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종교
대한민국은 다종교 국가이다. 헌법 20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고 2항에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정 종교가 특정 정파에 종속되거나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각종 선거나 정치 활동을 보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고 서로를 교묘하게 이용해 왔다, 종교적 신념을 현실화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공생해 온 셈이다. 선거철이 되면 한국의 정치인들은 종교 지도자를 찾아간다. 가르침을 받겠다는 명분이지만 속마음은 종교의 표심을 자극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정치부 기자 시절의 오래된 취재 노트를 다시 열어봤다. 2004년 4ㆍ15 총선 전인 1월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다. 친미, 반북 흐름을 우려한 김 추기경의 발언이 정치적으로 이용돼 정당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2년 후인 2006년 7월 26일 재·보궐선거 당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 추기경을 찾아갔다. ‘정권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추기경의 발언을 ‘한나라당으로의 정권 교체’ 발언으로 왜곡하자 서울대교구가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한나라당은 천주교에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개신교 장로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인 2004년 5월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해 엄청난 물의를 빚었다. 또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임기 내내 종교 편향 논란은 계속됐다. 특히 2008년 8월에는 불교계가 정부의 종교 편향을 규탄하는 대규모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해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고 공직자의 종교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양당 정치로 이념적 구분이 뚜렷한 미국은 정당 정책에 종교적 신념이 반영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선거전에서는 종교적 집단행동을 자극하고 타 종교를 배척하며 경쟁을 부추긴다.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후보 경선은 가히 성전(聖戰)으로 표현된다. 소위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개신교 보수파’의 영향력이 승리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았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2월 이슬람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면서 미 대사관 이전 계획을 공표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종교적 편향성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왜곡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지난 2월 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두 정상은 “한미 양국의 두 번째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라는 점을 공통의 주제로 삼아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소통할 것을 약속했다. 답보 상태에 놓여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교황의 도움으로 풀어보자는 의미로 보인다.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가톨릭의 가치를 외교를 통해 실현해 보자는 희망의 약속이다. 보통, 국가 정상 간 상견례 외교에서 정상 간의 공통된 인연과 명분을 찾는 것은 국제 외교 무대의 오래된 관행이다. 특히 다자 외교에서는 정상 간의 ‘공통분모’가 합의된 조약이나 성명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정치와 종교가 ‘내 편 네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종교의 참된 가치도 역할도 아니다. 편향적인 종교 정책으로 성장하려는 권력은 모든 종교가 막아야 하고, 권력을 통해 성장하려고 하는 종교는 모든 국민이 막아야 한다. 4·7 재보궐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편향된 종교 정책을 남발하는 후보가 아닌 종교의 참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후보를 선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