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해 순교자들의 숨결이 15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내에 시원스레 뚫려 있는 강변도로와 중부 고속도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도 구산 사적지를 찾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구산 사적지 또는 구산 마을이라고 할 때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해도 미사리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그곳!"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구산은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15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 가고 있는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구산 마을은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6.25 당시에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한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쭉 뻗은 강변도로와 그 아래 미사리 조정 경기장은 구산 마을을 들어서는 순례객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도로 건너편 골목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시골 성당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구산 성당이 나온다.
성당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 개발되어 있는 구산 사적지에는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야트막한 기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고개를 빼고 담장 안을 넘겨다보는 순례객들에게는 마치 이 담장이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담장을 돌아 사적지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형형색색의 도자기 작품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성모자상)이 보인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은 고(故) 김세중(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 지난 19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자상과 함께 사적지 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기와 대문(안당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성인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들어서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 현양비와 묘소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의 풍모를 기린다.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돼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복자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14처상이 들여다보인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 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 빛에 어우러져 섬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2001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은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려 노력하고 있는 귀중한 교회이며 순교의 얼이 살아 있는 곳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기에 구산 마을은 이웃집 친구를 만나러 가듯 정겨운 마음으로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2년 7월 22일)]
구산, 김성우 성인의 고향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으로는 거북뫼 곧 '구산'(龜山,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로 현 하남시)이 있다. 이곳은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으로, 그는 1830년경에 셋째 아우인 윤심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둘째 아우 덕심(아우구스티노)은 입교를 망설이던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 후 3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실로 눈부셨으니, 얼마 안 되어 구산 마을 전체는 하나의 교우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성우는 3년 뒤인 1833년에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어의동, 즉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여름에는 모방 신부를 모셔와 성사를 받았다. 이때 모방 신부는 김성우의 신심을 높이 사서 이곳의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3월 21일(양력) 포졸들에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다시 포졸들이 들이닥쳐 집에 있던 그의 아우들과 사촌 김주집을 체포하여 광주 유수가 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끌고 갔다. 그중 둘째인 덕심은 체포된 후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1월 28일에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로 순교하였다. 반면에 셋째인 윤심과 사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남한산성은 1801년 12월 27일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동문 밖에서 순교한 이래 두 번째로 순교자들을 탄생시킴으로써 유명한 순교터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우들이 체포되기 전에 김성우는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에 체포되었으며,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명목 아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석방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기까지 하였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그의 순교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오히려 순교가 가까워졌음을 알고 즐거운 낯으로 질문에 답하곤 하였다. 결국 포도대장은 음력 윤 3월 18일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다. 옥중에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이 순교를 각오한 단 한 마디였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암브로시오) 등에게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현재 구산 성지에는 그의 무덤과 두 형제의 무덤, 1868년 3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김성희와 김윤심의 아들인 김경희의 무덤이 있으며, 같은 날에 순교한 김덕심의 둘째 아들 차희와 김주집의 아들 윤희의 가묘, 그리고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지현의 무덤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