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유괴 살인 사건.
자세한 사건의 내막은 이 기사를 참고할 것. 작성자는 표창원이다.
2. 유괴
1990년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선수촌아파트에서 살던 곽재은 양(1984년생, 당시 6세)은 아파트 단지 내의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등하원을 했다.
1990년 6월 25일, 정오가 되어도 곽재은 양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엄마는 유치원까지 갔지만, 교사는 "어머니, 아까 30분 전에 전화하셔서 재은이 보내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되물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계속 수소문하다가 오후 5시에 경찰에 유괴 신고를 했다.
당시 홍순영은, 우산에 적힌 곽재은양의 반과 이름을 보고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기에 담임은 이름과 반을 알고있는 사람이라 아이를 잘 아는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별다른 의심없이 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3. 금품 요구
6월 26일 오후 5시에 젊은 여성이 곽 양의 집에 전화를 걸어 "재은이를 데리고 있으니 신고하지 말고 5천만 원[2]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강동경찰서는 이를 추적하여 공중전화에서 발신했음을 밝혀냈다. 이후 10분 뒤에 다시 전화해서 계좌번호와 가짜 이름으로 만든 예금주를 댔다.[3] 곽 양의 어머니는 우선 6월 27일 오전에 500만 원, 다음 날 오전에 2,500만 원을 범인이 알려준 조흥은행 계좌에 송금했으며,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조흥은행 본점 및 서울시내 모든 지점[4] 그리고 전산실에 형사들을 배치했다.
그 이틀 후인 6월 29일 오후에 드디어 범인이 30만 원을 인출한 기록이 포착되었는데, 형사들이 배치된 조흥은행이 아닌 (구)국민은행 본점의 ATM이었다.[5] 이에 형사들에게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고 약 2시간 후 명동 롯데백화점 내부의 조흥은행 출장소 ATM에서 10분간 260만 원을 인출했다.
4. 검거
주변 지점에 배치되었던 형사들이 바로 명동 롯데백화점의 조흥은행 ATM으로 달려갔고, 막 돌아나오던 키가 매우 작은 젊은 여성을 주목한다. 그녀가 범인임을 직감해 추적에 나선 경찰은 마침내 을지로입구역 계단에서 체포했고, 범인은 23세의 홍순영이었다.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홍순영. 체격이 매우 왜소하다.[6] 단, 옆에서 홍순영을 붙잡고 있는 두 여성은 강력계에서 근무하는 형사들로 업무 특성상 일반 여성보다 체격이 건장한 편이다.
홍순영은 "공범이 있다"고 거짓 진술을 했고[7], 여기에 낚인 경찰은 홍순영을 공범이 기다리고 있다는 서울역까지 데려가서 공범을 유인하려고 했으나, 홍순영은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관사가 급정거를 하여 경상만을 입었다.
재은이가 어디 있는지 추궁했으나 동문서답을 하던 홍순영은, 결국 "숙명여자대학교 한 건물의 물탱크 뒤에 재은이의 시신을 은닉했다"고 자백했다.
당시 현장검증
5. 범행 동기와 과정
범인 홍순영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강한 허영심과 희박한 윤리의식을 가진 성격이었으며 대학입시 과정에서 번번이 불합격 미역국들만 먹자 부모님과 본인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가짜 숙명여대생 행세를 했다. 이후 우연히 얻은 학생증으로 위조 학생증을 들고 다니며 장장 4년 내내 태연히 도강(盜講)을 하며 모든 수업을 다 듣고, 실제 정치외교학 전공책을 한가득 사서 이걸 집에도 잔뜩 가져다 놓아 정치외교학과 학생 행세를 하고 숙명여대 MT 등 각종 대학행사는 물론 졸업식까지 참석하는 등 철저하게 주변과 본인을 속여왔다.[8][9] 심지어 가짜 졸업 후에는 또 KBS 기자로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상허언증의 사례.
사실 홍순영은 처음에는 숙명여대생인 척 하고 다니면서 그 해에 다시 대학입시를 치러 숙명여대에 정식으로 입학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바쁘고 자신의 정체가 들킬까봐 모든 상황에 거짓으로 대응하는 데 신경을 쏟느라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10] 또한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에서도 홍순영이 정말 숙대생인지 의심하는 시선이 강해졌고, 홍순영이 가짜 숙대생이라는 소문이 점점 퍼져 나갔으며, 마지막에는 혼담이 오가고 있던 남자친구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졌다.
게다가 모든 것을 거짓으로 살아온 4년이 넘는 세월은 홍순영의 마음을 극단적으로 병들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가짜)학생 시절에는 등록금으로 쓰라고 준 돈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은 통 크게 펑펑 쓰고 다녔지만, (가짜)취직을 한 후에는 더 이상 돈을 받을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월급을 탔으니' 가족에게 한턱 내야 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11] 하지만 실제로는 고졸 백수라 돈 나올 곳이 없었기에 점점 홍순영의 상황과 생활은 악화되었다. 게다가 남자친구와의 결혼이 이런 상황을 끝낼 기회였는데(결혼했으니까 직장을 그만뒀다는 핑계) 남자친구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홍순영은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가 벌어진 남자친구의 환심을 사고 가족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은 돈을 벌수 있고 당시에는 흔한 범죄였던 유괴[12]를 선택했던 것이다.
범행 당일 유치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유치원의 우산꽂이에 달려 있는 우산에서 곽 양의 이름을 보고 범행대상을 선정했으며 홍순영은 허위전화로 곽 양을 유치원에서 하교시킨 후, 엄마의 지인으로 속이고 빵과 음료수를 사주며 숙대까지 유인해 전화번호 및 주소를 알아냈다. 그 후 음악대학 건물의 후미진 곳으로 가서 교살한 후 시신을 은닉하고 협박 전화를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순영은 그렇게 남자친구에게 집착했으면서 막상 붙잡히자 공범이라며 남자친구 이름을 내세워 그가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6. 결말
당시 유괴살인은 1987년 12월에 터진 원혜준 유괴 살인 사건에서 보듯이 그 동기나 과정이 우발적인 경우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연쇄살인, 대량살인, 당해 10월에 발생한 부산 새마을금고 권총 강도 살인 사건처럼 경찰관 등 고위공직자를 살해하는것과 더불어 무조건 사형이 원칙이었다. 또한 사건 1달 전인 1990년 5월에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을 납치하여 5시간 동안 홍순영 자신의 부천시 자택에 감금했다가 풀어주었던 일을 벌인 적이 있고, 자신 또한 사형을 원한다고 자기 입으로 밝혀[13]서 사건 발생 이후 반 년 뒤인 1990년 12월 21일, 서울지방법원 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항소를 거쳐 대법원 상고심에서 1991년 9월 13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동년 12월 18일 다른 8명의 사형수와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14] 15시 35분 사형장에 들어온 그녀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인정심문에 대답도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계속 소리내어 울기만 했다고 한다. 구치소에 들어온 지 반년이 채 못 되어[15] 집행될 것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교도관이 면담 있다고 하며 데리고 나오니 전혀 모른 채 왔으며,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와서 갑자기 처형되니 이렇게 된 것. "남길 유언이 있으면 말하라"라고 소장이 권해도 울면서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리고 김우성 신부가 가톨릭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계속 흐느껴 울기만 하다가 작은 소리로 '예'라고 한 정도였다. 고해성사 때에야 겨우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빕니다. 부모님께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16]
15시 50분에 사형이 집행되어 16시 정각에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파주시 나자렛 묘원에 묻혔다.
7.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