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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밤 國軍 수뇌부의 혼돈
육군본부 측에서 볼 때 鄭총장 연행은 기습이었다. 기습하는 쪽은 여러 가지 방책과 후보계획까지 깔아놓고 덤비는데 기습당하는 쪽은 최초의 몇시간 동안에는 정보부족의 혼란상태에 빠져 반격의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12·12사태는 그런 의미의 전형적인 기습이었다. 그것도 상대편의 심장부(참모총장)을 직격하여 지휘계통을 마비시킨 대단한 기습이었다. 남편의 납치를 목격한 申有慶여사가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 유병현(柳炳賢) 연합사부사령관, 이희성(李熺性) 중앙정보부장 서리, 그리고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급보를 전했다. 尹·柳 장군은 직접 전화를 받았고 盧·李 두 사람은 집에 없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 「참모총장 공관에서 19시38분에 총성 네 발」이란 보고가 들어 온 1분 뒤 한남동 파출소에서도 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7시52분에 총장이 피습된 것이 확인되었다. 54분에는 공관에서 앰뷸런스를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8시19분에는 육군본부에 비상소집령이 떨어졌다. 1, 3군에 출동준비태세를 듯 하는 「진도개」가 발령된 것은 8시20분이었다. 진도개는 對간첩 작전 때 발령된다. 8시 30분 육본의 제3국장이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단국대학교에 숨어 있는 盧국방장관을 모시고 육본 B-2벙커로 돌아왔다. 盧장관은 옆집인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나자 私服차림으로 담을 뛰어넘어 피했던 것이다.
육본 벙커에 모인 군 수뇌부(盧국방, 金容烋 국방차관, 尹誠敏 차장, 河小坤 육본작전참모부장 등) 장성들은 기습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선 수경사에 총장공관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명령했다. 밤 9시가 가까워지자 鄭총장을 납치해간 두 장교가 합수본부의 권정달(權正達)·우경윤(禹慶允) 대령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육군본부는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군과 경찰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許三守 합수본부 총무국장은 정보처장이라면서 鄭총장 면담신청을 했기 때문에 權대령의 이름이 오른 것이었다. 육본은 이때까지도 납치가 두 대령의 개인적 행동인지, 합수본부의 조직적 擧事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9시쯤 되어서야 '총장납치'는 全斗煥 장군의 지시이고 30경비단장실에 수도권의 주요 부대 지휘관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군 수뇌부는 지휘소를 육본에서 수경사로 옮겼다. 이때 盧 국방장관은 육본에서 연합사 지하벙커로 갔다. 이 날 밤의 두 번째 피신이었다. 밤9시를 조금 넘어서 육본에서 尹誠敏 참모차장 등 10여 명의 참모들이 수경사로 옮겨왔다. 張사령관은 사령관실을 이들에게 넘겨주고, 자신과 참모들은 그 옆방인 접견실을 쓰도록 했다. 張사령관은 이날 밤 지하1층의 상황실과 2층 접견실 사이를 수 십 번 오르내렸다.
강경한 육본 수뇌부
초장에 육본 측은 강제진압 쪽으로 방향을 잡고 병력을 동원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 조치의 중심인물은 尹誠敏 참모차장, 張泰玩 수경사령관, 鄭柄宙 특전사령관, 李建榮 3군사령관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鄭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평상시 부대를 출동시키는 적법절차는 이러했다.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서 허락을 받는다. 동시에 연합사 사령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런 뒤 관할 사령관→군단장→사단장으로 지시가 내려가야 한다. 군단장이 有故일 때는 사령관이 바로 사단장에게 출동지시를 한다. 서울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충정계획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이 서울 근교의 충정사단에 대해 직접 이동명령을 내릴 수 있다.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된 상황에서 이런 부대출동지시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이는 尹誠敏 육군참모차장과 盧載鉉 국방장관이었다. 張泰玩 수경사령관은 육본의 지시에 의하여 서울로 진입한 충정부대의 지휘관이 수경사령부에 배속되었음을 신고한 시각부터 지휘권을 행사한다. 張사령관은 다른 부대의 출동을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이날 밤 가장 열심히 진압군을 동원하려고 했던 이다.
尹誠敏 참모차장은 군 사령관들에게 『지금부터 내가 육군을 지휘한다』는 肉聲명령을 하달한 뒤 수도권의 충정부대에 출동준비태세를 지시했다. 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도 주요 지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張사령관은 먼저 충정부대의 관할 군사령관인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李사령관은 『차규헌, 황영시가 자리를 비웠어. 윤필용, 전두환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장 장군이 잘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張사령관은 『수도기계화사단을 서울운동장으로, 26사단을 장충체육관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라고 했다. 李사령관은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李장군이 尹必鏞·全斗煥을 거명한 것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張泰玩 사령관은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과 손길남(孫吉男) 수도기계화사단장 및 배정도(裵貞道) 26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출동명령이 내려가면 즉각 움직여 달라고 부탁했다. 鄭특전사령관은 연희동 요정에서 부대로 돌아와 예하 여단을 점검하니 부천에 있는 9여단의 윤흥기(尹興祺)준장만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鄭사령관은 9여단을 출동시키기로 하고 張사령관과 협의하였다. 張사령관은 鄭柄宙 사령관에게 『9여단장이 노량진에 도착, 중지도 헌병검문소까지 혼자 가서 나한테 전화하면 통과시키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충정부대에 출동준비 명령
수도권의 4개 공수여단 가운데 정규 육사출신이 아닌 지휘관이 지휘하고 있던 여단은 부천에 주둔한 제9여단뿐이었다. 尹여단은 10·26사건 밤에 비상계엄령이 펴지는 것과 동시에 계엄군으로 서울에 들어와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경비를 맡았었다. 그러다가 12·12사태 바로 이틀 전인 12월 10일에 본부로 돌아갔었다. 全斗煥본부장이 12일로 거사날짜를 잡은 것은 9여단의 원대복귀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비육사 지휘관의 9여단이 육본을 경계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감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밤8시를 조금 넘어서, 그리고 10시쯤 鄭柄宙 사령관으로부터 尹여단장에게 두 차례 전화가 걸려 왔다. 두 번째 전화에서 鄭사령관은 구체적인 상황설명이나 임무부여를 하지 않고 서울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尹여단장은 『지금 진입하면 교통이 마비될 것 같으니 통행금지 시간 이후에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으로부터는 정식 출동 명령이 내려왔다. 尹여단장은 3군 지원사령부에 출동용 차량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孫吉男 수도기계화사단장은 밤8시를 넘어 張수경사령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張장군은 다급한 목소리로 서울의 상황을 설명한 뒤 출동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 뒤 尹誠敏차장이 전화를 걸어 『장 사령관에게 이야기 들었지? 출동준비하라』고 했다. 출동의 목표나 임무를 주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6사단장 裵貞道 소장은 밤 9시30분쯤 張泰玩사령관의 전화를 받았다. 張사령관은 鄭총장이 납치되고 全斗煥장군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뒤 尹참모차장을 바꾸어 주었다. 尹誠敏차장은 『지금 장 사령관의 이야기대로 사태가 발생했다. 26사단이 출동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裵사단장은 참모들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곧 직속상관인 강영식(姜榮植) 6군단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姜중장은 『사태가 불투명하니 출동할 때는 나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裵소장은 『출동명령을 받으면 나가는 것이지 무슨 상의냐』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6사단 보안부대장은 그 날 밤 裵소장을 늘 따라다녔다. 한 연대장이 裵소장에게 보고하기를 『보안부대원이 출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합디다』고 했다. 약 40분만에 출동준비를 끝낸 26사단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충정부대 중 최정예인 26사단은 이동명령만 나면 의정부→미아리를 거쳐 한 시간이면 서울도심까지 진출할 수 있는 부대였다.
『장태완 파이팅!』
張사령관에게는 여러 장성들로부터 격려전화들이 쏟아졌다.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은 『장 장군 잘해주시오』라고 했다. 김용휴(金容烋) 국방차관은 『장태완 파이팅!』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張장군은 金차관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金차관은 『염려 말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李建榮 3군사령관은 鄭柄宙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점검해보니 1군단장 황영시와 수도군단장 차규헌이 행방불명이오. 정장군이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잘해주시오』라고 응원하기도 했다. 육본 측이 全斗煥군을 진압할 수 있는 기회는 밤10시 무렵에 무르익었다. 이때 장관, 참모차장, 3군사령관 등 세 사람이 단호하게 全斗煥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이를 全軍에 널리 알리고, 전국의 보안부대장을 일시에 연금 시킨 다음 수도권 부대를 빨리 서울로 진입시켰더라면 全장군측은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출동준비태세만 발령해 놓고는 全장군 측과 협상에 들어감으로써 그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밤 9시를 지나서부터 全장군측에서 육본으로 전화를 걸어 끈질기게 설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兪學聖 국방부차관보가 맨 먼저 張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장장군, 왜 이래? 부대를 출동시키고 말이야. 여기 황영시, 차규헌 장군하고 같이 있어.』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총장님을 돌려보내십시오. 제가 내일 신문에 기사 못 나오도록 하여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兪장군은 말이 먹혀들지 않으니까 『황장군을 바꾸겠어』라고 했다. 張사령관은 『형님, 그 어른을 왜 붙들어 갔습니까』라고 말을 시작했다가는 흥분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黃永時1군단장은 車圭憲 수도군단장을 바꾸어 주었다. 張사령관은 그에게도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통보했다. 그때 兪學聖 국방차관보 등 全斗煥 측 장성들은 崔圭夏 대통령에게 몰려가 총장 연행결재를 간청하다가 대통령이 듣지 않으니까 보안사령관실로 돌아와 있었다.
육본수뇌부, 설득당하다
全장군 측 장성들의 선임자인 兪중장은 수경사에 지휘부를 설치한 尹誠敏 참모차장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全장군측 장성들은 鄭柄宙 특전사령관 등 다른 군 수뇌부와도 통화를 유지하면서 『납치가 아니다. 여기 와 보면 알 것이다』고 설득했다. 全장군 측은 『유혈사태를 막아야 하니 우선 병력동원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수경사에 있었던 金晋基 헌병감에 따르면 『밤 10시를 넘어서는 육군본부와 합수본부 측 사이에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강경하던 尹誠敏, 李建榮, 金容烋, 盧載鉉 등의 태도는 밤이 늦어짐에 따라 유화적인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張泰玩, 鄭柄宙 두 사령관만이 시종일관 武力진압의 자세를 유지하였으나 두 장군도 부하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수경사에는 30·33경비단과 야포단·방포단·헌병단 등 5개 단이 있었다. 단은 연대와 대대 사이의 규모를 가진 편제였다. 5개 단 가운데 주력인 30·33경비단, 헌병단 등 3개 단의 지휘관(張世東·金振永·趙洪대령)이 합수본부 측에 가담하였다. 張泰玩 사령관 휘하의 수경사 본부 참모들 중에서도 金基宅 참모장, 李鎭百 인사참모, 申允熙헌병부단장 등은 적극적으로 사령관 편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나중에 大勢가 합수본부 측으로 기울자 金참모장은 수색의 수경사 검문소에 대해 공수1여단을 그대로 통과시키도록 명령했고, 申헌병부단장은 張사령관과 육본 측 장성들을 체포해버렸다. 張사령관은 대령급 정규육사출신들의 집단적 이탈·반란에 의해 자신의 부대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全합수본부장과 육사동기인 김기택(金基宅) 참모장은 『그 날 밤 나는 고아 신세였다. 사령관이 나를 의심하는 듯했고, 합수본부 측에서도 나를 소외시켰다. 사령관은 나에게 부대를 장악하라면서 주로 바깥으로 내보내 나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張사령관은 밤10시쯤부터는 『이것은 지는 게임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모차장, 국방장관, 국방차관, 3군사령관 등 부대출동을 결정해주어야 할 사람들의 태도가 애매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는 張사령관에 대한 합수본부 측의 회유전화도 그쳤다. 합수본부 측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징표였다. 자정무렵에 세 번째로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李사령관은 『장장군, 지금 부대를 동원하면 김일성이가 쳐 내려 와』라고 하더란 것이다. 張사령관은 『무슨 김일성이가 두 세 시간 만에 내려옵니까』라고 되받았다. 「육군본부 측이 일선부대까지 동원하여 합수본부측을 제압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럴 경우 金日成이 쳐내려올 것 같아 나라를 위해 참았다」는 식의 변명이 아직도 많다. 당시 육본 측에 섰거나 어중간한 행동을 보였던 장성들일수록 이런 논리를 잘 내세운다. 사실은 정반대다.
全斗煥측은 휴전선을 지키던 9사단의 1개 예비연대, 30사단의 1개연대, 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 그리고 2개 공수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였지만 金日成은 쳐내려오지 않았다. 육본 측 군수뇌부는 진압 부대를 동원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전쟁준비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닌데 「나라를 위해서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육본과 합수본부 측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다. 李熺性 중앙정보부장 서리, 김용휴(金容烋) 국방차관,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 나중에는 盧국방장관도 그러하였다.
이들의 중재는 결과적으로 합수본부 측을 도왔으며, 이 중재자들은 5공화국 때 중용되었다. 張泰玩 수경사령관은 12·12사태 뒤 私席에서 이렇게 울분을 터뜨리더라고 한다.
『나는 전두환 편보다는 배신자들을 더 증오한다. 초저녁에는 「장장군 파이팅!」이라면서 응원하던 장성들이 자정 무렵에는 몽땅 태도를 바꾸었다. 鄭柄宙, 金晋基 이외에는 전부 배신했다. 부하들에게는 입버릇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던 친구들이 정작 위기가 오니 제 목숨 아까운 줄만 알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