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 한.양 절충식 성당이다.
있는 김대건 신부 기념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산 중턱에는 '화산' 이름과 맞춘
듯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나바위성당'이 있다.
되면서 '나바위성당'이라고 불렸다. 화산 산줄기 끝자락에 광장처럼 너른 바위가 있는데
이 너른 바위에서 이름을 따와 '나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절충식 건물로 형태가 바뀌었다. 나바위성당은 이 독특한 건축 양식 때문에 1987년 7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화산 나바위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845년 10월 12일이다. 이날
밤 8시경 전라도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들이었다.
을 나바위에 무사히 올려놓고 운명을 다했을 것이다. 만약 주민들이 낯선 배가 포구도 아닌
곳에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분명히 관가에 신고를 했을 것이기에 김 신부 일행이 스스
로 라파엘호를 침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추리일 뿐 라파엘호의 운명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지샌 후 곧바로 상경했다.
있었다. 강경에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알리던 봉화대가 있었다. 또 뱃길로 실어 나르던
정부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르나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았다. 강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한 사실이 확실
하게 밝혀진 시기는 1839년 기해박해 때다.
교구장 뮈텔 주교는 전라도 복음화 교두보로 이곳에 본당을 신설하고 초대 주임에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요셉 베르모렐(한국명 장약실) 신부를 임명했다.
그는 참혹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신자들을 보고, 형편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지와
전답을 사들여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농토나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줄 작정이었다. 그때
심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알았다. 돈이 있다면 논을 사서 외교인 틈에서 외롭게 사는 신자들을 이주시켜 좋은 신자 부락을
만들고 싶다. 배고픈 조선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들을 신자로 만들고 싶다."
87명이 세례를 받았다.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1906년 설계가 완성되자 곧바로 착공에 들어간
베르모렐 신부는 나바위에서 약 30리 떨어진 임천군 가하면 지저동 뒷산을 1000냥 100푼을 주고
매입, 곧게 뻗은 소나무들을 베어 뗏목으로 운반해 건축 목재로 사용했다.
등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신자들은 또 하루 밥 한끼 먹기도 힘든 궁핍한 삶에도 성의껏 성당
건립기금을 내놓았다. 이렇게 나바위성당은 가난한 신자들 헌금과 노력 봉사, 희생 위에 세워졌다.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이 전부였지만 베르모렐 신부와 신자들의 기쁨과 긍지는 대단했다.
1909년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종을 종탑에 설치했고, 1911년 9월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 주례로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공사에 착수, 흙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종각을 증축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나바위성당.
있다.
성당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며져 있고, 지붕과 벽면은 전통 목조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팔괘'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이 사방으로
나 있고, 처마 위마다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윤이 나 있다.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깔았던 나무 그대로다. 양말을 뚫고 머리 속까지 얼얼하게 하는
한기와 발바닥 전체에 와닿는 매끈한 촉감이 신선하다.
다. 제단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본당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제대 부품을 몰래 들여와 조립한 것이다.
조성돼 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오르면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와 '망금정'이 있다.
후임 김재덕 신부(훗날 5대 전주교구장 주교를 지냄)가 1955년 건립했다.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지어졌다.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들 피정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평야로 변했다.
집은 연건평 740평 3층 건물로 야영장, 수영장, 운동장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청소년과 신자들을 대상
으로 김대건 신부의 복음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유지 김두환, 서재양, 박익래, 강인수, 박준호씨와 함께 1908년 성당 안에 소학교(초등학교)인 '계명학
교'를 설립, 운영했다. 베르모렐 신부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국가 대본은 교육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
이 힘"이라고 가르치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사회문제로 불거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계명학교는
일제 에 의해 강제 폐교됐다.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김영호 신부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에 수감
됐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계명학교는 1947년 11월 재정난으로 폐교됐다.
당시 본당 주임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본당 신자들은 '인민군 자위대원'을
자원해 김 신부를 보호했다.
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본당 수녀들은 시약소에 의원 못지않은 의료기
구를 갖추고 간단한 수술까지 했다.
신앙 명소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