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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일 목요일 [(자) 위령의 날-첫째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욥은,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기어이 보리라고 고백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고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복음).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11월은 교회 전례력으로 위령 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입니다. 특히 위령 성월 첫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며, 둘째 날은 ‘위령의 날’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 뜻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누리고 있지요. 따라서 성인들을 본받아 연옥 영혼들도 빨리 하느님 곁에 갈 수 있도록 첫째 날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둘째 날을 ‘위령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는 저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분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께 되돌아가신 조상님들, 부모님, 남편이나 아내, 형제와 친척, 친지, 그리고 은인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잠시 그렸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더욱이 요즈음,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고인들을 잊어버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만큼은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리며, 그분들이 남긴 뜻과 못다 한 일들을 기억하고, 이를 가꾸어 나가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잘 맞이하도록 하루하루 의미 있게 지내며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죽음연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극진히 사랑했던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한 30대 부부가 있었습니다. 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잊어보려고 두 사람 모두 휴가를 내서 해외여행까지 다녀왔었지만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이 도저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잊을 때도 되었건만,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때도 되었건만 두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먼저 떠난 아이의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언제나 허전해하고 방황하곤 했습니다. 그런 부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사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 참으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곧 죽음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식의 체취를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의 그 부드러웠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 아름다운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고결합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은 신비이며 진리이며 은총입니다. 무속 신앙인들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 피하고만 싶은 것, 껄끄러운 그 무엇입니다.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아주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감사의 원천이요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은 가장 탁월한 해결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죽음이 없다면 그 사악했던 인간들이 얼마나 더 떵떵거리며 우쭐대며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거두어가기에,모든 것을 정리해주기에, 모든 고통을 씻어주기에,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된 말이지만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늘 옆에 끼고 살아가야 할 가장 친한 친구여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결하며 준비된 죽음을 위한 가장 필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죽음의 준비는 바로 오늘을 충만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거룩하게, 오늘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성실히, 최대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의 준비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하느님의 정의와 연옥벌
어떤 자매님이 같은 신자인데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괴롭힌다고 합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벌이라고 받게 하고 싶지만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참고 참고 하다가 병이 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의가 빠진 자비는 비겁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의롭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지옥이고, 또 그래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연옥입니다. 왜냐하면 평생 나쁜 짓만 하다고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평생 지은 죄에 대한 아무런 보속도 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 주어도 항상 벌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봅시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갖은 첫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고 그 죄도 용서를 받았지만, 하느님의 다윗의 집안에 평생 칼바람이 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고, 또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며 자신의 소실들이 겁탈을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병적조사를 해서 나중에 뉘우치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세 가지 벌을 준비하십니다. 삼년 동안의 가뭄, 석 달 동안 칼에 쫓기는 것, 그리고 사흘 동안의 전염병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짧은 것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날 동안 7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을 선택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같은 죄의 벌을 위해 하느님께서 서로 다른 양의 보속을 내놓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결코 사흘의 전염병이 다른 고통보다 적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막심 퓌상의 연옥실화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성 안토니오의 말에 의하면, 오랫동안 앓고 있던 회개한 한 죄인이 하느님께 죽기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 죽어서 3일간 연옥에 있든지 또는 2년간 이 병을 참아 받고 바로 천국에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병자는 주저하지 않고 연옥을 원했습니다. 얼마 후에 천사가 연옥에 갔는데 그 환자가 천사를 보며 말했습니다.
“사흘만 있으면 될 이곳에 나는 벌써 몇 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습니다.
“아니, 그대는 여기 온 지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청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인간 세계에 돌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거기서 가장 괴로운 병을 몇 해라도 즐거이 참아 받겠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병자는 연옥의 엄청난 고통을 기억하고 그저 인내했을 뿐만 아니라 크나큰 기쁨으로 먼저의 병을 잘 참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치릴로는 연옥의 아주 잠시의 고통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크다고 했고,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에서 당한 라우렌시오의 고통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이 크다보니 연옥에서의 시간은 이 세상의 시간보다 훨씬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보속의 시간이 짧다고 결코 얕잡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위 세 가지 제시된 벌을 다 거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죗값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이고 이는 참으로 죄를 뉘우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죄가 용서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벌을 받을 각오도 돼 있어야합니다.
혹은 우물쭈물 하다가 그 벌을 받기 전에 죽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라도 죗값을 치르고 깨끗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죄에는 반드시 죗값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면,어떻게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다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죗값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치러졌습니다.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에서 키레네사람 시몬이 져야 했던 고통이 있는 것처럼, 내 죄에 대한 나의 보속도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그분이 해 주시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분에게 전가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청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연옥은 결국 우리가 남은 죗값을 청산할 수 있는 은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의 보속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굳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로마에서 한 방탕한 부인이 청년을 타락시키고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영혼 같은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나 다만 때때로 연옥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은 갑작스레 그 천한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범한 죄가 무서워져 통회하고 고백하여 올바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연옥 영혼이 은인을 위해 기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감탄할 만한 최후를 마쳤고 그의 영혼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는 영혼들은 하느님 앞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백성 7만 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죽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백성이 아닌 자신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남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그 고통의 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항상 비르짓다의 기도를 추천해줍니다. 1년 동안 바치는 주님수난 15기도는 15명의 연옥영혼을 구해준다는 약속이 있고, 12년 동안 바치는 주님성혈 7기도는 자신 또한 연옥에 가지 않게 해 준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굳이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나 1년간의 금식보다 더 낫다.”
미사보다 큰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나의 죄와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큰 보속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이 세상에서 나의 죄에 대한 보속을 다 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잊혀진 연옥영혼들을 위해서도 공로를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사랑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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