 친구는 내출혈일 때 밤에 인턴밖에 없었다지. 지금은 낮이니까, 의사들도 있고 과장도 있으니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 꺼져 기어들어가는 의식을 붙잡을 듯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선생님!”
듣던 목소리다.
눈을 뜨려고 하는데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선생님! 저 진영이에요, 선생님!”
뭐라고 대답을 하고 싶은데 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선생님, 입원하시면 알려줍시사고 했는데 왜 알려주시지 않으셨어요…… 오늘 선생님댁에 안 갔음 모를 뻔하잖았어요! 선생님, 선생님!”
울음섞인 음성이다. 가물가물하게 귓전을 울린다.
“선생님! 괜찮으시대요! 기운을 내세요 네? 선생님! 선생님 경포대로 다시 가요 우리! 빨리 나으셔서 다시 가요! 선생님 그 편지는 제가 잘못 썼어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선생님 다시 가면 안그러께요. 선생님 힘을 내세요!”
흐릿하게 들리던 소리가 거기에서 아주 사라지고 만다.
―—꽃을 한 번 더 봐야지, 정원을 한 번 더 거닐어야지. 라일락은 졌을 거야. 등꽃이 한창이겠군. 아니 등꽃도 다 졌을 거야. 목백일홍, 능소화가, 아니, 산목련, 장미가 먼저 피지. 한번 싸악 기계로 깎아준 다음의 빌로도 같은 잔디밭 위로 달빛받은 정원 둘레의 향나무 그림자들이 조용히 밀려들어오면 나는 미치고 못 사는 거지.
이런 의식이 가물거리면서 자꾸만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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