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행동하는 시민 모임
카페 가입하기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자유 토론방 스크랩 지슬과 4.3 항쟁
바보매니아 추천 0 조회 29 13.04.25 19: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주바당에 배를 띄왕 노를 젓엉 혼저나 가게
보름아 보름아 불지 말어라 좀수허레 가는 배 떠나 감쩌
물질 허레 바당에 들언 테왁 허나에 목숨을 멧경
설룬애기 두엉 바당에 드난 살고저 살고저 허멍 셍복을 따곡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

 

http://youtu.be/AO4tv1D8IRs

'이어도 사나'는 영화 '지슬'의 OST다.

침략,외환으로 인한 三多(바람,돌,여자)의 제주지만 三無 (거지,가난,잠금) 가 함께하는 사람사는 섬이 제주도다,,하지만 섬사람들은 이상섬 '이어도'를 여전히 부를수 밖에 없다. 

끝나지 않은 세월, 그 상처가 아직도 제주도민들에 남아있으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강정마을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세월 2 '지슬' 을 가족, 벗들과 단체관람하였다.
오멸 감독은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열악한 제작환경속에서 만들고 과로 병마로 사망한 故 김경율 감독을 총지휘자로 내세울만큼 진정성과 겸손함을 갖춘 제주사람이다.

영화는 제주의 언어(사투리)로 시대의 진실을 얘기하며   4.3에 무심했던 '육지인'과 자막으로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지슬'은 3월1일 제주에서 먼저 개봉해 2주 만에 1만명을 돌파하고 독립영화로서 개봉 첫날 일일 박스오피스 TOP10을 기록하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579400.html


 

 

 

영화 '지슬'은 1948년 제주 4.3 항쟁이 배경이다.  그해 11월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 소개령 ( 疏開令: 분산명령)과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3만명이 넘는 도민들을 희생자로 삼았던  참혹한 대학살극, 질곡의 해방전후사가 그 배경이다. 

 

 
'인간에게 가할수 있는 가장 잔인한 학살극'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숨은 역사'이기에 영상은 자칫 컴컴한 무거움과 분노속으로만 빠져들수 있지만 영화는 보는이로 하여금 웃음과 눈물, 따뜻한 인간애와 갈등과 배신, 사랑과 이별,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대비를 통해 관객을 깊은 감동으로 몰아가며 의미있는 질문을 던져준다. 
또한  참혹한 학살의 그림자가 드리운 동굴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않고 따뜻함(특히 감자 -지슬)을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사람냄새'가  잔인한 학살의 연기냄새와 대비대며 진한 감동과 긴 여운을 남겨준다. 

 

 

무엇보다 밤하늘 의 별이 내려다 보는 제주의 용눈이 오름과 숨져간 순덕의 가슴이 실루엣으로 드러난 장면, 겨울의 돌담 등 아름다운 풍광에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빼어난 영상미와 흡입력 있는 연출력을 보태어 영화의 감동을 배가 시켰다..
마지막 장면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이제 그만 죽여요..' 가마솥에 잔인한 상관이며 학살자를 삶으며 향해 내뱉던 충혈된 말딴 병사의 눈물과 독백이 4.3의 진상을 말해주는 듯 하다..

 


두시간 가까이 다 보고나니 12시..다들 '위령제'를 지낸듯 깊은 침묵으로 소감을 대신한다. 네티즌들의 평균 평점은 9.7인데 제주 4.3 반란을 다루었다며 0점을 날린 이도 있다. 아마 국정원 직원이거나 일베충 따위일 것이다..

'지슬'이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재벌 찌라시는 정작 4.3 항쟁에 대해서 심층 기사를 제대로 다룬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동안 주류언론은 '4.3 폭도' '4.3사건'으로 폄하하며 4.3 항쟁을 거꾸로 된 숨겨진 날조의 근대사속에 숨겨 왔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미제국의 선댄스 영화제 수상은 한국최초 '제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고발'로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65년만에 대한민국의 봉인이 개봉되었다'는 영화포스터 선전문구가 과장된 것만은 아닌 것이다.

4.3 은 수많은 폭도가 죽어간 4.3 한사건이 아니라 소중한 생명이 억울하게 희생된 한건 한건이 모인 수만건의 4.3 항쟁인 것이다. 유족들의 고통까지 감안하면 수십만건이며  제국의 침략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질곡의 한국 근대사의  한가운데 있는 결코 잊혀져선 안될 학살의 역사인 것이다..

 

  제주 4.3 항쟁은  28주년 3.1절 기념일 자주 통일 독립을 촉구하며 가두시위하던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주민 6명이 사망하자 시작되었다.  제주 주민 95%는 이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으로 맞서며 일제 경찰의 무장과 고문등 잔재 폐지, 발포 경찰 처벌 및 책임자 사임, 희생자 유가족,부장자 보상 등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미 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렌드(Red Island)로 단정하였다. 훗날 그들의 보고서에는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동조자' 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한술 더 떠 일제국 부역하던 친일경찰(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체포 구금, 고문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4.3 항쟁은 미 제국의 단독선거, 단독정부에 반대한 주민들의 무장봉기로 시작되었다.   

해방을 맞아 우리 민족은 통일된 민족 국가가 수립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미제국은  5. 10 단독선거를 통하여 제국의 입맛에 맞는 단독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4.3 항쟁은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 대신 성조기를 올린  미제국이 만주,한반도를 강점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의도하에 제국의 미군정과 개노릇을 마다않았던 매국노 이승만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극이다. 지난 정부가 공식사과하고 4.3 평화공원 건립이 된것은 2008년 3월이다.

최근 “맥아더 미군정이 본국(미국)에 보고할 비밀문서에 남한에 민족주의 세력이 집권하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안될 것”이라며 “’다시 친일파를 기용해야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라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김원웅 전 의원의 발언으롯 4.3의 배경을 시사해주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http://blog.daum.net/nogate/7471184

 

 

하지만 사대매국, 독재학살 원조 이승만을 국부로 내세운 이명박근혜 정권은 4·3특별법 개악과 4·3위원회 폐지, 중고교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수십만의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에 다시 생채기를 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제주4·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던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중 한 번도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고 4·3 후속 조치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또 기획재정부는 국무회의와 국회에서 의결한 4·3평화공원 3단계 사업비도 집행하지 않는 등 철저히 제주4·3을 무시했다."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7388

< 1948년 4.3 항쟁>

 

"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막아내려 했던 제주 민중들의 항쟁과 이에 대한 미군정 당시의 군인과 경찰들,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말한다.

제주 4.3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월 1일부터 사실상 7년 7개월간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약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사살당했다. 마을이 통째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1948년 3.1절 발포사건
1948년 3월 1일,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반 주민이었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했고 민심수습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섬 사람들을 ‘폭도’로 몰았다.

이 사건이 4.3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4.3 무장 항쟁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사건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7년 7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미군정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1948년 11.17 계엄령 선포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출처 : 제주4.3 평화재단)

 



아름다운 제주에 간다면 한라산, 제주올레 7코스, 강정마을,거문오름, 다랑쉬 오름, 용눈이 오름등 자연 문화유산, 역사현장과 더불어 반드시 추천할만한 곳이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의 흔적과 아픔이 남아있는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바로가기 --> http://jeju43.jeju.go.kr/index.php

제주 해군기지와 4.3 과거 청산

' <각명(刻名)의 정치학>

대량학살의 집행자였던 토벌대와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민간인은 4.3 위원회가 공인하는 '4.3희생자'로 재구성되지만 남북조선의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미군정과 한국정부에 대항했던 항쟁그룹은 '희생자'에서 배제되게 됐다. '

녹색평론124호 http://blog.daum.net/nogate/7471183

4.3 항쟁시 인구 전입출 통계를 감안하더라도 10만명 정도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한 자료는 1948년 4월3일 이후 1949년 4월까지 이루어진 대량 살상과 파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8만 6천명 살상, 1만 5천호 방화, 7만 8천두의 소와 2만 2천필의 말 및 2만 9천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 5천석, 고구마 4백 2십만관, 면화 9만 7천관, 소채 9십만 관 소각"

                                  

                                       더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시면 손가락을 꾹 눌러 주세요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