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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형성하는 세 가구
(빌립보서 4:4~7)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 책은 우리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집으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모든 집에 주인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의 집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릴 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문밖에 서서 노크하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드리고 마음의 집에 거실과 서재와 부엌과 심지어는 침실과 비밀스러운 것을 숨겨놓은 벽장까지 열어서 주님께 소개하고 안내할 때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집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집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집에 들어놓아야 하는 가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마음의 집에 갖추어야 할 가구는 무엇일까? 마음의 가구에 대하여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의 공통점 가운데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조금은 넓은 평수의 집과 조금은 편리한 가구와 가전제품을 선호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새로 짓거나 큰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거기에 맞는 가구를 준비하게 되는데 좀 무리가 되더라도 좀 더 좋은 가구로, 좀 더 편리한 가구, 좀 더 집에 어울리는 가구를 장만합니다.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서 좋은 침대를 구입하고 옷이나 침구를 넣어두는 장도 갖춥니다.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조명기구에도 신경을 쓰고 좋은 가전제품을 들여놓아서 가정을 안락하게 꾸밉니다.
저도 캐나다에서 처음 왔을 때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어서 토요일마다 했던 것이 길거리에 가라지 세일을 한다는 종이가 붙으면 아침 일찍부터 가서 좋은 물건을 구하려고 줄을 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가구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가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가구라고 할 수 있는데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세 가지 마음의 가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돈으로 살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세 가지의 가구를 여러분의 마음의 집에 선물해 드리길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 말씀 중 제일 마지막절인 7절 말씀을 보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면’이라는 접속사는 원인과결과를 연결시켜 주는 접속사입니다. 그래서 그리하면 앞에 전제조건이 붙고 원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뒤에는 전제조건과 원인에 따른 결과가 설명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먼저 앞부분에는 앞으로 소개할 세 가지의 가구를 우리의 마음속에 들여놓으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무엇과 무엇을 지킵니까?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의 마음의 집과 생각의 집을 주님께서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키심으로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우리 마음의 집에 들여놓아야 할 가구는 기쁨이라는 가구입니다. 빌립보서 4:4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기쁨이 가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 대한 배경과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형편을 아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이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 중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가 총13권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분류할 때 옥중 서신이라는 제목이 붙는 말씀이 있습니다. 옥중 서신은 말 그대로 옥 중,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13권의 서신서 가운데 4권이 옥중 서신으로 분류가 됩니다. 에베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빌립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지중해 바다 휴양지에서 파라솔 밑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쓴 편지가 아닙니다. 스타벅스에 커피 한잔 마시며 노트북 펴놓고 쓴 편지도 아닙니다. 이 편지는 깊은 감옥 빛이 들어오지 않고 곰팡이가 있고 손과 발에 착고가 채워져 있고 조금의 자유도 없는 차디찬 감옥바닥에 희미한 촛불을 켜놓고 써내려간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쁨이라는 가구를 거리가 너무나도 먼 빌립보 감옥 속에서 썼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 여인이 바울의 선교여행을 방해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통하여 돈을 벌던 주인이 돈 버는 소망이 끊어지자 경찰서에 고발합니다. 경찰관은 바울의 일행이 낯선 이방인이기에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옷을 찢고 채찍질을 합니다. 발에 착고를 채우고는 깊은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여러분 이날 사도 바울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되돌아 온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후한 대접이 아니라 옷이 찢겨지고 몸은 피멍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는데 칭송의 자리가 아니라 발목에 착고가 채워진 채로 깊은 토굴 속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모습은 감사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원망의 조건이요, 기쁨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억울함의 조건입니다. 편안의 조건이라기보다는 가시덤불과 같은 슬픔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바울과 실라의 마음 속에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아닌 기쁨과 평강의 마음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술이 찬송과 기도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기쁨이라는 가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사업이 장애물을 만나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한 어려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 중에 육신의 질고를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만 하겠습니까? 성도들 중에 억울한 일을 만나서 분을 삭이지 못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한 억울함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깊은 감옥, 억울한 감옥, 매를 맞는 감옥, 절망의 감옥 속에 기쁨이라는 가구를 만들었기에 우리도 어떠한 상황이든지 기쁨의 가구를 만들어 나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라는 가구의 상표가 있습니다. 어떤 상표가 붙어 있을까요? 보르네오 가구가 아닙니다. 에이스 침대도 아닙니다. 이케아라는 상표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라는 상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 화면에 목적지를 향한 지도와 함께 현재 비행중인 비행기의 고도와 외부 온도와 현재 비행 중인 속도, 외부기압 등을 숫자로 표시한 안문구가 나옵니다, 여러분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숫자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비행기는 10,000km 그러니까 10km 상공에서 고도를 유지하면서 날아갑니다. 그리고 속도는 800~1,000km의 속도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비행기 외부의 공기 온도는 –40~50정도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외부의 압력은 타고 있는 사람의 고막을 터트리기에 충분한 강한 기압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 그냥 노출되어 있다면 단 10초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합니까? 먹고, 마시고, 잠자고, 대화 나누고, 영화 시청하고, 맨발로 왔다갔다 하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러한 여유와 편안함을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비행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밖에 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비행기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우리의 환경은 나날이 바뀌고 험난한 장애물은 쉬지 않고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안에 있으면 평안할 수 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름을 뚫고 하늘을 올라가 보십시오. 구름을 밑으로 내려다보고 살아 보십시오. 거기에는 언제나 태양이 떠있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참다움 기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주 안에 머무를 때 참다운 기쁨을 소유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복음성가의 후렴 부분에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양은 시편121편의 고백을 찬양으로 만든 곡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에는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산이 있기에 적들이 공격을 하지 못하고 산이 있기에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같은 환경을 바라보면 넘어질 수밖에 없고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을 눈앞에 보는 산을 넘어서 산을 지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환경을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기쁨의 가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20편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재능 같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면 비틀거리고 엎드러지지만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일어나 바로 세우셔서 기쁨을 느끼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기쁨이라는 가구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꼭 들여 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둘째, 채워야 할 가구는 관용이라는 가구입니다. 빌립보서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관용’이란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집에 필요한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 관용이 있을 때 마음의 공기가 훈훈해지고 따뜻해 질 수 있습니다.
속이 좁아터진 사람을 어떤 물고기에 비유합니까? 밴댕이 속알딱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추측하기를 ‘밴댕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속이 조그만한 가보다 그래서 밴댕이 속알딱지 같다고 그러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TV프로를 보았더니 강화도의 특산물인 밴댕이 회를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상했던대로 밴댕이는 조그마한 물고기였습니다. 그래서 속도 좁으려니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리포터가 설명을 해주는데 밴댕이는 바다에서 잡아 올리며 채 몇 분도 안 되서 금방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물고기의 성질이 하도 급하고 조금 안 좋게 말하면 하도 성질이 더러워서 바다에서 잡아 올리자마자 제 성질을 못 이겨서 금방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심도 없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밴댕이 속알딱지 같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밴댕이 속알딱지 같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 치밀어 오르는 욱하는 것 때문에 또는 좁은 이해심 때문에 손해를 보신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엄청난 실화들이 있는데 차마 부끄러워서 말을 꺼내지 못하겠습니다. 이놈의 성질 때문에 일어난 일들은 책으로 만들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어떤 가구가 있어야 합니까? 관용이라는 가구가 있어야 합니다.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라는 가구를 사도 바울이 깊은 감옥에서 만들었다면 관용이라는 가구는 이삭이 우물가에서 만들었습니다. 이삭이 살고 있던 시대에 재산 목록 1호는 우물이었습니다.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우물을 파서 물을 얻어야 그 우물가에 장막을 치고 우물물을 길러서 양떼를 먹이는 것입니다.
이삭도 그랄이라고 이름 하는 골짜기에 우물을 팠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사용하지 않아서 얼마 동안 메워 두었던 곳을 이삭이 다시 판 것입니다. 그래서 기득권도 이삭에게 있고 이삭이 땀을 흘려 판 것이기에 소유권도 이삭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랄에 사는 목자들이 텃세를 부리면서 시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다투기 싫어서 양보를 합니다. 장소를 옮겨서 두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에도 또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삭은 또 다시 양보를 하고 장소를 옮겨서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그때서야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네 장소를 넓힐 것이다. 나 여호와가 너로 번성하게 할 것이다”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힘들게 우물을 파서 두 번씩이나 양보하였으면 장소가 좁아져야 할 터인데 하나님이 넓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 파기도 힘든 우물을 세 개씩이나 팠으면 당연히 기력이 쇠해져야 할터인데 오히려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밥을 지을 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걸고 나물로 불을 때서 밥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한 시어머니가 밥을 짓기 위해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갓 시집온 며느리는 밥을 할 줄 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땠다고 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밥은 새까맣게 타고 심지어는 귀한 가마솥이 쩍하고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며느리가 전전긍긍하고 있자 시어머니가 위로했습니다. ‘아이고 미안하다. 내가 밥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되었구나. 미안하다’ 그때 시아버지가 나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내가 잘못을 했소. 내가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렇게 됐구나. 미안하다’ 그러자 신랑은 얼른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우물에서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됐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한편 길 건너 마을에도 새 며느리가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서도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했고 역시 밥이 타고 솥이 깨졌습니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을 했습니다. ‘아니, 너는 그래 밥도 하나 제대로 못하냐?’ 그러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듭니다. ‘아니 일부러 그랬습니까?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그러자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 하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면서 가만히 한 대 쳤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며느리는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두 가정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무엇이 있어야겠습니까? 관용, 이해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함을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기쁨이라는 가구의 상표는 주 안에서였습니다. 그렇다면 관용이라는 가구에는 어떤 상표가 붙어있을까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하신 후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말씀을 덧붙여 놓았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나름대로 이렇게 적용해보았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를 ‘주께서 가까이에서 보고 계신다’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힘든 일을 당하여도 마음 상한 일을 당하여도 주님은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아시기에 현재를 내가 손해이지만 내가 양보하지만 주님이 다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 우리가 작은 일에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손해보고 양보했던 것 등,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주님께서 보응하시고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성도는 너그러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천국 백성 삼아주셨습니다.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죄로 얼룩져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의 마음을 근심시키던 우리를 주님이 하늘 백성으로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베푸신 관용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관용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일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은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잔인한 잣대로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관용이라는 가구를 꼭 들여놓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기도라는 가구입니다. 빌립보서 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와 간구’라는 가구를 들여놓으려면 치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염려라는 가시덤불을 걷어내야만 감사의 기도라는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 앞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장애물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 문제입니다. 물질에 너무 집착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을 즐기고 남을 저주하면서 쾌락을 느끼면 결코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는 염려에 사로잡히면 든든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이 가시 기운에 막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듯이 염려에 사로잡히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근심에 사로집히면 불신앙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걱정에 사로잡히면 신앙인격이 파산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염려가 충만합니다. 여러분에게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라고 설교하지만 솔직히 마음속에 염려로 가득합니다.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갈리고, 분열되고, 어떤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어떤 계획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감사의 기도라는 가구를 들여놓아야 합니다.
이사야 30장 말씀에 보면 염려라고 하는 불신앙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감사의 기도라고 하는 가구를 들여 놓는 심령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축복을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땅에 씨앗을 뿌릴 때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어 결실하게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씨앗을 뿌릴 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두 번째는 메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게 합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감사의 신앙으로 무장하면 우리 마음 밭에는 은혜의 시냇물이 흐르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감사의 신앙으로 무장하면 기쁨의 샘물이 흐르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싸매어 주십니다. 기도하는 심령을 고치십니다. 주님께서 고치시고 싸매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게 하시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에 햇빛과 같게 하십니다. 감사의 기도가 있으면 달빛 같은 마음에는 햇빛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가 있으면 햇빛은 칠배가 되어 천국빛으로 가득해지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잡지책에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 전문의 김동수 박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인 이에게는 자신만의 비상약이 있다고 합니다. 일명 기도마이신이라는 항생제가 그것입니다. 그가 맡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감염성이 있어 항생제를 많이 쓰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기도 마이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보다 더 좋은 항생제는 없고 기도보다 더 뛰어난 치료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주 기도 마이신을 쓴다고 합니다. 중환자인 아이를 치료함에 앞서 또 그 아이를 병원에 둔 채 퇴근하는 차 안에서 그 밤 잠들기 전과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 시시때때로 아픈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훌륭한 의사였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상처난 부분이 있습니까? 찢어지고 곯아터진 부분이 있습니까? 기도 마이신을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을 붙들고 무릎으로 무너진 마음의 울타리를 세우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이라는 가구를 주 안에서, 관용이라는 가구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기도라는 가구로 염려하지 않는 감사의 기도를 이러한 가구로 채웠을 때 빌립보서 4:7말씀처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3절 말씀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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