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이데올로기를 참혹하게 겪은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역사는
민족의 독립 운동을 둘로 나누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민족의 독립 위에 군림하였고
6.25사변은 독립군의 이데올로기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뿌리가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실존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이념 정치의 쓴 뿌리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 정치의 발전을 불행하게 하였습니다.
끝없는 정치적 갈등은
서로 다른 이념의 대립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보수 꼴통과 종북 좌파의 극단을 가졌습니다.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이념 정치의 끝장은 민주 정치를 후퇴 시켰고
반목과 대립과 투쟁의 현실 정치를 낳았습니다.
보수는 친일의 뿌리를 가졌고 진보는 친북의 뿌리를 가진 정치 현상은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념화된 의식은 각계각층의 독버섯으로 자라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 그리고 종교를 아주 병들게 하였습니다.
종교적 신앙 위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기독교를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그늘을 갖게 하였습니다.
교권주의 보수적 신앙도......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보다 높은 곳에서 전체를 보면 크고 작은 봉우리가 한 눈에 보입니다.
의식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그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성경의 그 말씀이 필요없는 기독교.........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천주교는 이단을 넘어서 이교화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천주교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그 진위가 판별되었습니다.
공식적인 기독교 이단은
거의 100% 이데올로기적 신앙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으로 이해하는 성경관은
성경으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의 함정이 되었습니다.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은
성경의 중심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상황신학입니다.
과정 신학은
변화하는 생성의 과정을 모델로 하는 진화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교조적인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신학으로 신앙의 대상에 대한
불신의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가졌습니다.
신학의 이념화는
성경에 대한 본질적인 서로 다른 이해를 하였습니다.
교조적 교권주의는
성경 위에 군림하는 바리새적인 이데올로기의 신학입니다.
성경의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역사적인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성경적인 참된 이해는
신학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성경의 그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는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는 순전한 기독교를 말할 수 있는가?
역사적 신학의 그 모든 사조는
성경을 믿기 위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성경을 불신하기 위한 몸부림인가?
성경에 대한 본질적인 끝없는 질문은
혼돈과 공허의 블렉홀에 빠져들게 합니다.
본질에 대한 고민은
현상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합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확증편향된 이데올로기 신앙은 무엇인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한 혼돈의 사사기 신앙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샤마니즘으로 혼합되고 융합된 기복과 무속 신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불교의 새벽 예불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개업예배는 무속의 푸닷거리입니다.
추도예배는 유교의 제사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생활방도의 기도는 토속적인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무속 신앙의 전형입니다.
십일조 신앙은 바리새인의 이데올로기 신앙입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대적 전통과 성전과 레위인의 제사장이 있었지만
한국형 십일조 신앙은
중세시대 로만 카톨릭의 타락을 답습하는 기복신앙의 전형입니다.
교조적 교권주의는
개혁적인 신본주의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보수 신앙일 뿐입니다.
이렇틋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유.불,선으로 혼합된 토착화된 기독교요, 교조적 이데올로기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 타락하여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온갖 이단의 발흥을 봉쇄하지 못하고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정통성마저 이단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약속에 깨어있지 않으면......한국의 교회는
앗수르에게 멸망한 북왕국 이스라엘과 바벨론에게 멸망한 남왕국 유다와 로마에게 망한 유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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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긍정하는 오해된 순전한 믿음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교화된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와 다르게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섬기는 다른 형태의 성경적인 종교입니다.
모든 이단은 거짓되고 사탄의 미혹을 따르는 거짓 종교가 아니라
독특하게 강조하는 성경의 그 말씀을 받드는 독실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교조적 교권주의는 성경 위에 군림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성경의 그 말씀이 강조하는 교리를 체계화하여 사수하는 보수 신앙입니다.
절기 신앙과 십일조 신앙과 기도 신앙과 예배 신앙은 성경적인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뜻을 더 기쁘게 순종하는 순전한 신앙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서로 다르듯
성경을 이해하는 다양한 신앙의 형태는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기독교 안의 이단과 사이비 신앙도 배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다양한 은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불교를 비롯한 회교 등 타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생각보다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친근히 해야합니다.
이 모든 혼합된 이해는 범신론적 기독교요,
차별없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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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경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교회 안의 모든 신앙의 현상과
이단과 사이비와 천주교를 비롯한 불교와 이슬람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신앙은
진화론적인 종교다원주의 사상입니다.
다원주의 사상의 특징은
다함께 공유하고 소통하여 하나가 되는 인본주의 이상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는 생각은
인본주의 이데올로기 사상의 뿌리입니다.
성경의 그 말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순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그 말씀을 알고 깨닫으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정직의 다림줄을 알게 됩니다.
공허의 추와 혼란의 줄과 공의의 다림줄은
하나님의 뜻을 심판으로 행하는 절대 주권입니다.
성경의 그 말씀을 이데올로기로 왜곡하고 날조하는 그 모든 산앙은
하나님의 공허의 추와 혼란의 줄을 반드시 맞닥뜨릴 것입니다.
심판을 전제한 하나님의 구원은
좁은 문, 좁은 길이요, 고난의 길에서 얻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한 것과 잘못된 것을 참이라고 긍정하면......
순전하고 따뜻하고 훌륭한 신앙입니까?
거짓은 거짓이요,
잘 못된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아전인수식의 이현령비현령 신학과 이데올로기 신앙은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시는 바로 그 구원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로 물든 기독교 신앙의 파행은
한국 교회 정통 신앙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 일으키는 혼동의 사사기 신앙이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신접한 여인에게서 죽은 사무엘을 찾는 사울의 신앙......
기복과 무속과 이데올로기 신앙에 젖은 순전한 한국의 교회가 아닙니까?
이데올로기로 우상화된 종교의식의 실상은
순전한 복음을 혼합하여 혼동과 공허의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지배하는 구조의 한국 교회는
이데올로기로 우상화된 종교 의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순례하는 교회의 역사로 남을 한국의 교회가 있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남은 자의 그루터기로 생명의 불꽃을 피울 것입니다.
소위 믿음 좋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종교적 확증편향된 이데올로기 신앙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종교는 사기다는 의식의 훈련을 극복할 수있다면
저마다 불로 연단한 것과 같은 그 종교의 독실한 신앙을 유지 할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자아인 모든 인본주의 신앙은
종교적 확증편향된 이념의 이데올로기 무속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