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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6대조(六代祖)는 최준옹(崔俊邕)인데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 아버지 최석(奭)의 그전 이름은 최석(錫)인데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문종(文宗), 선종(宣宗), 순종(順宗) 세 임금을 섬겼으며 벼슬은 수태보 문하시랑 동 중 서문하 평장사 판리 예부사(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를 지냈고 시호는 예숙(譽肅)이라 하였다. 최유청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예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선비란 옛것을 배운 후에 벼슬길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글공부에 몰두하며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혹 자기를 추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직 공부가 미숙하다고 사양하였다. 후에 추천을 받아 직 한림원(直翰林院)으로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후 이자겸(李資謙)이 반역을 음모하려고 대신들 중에서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무슨 술책을 써서라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었다. 예로 평장사(平章事) 한교여는 강정(剛正)하다는 사람이었으나 그 역시 죄 없이 유형을 당하였으며 최유청의 매부 정극영(鄭克永)은 한교여의 표제(表弟-외사촌)인 관계로 연루되어 강직당하였으며 최유청도 실직되었다. 그러다가 이자겸이 패망한 후 최유청은 내시(內侍)로 소환되어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사간(左司諫)으로 있다가 상주(尙州)원으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사를 하였다. 과만이 되자 시어사(侍御史)로 임명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직되었는데 그가 진언한 정론 중에는 왕의 뜻을 거슬린 말이 있었으므로 전중소감(殿中少監)으로 좌천되었다가 즉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책명(策命)을 사례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언어와 행동이 예절에 맞아서 금나라 사람들이 탄복하고 공문을 본국으로 보내 그의 벼슬과 봉급을 올려 주라고 의뢰하였다. 귀국 후 호부 시랑(戶部侍郞)으로 임명되고 후에 동북면 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나가 있었는데 동북 국경 지대가 그를 장성(長城)처럼 믿었으며 소환되어 승선(丞宣)으로 임명되었다. 의종 초년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되어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으므로 벼슬이 뛰어올라 중서 시랑 동 중서 문하 평장사 판병부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되었다. 당시 낭중(郞中) 정서(鄭敍)가 대녕후(大寧侯-왕의 아우)와의 은밀한 사건에 관련되어 6품관 이하의 지방관으로 나갔는데 최유청은 정서의 매부이므로 정서가 대녕후를 초대할 때에 정서에게 그릇을 빌려 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간관(諫官)들이 말하기를 “최유청이 대신의 체면을 잃었다”라고 하였으므로 남경 유수사(南京留守使)로 강직되었으며 연이어 충주(忠州)와 광주(廣州) 목사(牧使)로 강직되었다. 그가 비록 지방으로 강직되어 오랜 기간을 지냈으나 태도가 태연하였으므로 임금도 그가 충직하고 다른 뜻이 없는 것을 깨닫고 다시 평장사(平章事)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저해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소환되어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로 있다가 그 후에 연로하여 치사하였다. 정중부 난에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부터 최유청의 덕망에 감복하고 있었는지라 군사들에게 그 집은 다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던 까닭에 최유청을 비롯한 친척까지 모두 다 화를 면하였다. 또 형부상서(刑部尙書) 한취(韓就)는 단주(湍州) 사람으로 술수(術數)를 잘 알아서 능히 사람의 화와 복을 예언하였는데 지혜로써 몸을 보전하였고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까지 이르렀다. 명종이 즉위하자 최유청의 지난날의 덕행과 명망이 있었음을 알고 그를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가 이어 수 사공 집현전 태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로 올리고 이내 치사케 하였다. 4년(1174년)에 죽으니 향년이 80세였으며 시호를 문숙(文淑)이라고 하였다. 최유청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부도(부처)를 혹신하여 날마다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학생과 승려들이 모아 들어서 배우며 질문하였다. 일찍이 왕의 조서를 받고 이한림 집주(李翰林集注)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편찬하였는데 왕이 그 책을 보고 가상히 여겨 출판케 하였다. 그 외에 문장 수백 편과 남도집(南都集)의 저작이 있다. 아들은 여덟을 두었는데 최증(崔證), 최후, 최린, 최당, 최선(崔詵), 최양(崔讓)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승려로 되었다. 최증, 최후, 최당, 최선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국가로부터의 연봉을 받았다.

첫댓글 오늘 아침, 참신한 자료를 접하게 되어 기쁨니다.
72행의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한시를 쓴다는 것은 도연명이나 소동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번역 또한 어느 분이 하셨는지 존경스럽습니다. 고려조 인종임금께서 추밀원 지주사이신 정습명 선생께서 사직서를
제출하였는데, 임금께서 이를 만류하신 글을 내리셨는데 임금은 검토 및 확인만 할뿐 그 글을 실제로 쓴 신하 분이
최유청 선생이라 전해지니 당대의 천재적인 문장가으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