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44-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가 뽑은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스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에 에티오피아의 한 고관을 만났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고관에게 필리포스는 그 뜻을 알게 해 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푼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신다. 만나를 먹고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달리 생명의 빵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벨기에 출신의 유명한 화가인 루벤스의 그림 중에 ‘시몬과 페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백발의 늙은 죄수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젖을 먹는 모습입니다. 언뜻 보면 너무나 선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배경에는 고대 로마 역사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늙은 죄수는 감옥에 갇혀 굶어 죽는 형벌을 받은, 페로의 아버지 시몬입니다. 그의 외동딸 페로가 아버지에게 면회 갔다가 굶주린 아버지를 보고는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젖을 물립니다. 매일 이렇게 아버지를 먹여 살리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로마 당국은 감동하여 시몬을 석방하게 됩니다. 딸 페로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을 때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프지 말아야겠다. 이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헛되게 돈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는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체가 되시어 오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숭고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굶어 죽지 않도록 그분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딸 페로가 아버지 시몬에게 젖을 물리는 그 사랑보다도 더 깊고 숭고한 사랑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은 목숨입니다. 목으로 쉬는 숨입니다.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끝장입니다. ‘생명의 빵’은 이 ‘숨소리’를 있게 하는 에너지라는 표현입니다. 하늘이 사람의 목숨을 관장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보호자’가 되십니다. 실제로 많은 이가 죽음의 고비를 넘깁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습니다. 돌아보면 위험하고 아찔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보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하느님의 손길로 봅니다. 그런 믿음이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조신철 가롤로는 천민 출신입니다. 23세 때부터 북경을 오가던 ‘동지사’의 마부로 일했습니다. 30세 때 ‘정하상’ 성인을 알게 되어 입교합니다. 그 뒤에도 계속 마부로 일하며 선교사 영입에 깊숙이 관여합니다. 언제나 어려운 처지의 교우들을 찾았고, 자신처럼 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다 기해박해(1839년) 때 체포됩니다. 선교사들의 은신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침묵했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돌아보면 천민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양반이나 부자가 무슨 소용 있을는지요? 모두 그분께서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감사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
‘생명의 빵’은 요한 복음 6장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그 빵을 성체성사 안에서 체험합니다. 진정 우리는 얼마만큼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고 있는지요? 성체에 대한 일차적 신심은 정성입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규정한 것도 정성을 기울이라는 의도였습니다. 지금은 공심재가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한 시간 전까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할뿐더러 입 안에 침이 생기면 뱉어 내도록 하였습니다. 서양 신부님들의 지나친 규제가 아니라 그만큼 정성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그 규정을 끔찍이도 지키셨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성체를 모시면 삶이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분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인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면 아무리 자주 모셔도 그 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고도 생명이 자라지 않는 이유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성체를 모셔야 신앙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인생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됩니다.
그분의 도우심
-김대열 신부-
돌아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나 또한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언제나 그분께서 함께하셨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 신학생 시절, 사제로 살아온 20년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는 아픈 소리도 적지 않게 질러댄 삶이었지만, 사실 그분은 항상 내 곁에 계셨음을 알고 있다. 왜 아픈 일이 없었겠는가? 왜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을 온몸, 온 마음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당신은 왜?”라는 질문을 곧잘 하느님께 던진다. 늘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마음 상하기 일쑤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분께서는 늘 우리 각자의 곁에 계신다.
우리보다 더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시려 항상 성심을 다하시는 분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분께 비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빌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제발 내가 이끄는 길을 걸으려무나.” 하고 말이다.
하늘의 이야기, 땅의 이야기
- 반명순 수녀-
그분은 자신의 아파트와 평수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어느 구의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지금은 다른 구의 아파트로 이전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반상회도 호텔에서 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긴 제 눈빛이 마땅치 않았는지 “수녀님께서 저를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그 한마디가 더 모호 했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척도로 재화의 수치를 내놓지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척도는 생명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얼마나 생명을 키워가며,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그 사람의 품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재화는 안락함?·?편리함?·?유용함을 주는 반면에 생명력을 잃게 합니다. 생명을 얻는 일은 단순하되 불편하고?(일회용), 작은 일이건만 부담스럽고?(세제 사용 절제), 자연스럽지만 귀찮은 일?(분리수거)입니다. 그러나 나의 불편함과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이 자연 질서를 바로잡고, 누군가를 배려하는 일이라면 무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화장실에서 두 번 사용하는 물의 양이면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는 두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물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난 이후부터 물을 펑펑?(??) 쓸 수 있는 것 자체가 죄스럽고 마음이 아렸습니다. 말씀과 약속의 땅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그분을 믿는 누구한테나 영원한 생명을 준다면, 그 ‘살아 있는 빵’?을 먹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이 같은 의미로 전달될까요?? 제가 성심을 다해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분은 열정을 다해 땅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갈 수 있으며 생명의 빵을 들고도 그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겠습니까??
어떤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하늘나라는 매우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신자 한 분이 미사가 끝난 뒤에 신부님을 찾아가 물었지요.
“신부님은 하늘나라에 실제로 가본 적도 없으시면서 어떻게 그곳이 좋은 곳인지 알 수 있나요?”
이에 신부님께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네. 그건 아주 쉽게 알 수 있지요.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싫다고 되돌아온 사람은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아주 간단한 답변이면서도 명쾌한 답변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지요. 이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하늘나라가 궁금해서 물어보았고,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그래서 참된 행복이 충만한 나라로 설명해주셨지요.
그렇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나라에 과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께 오는 사람, 예수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마지막 날 다시 살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죽어 없어지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얼마나 믿고 있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부족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생활과 정반대의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믿음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믿음의 표현을 입으로만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단순히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해야지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만 했다고 해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두려워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었지요. 며칠 전 복음에서도 나왔듯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자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삶 안에서 간직하는 두려움, 걱정, 의심 등의 마음들이 바로 믿음 없음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생명의 빵 그 자체이신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며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두려움, 걱정, 의심 등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너무 좋아서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는 그 하늘나라에 우리 역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기적이다(베일리).
완전한 믿음
-박민서 신부-
아버지께 완전하게 신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완전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주 작은 꼬마가 엄마가 사주신 새 옷을 입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온 아들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모습은 손과 발은 물론 새로 사준 옷마저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엄마는 속상하고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엄마를 향해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변하지 않을 엄마의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의 그 마음을 느끼고 아들을 꼭 안아주며 자신 안에 샘솟는 아들에 대한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한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쌓이고 다져지는 대지와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매 순간 실천하게 되면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길라잡이
-김찬선신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올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온 이, 즉 당신만 아버지를 봤기에 당신 외에는 아무도 직접 하느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배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풀이를 하면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1) 하느님을 직접 뵌 분은 예수님뿐이니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제일 잘 알고 전해 줄 분은 예수님이고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당신께 온다고 하시니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고 3) 그러므로 이런 존재 덕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예수님께도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계시이지만 예수님 말고도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얘기한 바 있지만 해, 달, 별, 공기, 바람, 풀과 나무, 이 모든 것이 말은 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요즘 같은 봄에는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대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말 못하는 피조물들이 이러할 진데 신비를 감지하고 얘기하고 그릴 줄 아는 인간은 하느님 말씀의 더 완전한 전달자입니다.
공자가 그러하고 노자가 그러하고 석가가 그러하고 마호멧이 그러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 때 복음과 성경보다도 불교서적과 노자의 글에 더 심취했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복음과 성경의 말씀이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읽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석가나 노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해하니 얕고 협소했던 복음과 성경의 이해가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노자의 말씀과 다른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노자의 말씀을 내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노자의 말씀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글라라는 유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와 자기의 관계를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애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글라라는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갔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간 것입니다.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길라잡이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길라잡이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라잡이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은 우릴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된다는 얘깁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양승국신부-
<봄날 아침 수도원 풍경>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 귀여운 꼬마 강아지 한 마리가 이제 걸어 다닐 만하다 보니 수도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닙니다. 병아리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닭장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큰 형뻘 되는 덩치 큰 개 앞에서 괜히 까불다가 제대로 한번 물렸습니다. 깨갱거리고 엄마 품으로 달려갑니다. 어미는 ‘조심하라 그랬지? 그래 많이 아프냐?’는 얼굴로 낑낑대는 녀석의 물린 곳을 핥아줍니다.
한 끼 걸러도 배고프지 않는 따사로운 봄날 아침, 수도원 풍경입니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가끔씩 듣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질적 충족만이 반드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합니다.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출근한 엄마를 대신한 할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들어있습니다. 자면서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는데, 앙증맞게 작지만 우리 것과 똑같습니다. 그 아기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얼굴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욕구들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갑니다. 먹은 것에 대한 욕구, 지식을 탐구하고픈 욕구, 명예를 쟁취하려는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위에 올라서고 싶은 욕구...
그런데 이런 세상의 욕구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아쉬움만 남습니다. 허탈함, 공허함, 불완전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욕구 중에 가장 큰 욕구이자 상위의 욕구인 영혼의 욕구, 불사불멸의 욕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욕구를 충족시켜보고자 애를 썼습니다.
구약시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어렵고 난해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무수한 율법을 제정하였고, 엄격하게 적용함으로 인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당시 백성들에게 구원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 내겐 해당되지 않는 구름 위의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구원은 너무나도 간단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제시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너무나 간단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는데 천재셨습니다. 그 많던 구약의 계명과 율법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복잡하고 어려운 줄 알았는데, 너무나 쉽게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겸손하면 됩니다. 단순하면 됩니다. 순수하면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늘이 무너져 내릴 때>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는 한 형제분이 계십니다. 저보다 나이는 많으시지만 오랜 친구와도 같은 편안한 분인데, 한마디로 천사표입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한 잔 할까요?"하고 물으면 한번도 "오늘은 바쁜데" 하고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남 가슴 아파하는 것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에 그분 월급에서 술값으로 지출되는 돈이 상당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상(喪)이라도 당하면 그분은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팔을 걷어붙이고 덤벼듭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이나 직장동료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그분과 한잔하고 싶어하고 그분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많이 배웠다든지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재산가도 아닙니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빽이 든든한 사람이어서 줄을 댈만한 사람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 그분 "인기"의 비결이 무엇인가 유심히 관찰해봤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그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 만나면 편안하고 포근한 사람이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술좌석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내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가장 존중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괴로워서 다가갈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찾아갈 때마다 그저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는 그분을 통해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측면을, 그리고 천국의 한 순간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가 죽을 것만 같아 찾아갈 때마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며 우리의 어깨를 감싸주시는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끝도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한 감미로운 휴식처가 되어주시는 분, 우리의 갈증을 다가갈 때마다 원 없이 채워주시는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랫동안 신선한 음식을 먹지 못한 파리가 있습니다. 음식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물을 쳐놓고 있었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무시무시한 파리채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지요. 파리는 사람들이 자기를 왜 괴롭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인 벌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요. 그러자 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더러운 것을 싫어해서 그래. 네가 병균을 옮길까봐 그런 거야.”
파리는 벌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요.
“쳇, 간단한 일이군. 목욕 한번만 하면 그만 아닌가?”
파리는 곧바로 목욕을 하러 날아갔습니다. 물구덩이에 이른 파리는 이내 그 속으로 풍덩 들어가 몇 번 날개를 팔락거린 뒤에 식사하는 사람들 곁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 주위를 날아다니며 소리쳤지요.
“저는 지금 방금 목욕을 끝내고 왔어요. 그러니까 함께 밥을 먹자고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 파리를 보자마자 파리채를 휘둘러댔고, 얼마 가지 않아 파리는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목욕한 파리와 함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아무도 파리가 목욕했다고 해서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목욕을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파리는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리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하지요. 목욕만 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은 우리 인간들 역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만이 늘 맞고, 이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못된 것이라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식대로 판단했고, 자기 식대로 따라오지 않는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형으로 단죄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나에게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엄격한 모습, 나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남은 많은 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임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 없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밥이시기 때문에,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주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너무 쉽게 빠져버리고 맙니다. 바로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리의 이야기처럼, 잘못된 판단 속에서 잘못된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내 뜻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이끌려고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자신이 유능해서 관리자가 되었다고 믿는 순간 부하들은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테리 켈리)
살아 있는 빵
- 정명숙 수녀-
언젠가 읽은 <가시고기>가 생각납니다. 간암 말기인 아빠가 자신의 눈을 팔아서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살리는 아빠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아빠의 사랑은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빠의 걱정은 오직 아들에게 가 있습니다. “아빠는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란다. 세상에 널 남겨놓는 한, 아빠는 네 속에 살아 있는 거란다. 너는 이 아빠를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겠지. 하지만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란다. 네가 지칠까봐, 네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설까봐 마음을 졸이면서 너와 동행하는 거란다. 영원히 영원히….” 예수님의 사랑 역시 오로지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려는 주님의 사랑은 당신 생명까지 내어주십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성사 안에서 다시 쪼개어져서 우리에게 먹히십니다. 그만큼 우리 각자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귀한 존재입니다. 쪼개진 성체는 나에게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오시어 우리를 하나로 모으십니다. 소외되고 미움과 불신으로 병든 인간의 마음을 회복시키시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이 사랑을 나를 통해 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내가 바로, 그 치유하고 하나로 모으는 예수님의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오정순-
남극의 펭귄이 우리 눈에는 모두가 흑백의 디자인을 한 옷을 입은 듯 같아 보이지만 제 어미는 제 새끼를 기막히게 찾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하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워도 엄마는 아들을 기막히게 찾아내는 것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는 교사도 있다. 그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하느님은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은데 자꾸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느낌이 불편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대체로 좋은 물건을 싸게 내놓아도 사람들이 골라가지 않으면 주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후회하지 않을 거라며 사도록 권한다. 아마도 권하는 장사가 남는다는 말이 그래서 만들어졌을 거란 생각에 이른다. 물건 파는 사람이 평소 신뢰감을 주던 사람이면 당장 그 물건을 집어 들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의 삶이 건강해서 본받고 싶으면 일단 귀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권면받을 때는 바로 이끌음을 받을 때라는 것을 눈치 채기까지는 경험을 통해 감각을 익혀야 한다. 좋은 것을 잡을 때를 놓치고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그때 그럴 걸.’ 하며 후회해 봐야 때는 늦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어찌 나를 골라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 일이 무슨 대수겠는가 싶어 웃을 때가 있다.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 당신을 고백하라고 이 난을 허락하셨습니까?” ●
생명의 빵
-전삼용신부-
대학 교수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처음에 개신교에 다니다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자매님은 영성체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개신교 다닐 때는 말씀으로만 영하던 그리스도의 몸을 이젠 직접 살과 피로 모시게 됐는데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전 제가 이상한 건지 당연한 듯이 받아 모시고 들어가는 신자들이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체가 무엇인지 더 깨달아나가야 합니다. 마리아 비안네 성인은 사제들이 자신들이 축성하는 성체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 대학 다닐 때 대학에서 어떤 신부님과 야외미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미사가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전례를 한국식에 맞게 토착화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알려주기 위하여 서양적인 음식인 빵과 포도주대신 떡과 막걸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몰랐지만 신학을 조금 배운 지금 그런 토착화는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를 위한 제물로 결정하셨다면 이것은 바뀔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바뀔 수 없는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멜키세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빼앗겼던 자신의 식솔들과 재산을 되찾아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지나게 됩니다. 그 때 (예루)살렘의 왕이자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 나옵니다.
아브라함 때는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온 이스라엘 지방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왕(멜키세덱)이자 평화의 왕(살렘: 평화)인 멜키세덱에게 자신의 재산 중 십분의 일을 바치며 하느님께 축복을 빌어달라고 합니다. 멜키세덱은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를 바치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성조 중 성조였다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치고 축복을 청하였던 멜키세덱은 모든 이스라엘 성조보다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대사제 멜키세덱으로 역시 빵과 포도주를 주님께 바칩니다. 빵은 당신의 몸이고 포도주는 당신의 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이미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빵은 밀을 빻고 물로 반죽하여 불에 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죽어야함을 예고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밀알인 것입니다. 이 밀알은 부서지고 잘게 갈려집니다. 사제가 빵을 자르는 것도 그리스도의 심장이 찢겨짐을 상기시켜 줍니다. 밀이 빵이 되는 과정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게 합니다.
즉, 당신의 죽음으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죽고 우리는 살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를 영할 때 우리가 영하는 것은 단순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영하는 것입니다. 그 성체가 생명나무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심장을 찢어 주시는 동시에 그 속에 당신 자신이 들어가 계십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는 그분의 살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영혼과 육체를 모시는 것이고 나의 영혼과 육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일치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끝나지 않고 나를 죽이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생명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짧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전거의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실까?’를 끊임없이 물어보며 내 의지가 아닌 그 분이 사시는 것처럼 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최후의 만찬 때 첫 영성체를 한 사도들이 세상의 무서움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일치가 삶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아직 생명의 양식은 내 안에서 참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혼인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매 순간 잊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죽이신 그 분을 생각하며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산 순간만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짧은 묵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하인을 하란 땅 자신의 친척들이 사는 동네로 보냅니다. 그 곳에서 자신의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인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나 이사악에게 데려오고 둘은 그렇게 혼인하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여 자기 옆에만 끼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좋은 짝을 찾아서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참 부모의 도리일 것입니다. 자녀를 며느리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은 아직은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정말로 사랑한다면 자녀에게 아브라함처럼 좋은 짝을 찾아 주어야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찬가지로 자신의 하인인 가브리엘을 나자렛으로 보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시며 성자와 한 몸을 이룰 것을 서약하십니다. 이로써 성자는 마리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우리 각자와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해 신부를 마련해주시고 아들에게 그 신부를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우리가 원하기 이전에 성부께서 우리를 아드님께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질투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할 상대를 소개시켜주는 사랑입니다.
만약 부부가 자신들만 알아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은 자녀만을 사랑해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들 품에만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사랑, 부부간의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이런 사랑들은 서로간의 사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고 점점 더 커지는 본성이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God's Project
-김찬선신부-
어제와 오늘의 사도행전은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스테파노의 사건으로 주님을 믿는 무리는 흩어지게 됩니다. 기업으로 치면 파산이고 공동체로 치면 해산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적 공동체는 깨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헤어집니다. 망했습니다. 끝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루살렘이 망하니 디아스포라, 즉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인간이 도모한 것을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으로 바꾸십니다. 마치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형제들의 시기질투 때문에 요셉이 팔려간 것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원 계획으로 바꾸심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필리포스 얘기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필리포스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인간적인 삶의 근거를 잃고 인간적인 관계도 다 끊어졌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고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인도로 갈 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만이 모든 이유가 되었을 때 하느님의 계획(God's Project)이 열립니다. 유력자 간다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관계를 엮으시고 그를 통해 더 큰 일을 더 폭넓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의 사건은 또 다른 하느님 계획의 시작입니다. 이 일에 가담한 사울을 당신 계획의 도구 삼으십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성공한 것이 오히려 잘못 되는 수도 있고 망한 것이 성공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틀 전 화요일은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습니다. 낮에 각종 모임 및 여러 약속이 있었고, 저녁에는 미사와 예비자교리까지 있었지요. 아무튼 예비자교리까지 모두 끝낸 뒤, ‘피곤하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인 프로야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날은 제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었거든요.
점수는 1:1. 9회 말로 상대팀 공격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연장전까지 가야한다.’를 외치면서, 응원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상대팀의 공격을 잘 막았고 이제 연장 10회 초 공격입니다. 첫 번째 타자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입니다. 실망했지요. 그러나 2번과 3번으로 이어지니까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타자는 저의 예상과는 달리 삼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더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제 10회 초의 마지막 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세 번째 타자에서 대타가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너무 피곤했는지 그만 깜빡 졸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깜짝 놀라서 깨어났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점수가 바뀌었습니다. 1:1에서 2:1로 말이지요.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보니 대타가 홈런을 친 것입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좋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인 홈런 치는 순간을 못 봐서 얼마나 서운하던지요. 만약 홈런 치는 순간을 보았다면 정말로 신나서 혼자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그 순간을 보지 않으니까 그저 그렇더군요.
맞습니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더 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네요.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이 살아 있는 빵으로, 당신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당에서 영성체 할 때에만 신자답게 살고, 사회로 돌아가서는 세속에 물들어서 대충 살라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살아 있는 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변함없는 자리에 계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변함없는 모습으로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누릴 큰 기쁨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신앙인답게 살아갑시다.
개똥과 주님
-김찬선신부-
어제 말씀 나누기에 강론을 올리고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새벽 묵상을 성체 앞에서 하는 대신 뒤뜰에서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도 잃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저는 이 뒤뜰에 있는 꽃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다 볼 거라 마음먹었습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의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이 감나무 한 그루와 모과나무 외에는 모두 꽃이나 싹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내 집에 이렇게 귀한 꽃들을 놔두고 멀리 구례나 하동으로 꽃구경 간다면 이것은 우리 꽃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홀히 본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아무리 다 보아도 빠뜨릴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안개꽃 같은 이름 모를 꽃에서부터 동백꽃과 벚꽃까지 꽃뿐 아니라 모든 싹까지 샅샅이 훑으니 그 꽃들이 내 꽃이 되어 사랑스럽고 내 꽃은 하느님 꽃이 되어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후는 제가 영적보조를 맡고 있는 토마스 모어 형제 회 화곡 구역 할머니들을 찾아뵈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한 번도 월례회에 나오지 못한 분들, 그래서 제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을 찾아뵈었더니 할머니들께서 그렇게 좋아하시고 고마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찾아 만나 뵈니 이름도 모를 할머니들이 소중한 저의 어머니들이 되시고 저는 할머님들께 좋은 일을 한 기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살리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하루 종일 저의 묵상거리로 이어졌는데 하나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잃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그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고맙고 마지막 날까지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마침내 구하시겠다는 그 끈덕지고 집요한 사랑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기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질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역시 믿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지 회의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고 끝내 주님도 어쩔 수 없는 잃은 양이 될 것이고 믿는 사람은 언제고 주님께서 되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에서는 당신을 보고 믿기만 하면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만이 빵이 성체가 되고 성체가 생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우리는 한 번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개똥도 약으로 쓸려면 없다고 자기의 운 없음을 넋두리하고 그 보잘 것 없는 것도 자기 필요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남 탓을 하는데 정작 생명의 빵으로 옆에 대기하고 계신 주님을 몰라보고, 필요치 않다 하는 우리의 불신을 봐야 합니다.
내 집의 꽃들은 팽개치고 멀리 가서 꽃을 찾는 나, 내 옆에 늘 계신 주님은 평소 개똥처럼 팽개쳐두고 썩어 없어질 빵이나 찾는 불신의 나는 아닌지 오늘 아침도 성찰해 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양승국신부-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수도원을 오르는 언덕길이 ‘환상’입니다. 왼쪽으로는 샛노란 개나리가, 오른쪽으로는 벚꽃이 만발해, 마치도 천국으로 오르는 언덕길 같습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고, 이 절경도 잠깐이겠지요. 벌써 수많은 꽃잎들이 잠깐 내린 비에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결같지 않다는 것,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 세상 것들이 지닌 특징입니다.
절정의 나날에 그 화사했던 얼굴들이 며칠가지 빛을 바랩니다. 유한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이 형상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입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처럼 속절없이 눈 깜짝할 순간에 세상 것이 사라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또 다시 희망으로만 가득 찬 우리의 하루를 활짝 펼치십니다. 결국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매일이 새 출발이요, 매일이 절정이요, 매일이 천국입니다.
결국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 끝까지 청청하게 남아있는 것,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뿐입니다.
꽃그늘 아래서 세상을 바라보니 온천지가 천국입니다. 때로 미워보이던 형제들도 한 송이 꽃처럼 어여뻐 보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은총일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죽음조차도 축복으로 변화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분께서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서면 세상이 온통 꽃길일 것입니다.
그분께서 매일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몸을 영하고 이웃을 바라본다면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천사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성체성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지상에서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을 주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을 알아보는 방법
-임준기 신부-
우리는 흔히 잘못된 기대와 생각을 ‘선입견’이라 말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기만의 생각과 기대는 결국 진실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실수를 범하게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그들이 보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평범하게 생긴 예수님 같은 분이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집 때문에,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은 구원의 진리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과연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익숙한 얼굴의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의 현존을 일깨우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이 진실을 깨우칠 때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그리고 ‘예수님의 살이 생명의 빵이 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감사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
- 김우정 신부-
언젠가 부모님의 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자녀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시며 마음속에 있는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남몰래 짊어지신 부모님의 손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투정과 응석만 부렸던 것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내 생각만 했구나.’ 하고 뉘우칩니다.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보니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끄는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해도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껏 그렇게 해왔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바라보던 입장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손에 굳은살이 박혀 있듯이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어 주신 못자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그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분의 눈에 아직도 우리는 응석받이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우리 곁에 묵묵히 서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성당에 가면 우리는 하루 종일 잠들거나 눈도 감지 않으시고 감실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모든 것을 들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이고,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그런데 때로 다른 것을 넘보고 주님께 불만과 답답함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 대신에 다른 것을 자꾸만 넘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줄 빵은...
-오상선신부-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고 장엄하게 선언하시더니 이제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고 천명하신다.
아, 나는 무엇을 줄 것인가? 내가 나누어 줄 빵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줄 빵은 지식이다???> 아니다. <내가 줄 빵은 위로이다???> 그것도 아니다. <내가 줄 빵은 평화이다???> 더더욱 아니다. <내가 줄 빵은 돈이다???> 천만에 올시다.
<내가 줄 것이라고는... <내 몸뚱아리 하나 뿐이다!>
그렇다! 이것이 정답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하나 뿐인 내 몸뚱아리를 내어 놓음으로써 뒤따라 나오는 결과일 뿐이다.
오늘은 비록 건강하지는 못하지만 튼실하지는 못하지만 힘이 좋지는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내 몸뚱아리를 한번 온전히 내어 놓아보자. 몸을 사리지 말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먼저 온 몸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주님의 작품인 이 썪어 없어질 몸뚱아리로 말이다...
<독서> : 믿음과 열정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린 내시
-경규봉 신부-
필립포스는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예루살렘에서 가자(예루살렘 서남방향 약 7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내려가는 길을 가던 중에 에티오피아(검은 피부란 뜻) 여왕의 내시로 왕실 재정을 담당한 고관을 만난다. 그는 내시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지만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먼 길을 순례하러 왔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유대교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신심 깊은 그는 마차 안에서도 이사야 예언서를 큰소리로 읽고 있던 중에 필립보를 만났다. 그는 필립보를 자신의 마차에 오르도록 권유하여 필립보로부터 성서 말씀과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필립보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쁨이 충만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이방인으로서 아마도 흑인이었고, 거세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국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대단히 멀음에도 불구하고 순례하였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이 컸던 것이다. 그는 순례하는 길에서도 예언서를 큰소리로 읽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자 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열정을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소중하게 여기셔서 필립보를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세례를 받도록 하심으로써 그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셨다. 이처럼 주님을 통한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된 내시는 아마도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겉을 보지 않으시고, 그 내면을 보신다. 그의 지위, 가문, 재산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내면에 있는 믿음과 사랑, 열정을 보신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열정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신다. 당신께 믿음을 두고, 당신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 말씀으로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아니,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사는 깊은 신앙인,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체험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로마 3,22)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로마 4,5)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하느님께 드릴 공덕이 없을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성체성사는 영성생활의 알파요 오메가 -김영훈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대자연의 빛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어느덧 봄기운이 가득함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이렇듯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부활시기가 있다는 것,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이 가리키는 바, 영적으로 새로 보고 새로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원래 첫 번째 계절을 가리키는 ‘봄’이라는 어원도 눈으로 새로 소생하는 만물을 본다는 것에서 파생했다고 하지요. 아무튼 이 따뜻한 봄에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가중시킬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으로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이 없는 유다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자기 살을 양식으로 준다는 표현은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실제로 외인들에게 식인종으로 오해받기도 했답니다. 외인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 마다 비밀리에 모여 이상한 예식을 행하는데, ‘이는 내 몸이니 받아 먹어라. 이는 내 피니 받아 마셔라.’고 하니 오해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찬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성찬례의 기도문만 들었을 때는 충분히 식인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아무튼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는 표현은 매우 영적인 말씀입니다. 살이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살을 양식으로 내어준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었듯이 삶 전체를 인류를 위해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을 전부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예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주님을 펠리칸에 비유했습니다. 펠리칸은 자신의 살까지도 새끼를 위해 토해 내는 새입니다. 주님께서는 펠리칸처럼 삶 전체를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성체성사와 연관하여 묵상해 봅시다. 우리는 매 미사 때 마다 빵의 형상으로 오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이는 단순한 상징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찬례 중 사제의 축성과 동시에 빵이 실제 주님의 몸으로 변화됨을 믿습니다.
영성체는 희생적인 주님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는 행위입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내 안에 영적으로 주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톨릭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성체에 대한 믿음과 존경 없이는 그 어떠한 신앙생활도 건강할 수 없습니다. 성체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봄의 향연이 가득한 요즘 우리는 무엇으로 영혼에 싹을 틔우고 있습니까?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서 혹 잊고 살지는 않은지요? 성체성사, 그것은 영성생활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감
- 노성호 신부-
처음으로 부임한 본당에서 저는 공교롭게도 첫날부터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교우들의 환영과 축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 장례미사가 있어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첫 부임지 첫 미사를 집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중에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 그 순간 저는 제 앞에 누워 계신 그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그분은 주님께 나아갔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주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첫 부임지의 첫 미사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깊이 깨달으며 그분과 함께한 은총의 시간이었고, 제가 그분의 도구로서 누군가의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소중한 날이었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의 영혼도 그냥 그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으시니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그분께서 오늘도 세상에 새 생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나아가야겠습니다.
- 이상일 신부-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하느님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지향하고 지성과 감성, 양심과 자유의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희망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쓰는 말 중에 ??살아도 사는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건강하고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나 마음 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이러한 말을 쓰지 않습니까? 인간이 산다고 했을 때 그것은 결국 육체적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 마음 적으로도 충만해야 산다고 말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 우리 사람은 영혼도 충만해야만 결국 살아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채워졌다고 느끼더라도 영혼이 충만치 못하면 채워짐은 채워짐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과 세상적 풍요로움으로 정신과 마음이 흡족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것이 그 차제로는 영원할 수 없기에 영원을 향해 열려있는 영혼이 채워져야만 살아있음의 생명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혼이 채워지고 나머지 다른 요소들은 부족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줄 알기에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영원성이 담겨 있는 영혼이 채워져 생명력을 지니면 죽어 없어지는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해도 우리 존재는 이미 영원성이 확보되었기에 영원한 생명력이 다른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채워짐에 있음을 느끼게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에 생명력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내어 놓으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는 여기에서 이미 영원한 삶을 준비하도록 하는 삶의 원리가 되어 주셨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다시 살리시는 구원의 원천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 예수님께 가야만하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믿어서 예수님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어 없어지는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이 음식이라면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 존재에 생명을 주는 것은 생명의 빵인 예수님이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빵으로서 우리 안에 모셔서 존재의 살과 피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시려고 먼저 다가오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 경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언서를 읽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하느님께서는 필리포스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에 내시는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청하여 받고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세례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모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기뻐하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고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간 내시만큼 기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를 청한 내시처럼 우리도 세상이 주는 기쁨 앞에서 하느님께 우리를 이끌어 주시라고 청하며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자주 모시도록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구원자
-김유철 신부-
믿음은 아무나 다 갖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어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유일한 소원은 할아버지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계속된 간곡한 부탁에 할아버지는 마침내 믿음을 갖기로 약속하고 예비신자 교리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교리를 듣더니 그 다음부터는 안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오른쪽에 있던 강도가 마지막에 회개하자 예수님이 천국에 제일 먼저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신앙을 가지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하게 되고, 죄를 많이 지으면 천국에 꼭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게 되지만, 할 것 다하다가 우도처럼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늘 나라에 확실히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의 모든 생활을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안전장치 하나 만들어둔다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활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생활로 바꾸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어떤 생활 자세를 좋아하는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노력을 기울입시다.
성체 모시는 올바른 방법
-이세영 수녀-
여기 두 할머니의 식사 모습을 통해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한 할머니는 깨끗한 환경에서 식사하길 원하지만 늘 파리가 날아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파리를 쫓아내고 식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파리를 따라다니다 보면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밥을 먹으려 했던 목적도 잊어버린 채 정신없이 파리만 쫓습니다. 하지만 날쌘 파리는 둔한 할머니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파리만 쫓아다니다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할머니는 파리가 가까이 와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파리가 또 날아와도 할머니는 식사에만 열중합니다. 이렇게 날아오는 파리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식사를 잘한 할머니는 건강을 유지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심하다고 하는 신자들은 분심·잡념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싶어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분심·잡념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분심·잡념을 없이하는 것에만 열중하면 오히려 첫 번째 할머니처럼 성체를 올바로 모실 수 없습니다. 날아다니는 파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여유 있고 기분 좋게 식사를 다 하는 두 번째 할머니처럼 분심·잡념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고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분심·잡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으로, 살아 있는 빵으로 내게 오시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 여유로운 마음으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성체를 올바로 모시는 방법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영혼의 곡기>
-양승국신부-
임종환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곡기(穀氣)’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특히
노환으로 인해 임종이 가까워진 어르신들, 어느 순간까지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도 숟가락으로 미음을 떠서 입 가까이 가져다 드리면 어렵사리 드시곤 하십니
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숟가락을 가져가도 입을 꽉 다무십니다. 고개를 저
으십니다. 곡기를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체력은 급격히 저하됩니다. 에너지 공급이 안 되다보니 건강은 순
식간에 악화됩니다. 의식도 점점 몽롱해집니다. 그리고는 며칠 못 넘기시고 임
종을 맞이하십니다.
‘곡기’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건강한 우리들에게 있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것 별 일 아니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소화기능이 약하신 분들 가운데 죽 한 그릇 앞에 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실랑이를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먹고는 싶은데 몸에서 안 받는 분들 그분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삼시세끼 잘 먹어줘야 흡수된 음식물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며칠 밥 못 먹으면, 곡기 끊으면 그길
로 내리막길이요, 황천길입니다.
‘육신의 곡기’도 이처럼 중요하지만 ‘영혼의 곡기’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
니다.
‘육신의 곡기’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특A급’으로 챙기지만,
‘영혼의 곡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영성생활에도 곡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곡기란 다름
아닌 성경말씀과 성체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경말씀을 꼭꼭 씹어 드
셔야만 합니다. 매일 무상으로 우리에게 건네지는 성체를 지극한 정성으로 받아
모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과 성체로부터 멀어진다면, 마치도 곡기를 끊은 임종환자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사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성체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쩌면 그는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영혼의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우선 재미가 없습니다. 세상만사
가 시시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감사거리 앞에서도
매사에 불평불만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살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곡기를 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
떻게 해서든 삼시세끼 밥 먹듯이 지속적으로 영혼의 곡기를 드셔야만 합니다.
성경 말씀과 성체 중심의 삶을 통해 우리 영혼은 깨어날 것입니다. 진정으로 숨
쉬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김동원 신부-
◆믿음은 나침반과 같아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 세상살이 한가운데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됩니다. 인생 여정에서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믿음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을 마치 신앙처럼, 지식이나 능력이나 돈이나 권력에 자신을 바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수단을 믿을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가리켜 주는 진리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진리란 참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며, 참된 삶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헛되기 마련이고, 진리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믿음이란 한 상대를 받아들이고 또한 자신을 그 상대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여 참된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믿고, 또한 자신을 그 상대에게 순수하고 단순하게 맡기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살게 하심으로써 그분이 전한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생명을 향하여 나의 삶을 바쳐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죽을 양식을 먹게 하지만 진리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빵을 받아먹게 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이기양 신부-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가톨릭 교회가 그 주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는 유럽의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분야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또 모든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큰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지요.
이렇게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또 앞으로도 끌어갈 그리스도교의 태동과 전개 과정을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시작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으며 또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지를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여실히 느낄 수가 있지요.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던 사도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방대하고 거룩한 조직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이야기되어 있고 오늘 독서를 통해서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대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초대 교회의 놀라운 열성과 성령의 섭리를 동시에 느낍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초대 교회를 세우고 죽음 앞에서, 또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증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환난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면서 박해 또한 기쁘게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노력 속에 초대 교회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지요. 요즈음 독서가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은 사도행전보다는 ?성령행전?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중심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그 열심한 활동 뒤에, 그리고 그들의 역할 앞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의 부활 체험을 더욱 증폭시키시고 그들 활동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도들이 순리대로 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이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은 몇몇 개인의 체험으로 머물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자 노력할 때 그 체험은 더욱 깊어지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발걸음에 함께 했던 성령께서 풍요로운 결실을 이루어주시고 또 우리에게 깊은 체험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부활의 기쁨은 그것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 중의 한 사람인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곳 저 곳을 다닌 필리포스에게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주님의 천사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시지요. 지금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은 필리포스가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단지 도구이며, 복음을 전하고 결실을 맺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는 그저 성령께서 시키신 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필리포스는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놓았으며 성령은 그 결실을 풍요롭게 열매 맺어 주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이 부활의 기쁨을 성령의 풍요로운 열매로 연결시키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독서가 그 답을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을 우리 삶의 교과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 언변이 부족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진하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언변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에 겁 많은 배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뛰어난 언변과 지혜를 보여주지요. 바로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놓는 순간 베드로는 놀라울 만큼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체험을 더 깊게 하는 바탕은 사도들이 그랬듯이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 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원하시는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그리고 나를 도구로 쓰시도록 기도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의지만 남고 인간적인 의지는 아주 작은 걸림돌에도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 앞서서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또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뜻을 세웠다면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가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시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나를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선교를 하면 자존심을 다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선교를 하려다가 상처를 받고 오히려 본인의 신앙까지도 움츠려드는 안타까운 결과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고 진실 되게 기도하고 자신을 내 맡기면 상처는 이미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좀 우습게 아는 것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사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를 그들의 특권으로 생각했듯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시련이 보람과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쁨이 가득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고 상처를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요.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복음을 전하고서 그 사람이 바로 ?OK!?하고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례성사를 받을 때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오랫동안 머뭇거리고 망설였으며, 계산하고 주춤거렸습니까? 시간이 필요했지요. 관심이 없어서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출발하기까지가 어려운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인간적인 것부터 서서히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담 없이 성당 구경을 시켜줄 수도 있고, 함께 성당에 와서 차를 한 잔 마실 수도 있으며, 마침 우리가 하고 있는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소개하며 추천된 책을 한 권 선물해도 좋겠지요. 굳이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은 책을 함께 나눠보며 인간적인 친분과 우정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날 그는 자연스럽게 하느님 옆에 가까이 와 있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선교를 해야 한다고 하면 교리 지식도 풍부하고 경험도 많으며 언변이 뛰어나서 그 사람보다 모든 면이 월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가 제일 선교를 잘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치부 어린 꼬마들이 제일 잘합니다. 꼬마들에게 제가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한 번 얘기하면 다음 주에 분명히 친구들을 한명씩 데려옵니다. 유치부 꼬마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우리 신부님이 친구 하나씩 데리고 오랬어. 가자.?
?그래.?
그리고는 손잡고 같이 옵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 어른들은 ?가자?는 소리를 하는 데만 몇 달이 걸립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혹시 그 사람이 부담을 느끼면 어떻게 할 것이며, 안 온다고 딱 잘라 거절하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요. 머릿속 계산이 너무 복잡합니다. 내 의지대로 하려고 하고 내 자존심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복잡한 것이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차 한 잔 하자고 권하고, 좋은 책이니 같이 보자고 권하면서 서서히 계기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가장 큰 이웃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코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면 나의 목숨까지도 그리고 나의 미래까지도 다 맡길 수가 있으며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얻을 수가 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이웃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두말 할 필요가 없지요.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언행 속에 주님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환난과 박해를 당하고 목숨까지도 위험에 처하지만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읽으면서 사도들의 그 열정과 성령의 놀라운 결실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속에서 사도들을 이끌었고 초대 교회로 만들었던 성령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면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들이 기쁨과 보람으로 승화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를 실천함으로써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이끌었던 성령을 여러분 모두가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강영구신부-
당신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떤 기도를 바쳤습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인연으로 예수님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제가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인 줄 알겠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 명운(命運)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나라(天國)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지옥(地獄)을 살게 됩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돌멩이도 눈 밝은 수석(壽石) 애호가를 만나면 귀한 돌로 대접받지만, 아이들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는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심히 내버려질 바위도 훌륭한 조각가를 만나면 ‘다비드’상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만남과 인연은 소중합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출신 떠돌이 랍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14,6)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자 축복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늘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의 길을 걸어서 생명에 도달합니다.
당신의 오늘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생명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성체(聖體)다. -박상대 신부-
어제 복음(35-40절)과 오늘 복음(44절-51절)을 함께 보면 바로 연결되지 않고 41-43절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빠진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41-43절) 하시고는 44절의 말씀을 계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다시 한번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 자신에 있다. 예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와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20년 이상 목수의 아들로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神的) 출처를 밝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채워주시기 보다는 이를 일축(一蹴)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신비(神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우리는 어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와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시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립하였다. 이 점을 예수께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계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내심(內心)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성체(聖體)인 것이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결국 육체의 생명을 영위할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聖體)인 것이다. 성체는 세상의 빵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를 받기 위해 우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나아가 이 성체는 '찾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요한 6, 44-51) -유 광수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보살피신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다. 즉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한테 끝나는 것이다.
영성생활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의 모든 삶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도록 노력하는 생활이다. 즉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나의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을 낱낱이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생활이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단 한발작도 나아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단 한 순간도 숨을 계속해서 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다.
하느님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이끌어주셨고 거룩한 사람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는 존재이지 내가 앞장서서 하느님을 이끌어 가는 창조주가 아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나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신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깨닫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라면 이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어떤 자세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야 하는가? .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영성 생활은 무엇인가?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셨다.
성바오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 가야 합니다."(갈라 5,25)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 14-15. 27-28)
그럼 어떻게 따라 가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단계적으로 제시해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들을 찾아 보면 "나에게 오는 사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 믿는 사람...먹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아버지께 가는 자세요,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세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믿는 자세요, 네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먹는 자세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가기 위한 첫 번째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아 나서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나서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다.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우 소극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6)이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께 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가? 아버지께 가야 한다는 주리고 목마름이 있는가?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이다. 이것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기 때문이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음식이 반갑지 않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에게 물의 필요성을 못 느끼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도 그 고마움을 느낄 수 없으리라.
맛을 못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아버지의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도다." 라는 그 말을 이해하겠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 배우지 않는데 어떻게 알고 아버지께 나아가겠는가? 배움이 없이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세 번째는 배운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배움은 지식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아버지께 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서를 공부한 학자들라고 해서 또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못하다. 배움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어떤 배움이든 우리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잘 따라 가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해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인 아버지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없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영양가를 공급받는다. 먹어야 힘이 나고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빵인 말씀을 먹는 사람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방법이요, 단계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른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다. 애매한 일도 아니다. 그 길은 분명하다.
영성생활은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즉 내가 주도하는 생활이 아니라 나를 이 끌어 주시는 분에게 나를 의탁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피상적인 자세는 아니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수동자세이어야 한다. 좋은 자세가 마리아의 자세이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씀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수동적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지도록 마리아는 혼신의 삶을 살으셨다. 한번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셨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말씀 하신 대로 이루워 지도록 그 말씀에 충실하셨다. 이것이 영성생활을 하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자세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실천하는 삶이다.
나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는데, 그리고 그분의 소리를 듣는데, 그분의 손길을 자는데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한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비빕밥과 따로국밥 †
이번 주 내내 빵에 대한 묵상을 하다보니, 어느덧 내 머리 속에는 단팥빵과 찹쌀모찌(?:이 단어가 맞는 지 모르겠음)가 빙빙 떠오르면서 입에 침만 가득 고입니다. 저는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단팥빵입니다. 혹시 잘 아는 형제자매님들께서 식사라도 한끼 대접하겠다고 하면, '응, 됐어요, 그럼 단밭빵 하나만 사주구려'...라고 말을 한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아무도 단팥빵을 사주시는 분이 없었습니다. 경기가 안좋아서 그런지....그래서 그냥 입만 다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께서 제 귀에다 대고 물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놈아, 너는 내 빵을 먹기(영) 위해 입안에 침물이 가득고인 적이 있느냐??????'....정신이 화들짝 들면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주님의 성체(빵)을 영할 때 너무 먹고 싶어서 침물이 가득고이고, 배에 쪼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그래서 너무너무 주님의 빵이 그리웠던 적이 있는지요? 저는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으례 때가 되면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간절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누구 말마따가 아직도 배가 기름기가 끼어 있고, 냉장고에 먹을 것이 넘쳐 있으니...다시말하면 육적으로 풍족하니까, 그까짓 빵 먹어도 그만, 이번 주에 못 먹으면 다음주에 먹지 하면서...주일미사도 건너뛰고...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빵, 양식이라고 하지 않고, 건강식품 또는 약이라고 했으면 우리가 어떻게 했을까요? 시셋말로 '비아그라'같은 고단위 정력제라고 했으면, 하루에 더 몇번씩 미사를 참석하면서 성체를 영하려고 눈이 벌겄을 텐데,....그지요....(우스개소리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감기에 걸리거나 배탈이 나면, 고단위 항생제를 먹이는 것이 좋치않아, 때로는 과자부스러기를 약이라고 하면서 차방해 주는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또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엄마 손을 약손'이라고 하면서 아픈 자식들의 배를 문질러주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고 과자부스러기를 먹여도 낫고, 엄마가 따뜻한 손으로 배를 만져주면 낫는 것이 우리들의 인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믿음이 그만큼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맑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은 무조건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빵은 먹고 싶지만, 아니 먹지만 주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과거전력을 들먹이면서, 도대체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수근거리기만 합니다. 우리들 모습으로 비유하면, 똑같은 감기약을 제조해 주는데, 어느 약국에서 약을 사서 먹으면 별로 효과가 없고, 어느 약국에서 조제한 약을 먹으면 금방 감기가 떨어져 나가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는 우리 마음, 생각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무언지 모르게 좋은 일만 있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별로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이 해주는 것은 무언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벽입니다. 차별을 둔다는 것입니다.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자기만족 지역(Zone)을 만들어 경계선을 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분열이 나고, 개인 또는 집단의 이기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회학에서는 '차별화'라는 말을 매우 매력적인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에서는 절대로 차별화가 없습니다. 보편화 공통화가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가톨릭이란 차별화가 아니고 보편화, 공통화라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은 생태가 차별주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태가 비차별주의 즉 보편화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공생활은 유다인과 끊임없는 충돌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누군가와는 다른 차별화된 생활을 하고 싶지요? 그러면 가톨릭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유다교를 믿어야 합니다. 가톨릭인은 누구와도 구분없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눈에는 가톨릭 집단내에도 비차별화, 보편화가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굳이 시기와 반목 암투 등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치더라도, 대부분의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보편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는 해운대 신시가 아파트 단지에 볼일이 있어 다녀 왔습니다. 같은 성당을 다니는 앞집과는 잘 교제하지 않고, 이웃단지에 있는 잘 아는 사람과 자주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교리를 잘 못가르치고 있다는 부끄러운이 내마음 속 깊이 밀려 왔습니다. 한집에 모이면 되는 것을 대문을 서로 보는 두집에 각각 따로 들렀습니다. 제가 강제로 모이게 하면 되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어두운 영이 걷어내야지 강제적으로 그날 합친다고 해서 계속에 되겠습니까? 똑같은 주님의 밥을 얻어먹으면서 따로국밥을 먹는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일부분이겠지...하고 애써 자위를 하면서......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 해준 대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양스테파노의 묵상에서 본 글입니다. 한 수도원에 밥만 많이 먹던(아무리 아파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두 그릇씩, 그것도 고봉으로) 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많이 먹다보니 몸도 나게 되었고, 몸이 둔해지다보니 작업시간에 별로 도움도 안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기도시간에 졸기는 또 얼마나 조는지...
이를 늘 눈여겨보던 다른 한 수사는 매끼니 꼬박꼬박 밥 두 그릇씩을 게눈 감추듯 하는 그 수사가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밥을 한 그릇 이상 먹어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언제나 철저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밥만 축내는 형제가 어찌나 미워 보였던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둘 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고행에 열심이었던 "밥 한 그릇 수사"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 "밥 한 그릇 수사"는 여유 있게 천국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매일 밥만 축내던 그 수사, "지옥 아니면 적어도 연옥쯤 있으려니"했던 그 수사가 자기와 똑같이 천국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밥 한 그릇 수사"는 즉시 베드로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따졌지요. "이거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 공평하신 하느님이라고 늘 강조하셨는데, 완전히 뻥이었네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자네, 혹시 단 한번이라도 저 친구 마음 깊숙이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사실 저 친구, 적당량은 밥 두 그릇이 아니라 세 그릇이었다네. 원래 세 그릇을 먹어야 했었는데, 저 친구 그걸 참느라고 한평생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모를걸세. 그렇다면 결과는 당연히 천국이지."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느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두자매님도 그랬습니다. 한사람은 간부이고 한사람은 일반신자인데 서로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봅니다. 저는 내용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쓸 글은 아닙니다. 어쨌든 수사들의 우화와 같이 상대방 동료가 잘 안되었으면 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이나 인간적인 사고구조를 완전히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펼쳐질 상황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기절초풍할 정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계산방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인간의 사고구조를 훨씬 능가하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주님의 빵을 먹는 자들은 똑같아야 합니다(적어도 신앙생활에서는). 어제복음에서 주님의 빵을 주님의 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가톨릭에서 신자들에게 주는 주님의 밥은 비빔밥입니다.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똑같은 주님의 비빔밥으로 오장육부와 영혼을 세탁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가지 색이어야 합니다. 백색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빵을 먹으면서도 자기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마지막날에 그 빵을 먹은 숫자만큼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빵은 간식이 아닙니다. 어떤 강력한 세제보다는 더 강력하게 우리를 세탁시키는 영입니다. 부디 가톨릭이라는 뜻에 맞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아멘).......◆
-말씀편집 : 두올- |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 은총속에서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