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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과학, 문화의 핵심 개념들
- 아래 글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의 책: 철학, 과학, 문화의 핵심 개념들>에 실린 핵심 개념를 해설한
에세이를 번역한 것이다.
진화(Evolution)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루어진 자연사(史)와 실험유전학의 신다윈주의적 종합은 오늘날 현대진화론
으로 통용되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생물과학을 포괄하는 최초의 패러다임이다.
십구 세기 중반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대체로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의 반(反)복지
주의적 저작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인간에서 나머지 동물 왕국으로
경험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을 제시했었다(사회과학을 보라).
따라서 그 이론이 지지한 진보의 유일한 의미는 물질적 생존이었고, 그리고 그때에도 통제할 수 없게
변화하는 물리적 환경의 수용 능력과 관련된 자손의 수에 입각하여 이해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일반적으로 과학적 문제에 대한 신학의 개입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신학적 정향의 급진적 변화를 특징짓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와 같은 초기의 창조론자들은 (마치 시계가 시계제작자의 흔적을 품고 있
듯이) 신의 계획이 특수한 유기체들의 설계에 새겨져 있다고 기대했었던 반면에,
다윈은 맬서스―그 자신이 사제 서품을 받은 목사였다―의 사례를 따라 의미의 문제를 불특정한 미래로
옮겨 놓았는데, 그것은 신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은 정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종류가 다르다는 관념을
강화하기를 바랬던 대단히 급진적인 칼뱅주의자에게 당연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다윈이, 뉴턴(Newton)에게는 실례지만, 신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체 하지 않고서도 자연 현상을
제대로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과학을 실행하는 방식을 예증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다.
물론 그 다음에, 이런 감소된 기대, 특히 실재는 "정신과 비슷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로 여겨지는 과학을 우리가 왜 계속 추구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부담은 다윈
주의자들에게 옮겨졌다.
놀랍지 않게도, 라이프니츠(Leibniz)와 칸트(Kant) 이후의 철학자들이 "자연의 이해가능성(the intelligib
ility of nature)"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윈이 분명히 부정했다는 바로 그 점에 대해 다윈은 당대의 선도적인 과학적 방법론자였던 윌리엄 휴웰(William Whewell)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다른 많은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초자연적인 창조적 지성에 대한 구약의 설명에서 파생된 종교(즉,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사회들을 제외하고, 진화는 대부분의 세계관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여기서 "진화"는, 세계가 물질적 공통 토대의 재활용에서 생기는 일련의 현상적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십 세기에 이 토대는 "유전자"라고 불리게 되었지만(그리고 더 정교화되었지만), 유전자의 가장 유서
깊은 선행자는 "카르마"(힌두교와 불교)와 "기"(유교와 도교)일 것이다.
서양에서 이런 관점은 원자론적 형이상학과 에피쿠로스주의적 윤리학과 가장 분명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모든 관념들에 공통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진화론적 시각을 옹호하는 문화들은 일반적으로 전체 과정이 인간의 관심사와 무관
하고 그리고 인지적 이해와도 무관하다고 여긴다.
인간이 진화를 통제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정할 수도 있다는 것은 대개, 기본적인 생존 욕구에 봉사
하도록 자연을 길들일 수 있는, 문화를 뛰어넘어 입증된 우리 능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유도된 일반화에
바탕을 둔 환상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인도와 중국은, 지적인 진보에 관한 관념들을 향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뉴턴주의적 세계관을
낳을 수도 있었던 탐구 형식들을 체계적으로 전혀 추구하지 않고서도 수 세기 동안 지속된 기술적으로
선진화된 방대한 문명을 세웠다.
뉴턴에서 절정에 이른 과학혁명이 등장하고 나서야 서양에서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주의 자체가 (세계의
궁극적인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위안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친과학적 세계관이 되었다.
인간들이 진화 과정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관점은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가
계몽주의의 진보적 역사서술에 생물학적 토대를 효과적으로 부여한 십구 세기 초에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 토대의 가장 직접적인 결실은 콩트(Comte)의 실증주의였지만 그것은 사회과학 전체로 확산되었는데,
사회과학에서 라마르크주의는 부유하는 이단으로 존재해 왔다.
라마르크의 독특한 기독교적 형식의 자연주의에 따르면, 인류는 성숙한, 또는 자기의식의 상태에 이른
자연일 뿐인데, 그것과 관련하여 모든 하위 종들은 이 공통 목표를 겨냥하는 중간 단계들을 나타냈다.
라마르크의 시대에 고생물학자들이 이미 과거 종들의 대량 멸종으로 인식했던 것을 라마르크는 자연에
현존하는 동일한 유적 생명력―일 세기 후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의해 엘랑 비탈(elan vital)
로 불멸화되는―의 이전 판본들로 다루었다.
라마르크의 진화주의와 관련된 가장 풍부한 관념은 자신의 일생에서 획득된 특질들에 대한 기억 흔적이
어떻게든 자손이 물려받는 세포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곧 유전적 집단기억의
존재를 상정했던 셈이다(공통감각 대 집단기억을 보라).
지난 이 세기 동안 이 관념은 때때로 문자 그대로 이해되었는데, 특히 하등 유기체들에 적용되었을 때
(예를 들면,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의 처참한 소비에트 농업 정책) 그랬지만, 문화를 뛰어넘어
반복되는 매우 일반적인 관념들(예를 들면, 융의 원형)의 전파와 관련해서도 그랬다.
그렇지만 라마르크로부터 영감을 받은 연구는 일반적으로 현대유전학과 관련된, 개체군을 고려하는 시각
을 택한다.
이것은 발달심리학의 미국인 창시자 제임스 마크 볼드윈(James Mark Baldwin)에서 이미 존재하는데,
이십 세기 초에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장 피아제(Jean Piaget) 이후에 "유전적 구조주의"로 알려진 것의
씨앗을 뿌렸다.
생식의 이점은 그들 자신의 일생에서 그것들을 획득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나타낸 개체들을
이롭게 한 그런 특질들을 이미 지니고 있는 나중 세대들의 개체들에 의해 향유될 것이라고 볼드윈은 주장
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 관념을 확장하여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이라는
표제어 아래에서 문화 전체를 다윈주의적 틀 속에 집어넣었는데, 이른바 "확장된 표현형"은 어떤 특질들
을 지니고 있어서 득을 보는 개체들이 선택 환경을 재구성하여 그런 특질들을 공유하는 다른 개체들을
지원하는 결과를 낳을 양의 되먹임 고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미시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맹목적인 진화 과정들로 남아 있는 것에 의해 거시적 수준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시각의 논란 많은 통제적인 한 판본은 더 고등한 진화의 전조로서 돌연변이들을 계발하는 것인데,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그것들을 이른바 "희망의 괴물들(hoeful monsters)"로 평가했다.
그것은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가 제시했는데, 그는 신다윈주의적
이론에 대해 "진화적 종합"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지만, 다윈주의에 잔류하는, 우리의 운명보다 우리의
기원에 대한 인종주의적 집착에 점점 더 낙담했다.
반면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적자생존"은 고대 에피쿠로스학파로의 회귀를 특징지었는데, 비록 그것이 그의 자칭 "사회다윈주의"가 지난 150년 동안에 가장 유력한 진화적 사회 이론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스펜서는 우주적 진보에 관한 모호한 자연주의적 의식의 지배를 받았지만, 진화란 질서 잡힌 단계와 무질서한 단계 사이를 교대하며 실재의 모든 층위를 가로질러 표현된다는 순환적 진화관을 견지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계보학이라는 자신의 방법으로 스펜서를 다윈에 비추어 재구성
했는데, 그 방법은 푸코(Foucault)의 손을 거쳐 이십 세기의 마지막 사반 세기에 인본주의적 목적을 지닌,
사회과학의 연구 활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On the Genealogy of Morals)>(1887)는 근대국가 정체 이전에 사회생활의 재
생산을 지배했던 합법적인 계보에 대한 우려를 갱신했다.
정치적 승계가 조작된 문서에 의거할 수도 있다는 전통적인 법적 우려를 대체하여, 니체는 현대의 도덕이
망각된 어원에 의존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에 의해 의무란 약자들이 그저 더 강한 자가 되기
위해 강자들에게 죄책감을 심는 전략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당시에 "인종 위생(racial hygiene)"으로 알려진 의학의 한 진화학파는 약자들의 복지에 대한 부자연
스러운 헌신을 스며들게 하는 데 도덕이 맡은 역할을 포착하기 위해 "반(反)선택"이라는 술어를 도입하였다.
게다가 니체는 영리하게도 가장 충실한 다윈 옹호자였던 독일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의 표어를
개작하였는데, 헤켈은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했으며, 그 선언은 개별 유기
체의 생물학적 발생(즉, 잉태 기간)은 모든 유기체의 진화에서 진행된 단계들을 반복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니체의 수중에서 그것은 사회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이른 진술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존재론은 언어학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실재는 언어 사용의 계속 진행 중인 결과인데, 이것은 하이데거(Heidegger)와 데리다(Der
rida)와 같은 후기 니체주의자들에게 익숙한 논제이다.
그렇지만 말장난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 다윈주의의 계보와 니체주의의 계보를 통합한다.
다윈은 진화를 형태학적으로 비슷한 종들의 공통 조상이라는 원리에 근거하는 생명의 나무로 묘사했는데
(그리고 헤켈이 보급시켰는데), 그 나무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단일한 기원에서 파생하였다.
그런 상상의 장치는 생물분류학의 원리로서, 그리고 종들 내에서 또는 밀접한 친족 관계의 종들의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이주 유형들에 대한 설명(예를 들면, 모든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빠져 나왔다는 생각)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다.
두 용법 모두 다윈 자신의 영감의 원천인 비교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August Schleicher)에 빚지
고 있는데, 그는 최초의 생명의 나무(또는 분기도)를 그려 인도유럽어 계통 언어들의 상호관련성을 보여
주었으며, 그 언어들은 일제히 궁극적인 하나의 공통 조상, 즉 인도 서부에서 사용된 순수한 아리아 어와
연루되었음을 시사했다.
슐라이허의 동료 언어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추론된 이 원천을 성경의 신이 애초에 아담과 소통했던
매체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윈과 니체는 생명의 나무라는 은유의 최소한 한 가지 측면, 즉 언어―그리고 생명―는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임의로 발생했다는 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기원의 우연성은 계보학적 방법에 중요하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는 두 가지 일반적인 시각에서, 즉 미래를 내다보는 과거로부터의 시각과
과거를 뒤돌아보는 현재로부터의 시각에서 살필 수 있음을 고려하자.
앞의 입장은 미래가 다중의 대체 미래에 열려 있는 전환기에 집중하는데, 그런 시기에 이루어진 결정은
경제학자들이 "경로에 의존하는(path-dependent)" 결과라고 부르는 것을 생성한다.
그런 과소결정론(underdeterminism)과는 대조적으로 뒤의 입장은 과대결정론(overdeterminism)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결국 결과는 같은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에 기원이 실제로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는 무의미하다.
과대결정론은 목적론을 산출하고, 과소결정론은 계보를 산출한다.
후자에서, 현재의 앎의 방식과 존재 방식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의식은 원래 결정 순간의 강화를 반영할
뿐이다.
엄연한 진보를 강하게 믿고 싶어 했던 시기에 니체가 진화를 계보로 재규정한 점은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부르주아 극"이 가장 잘 예시한 방식으로 수치스러운 듯 보였는데, 그 방식에 의해 겉보기에
일상적인 어떤 상황이 존속하는 지저분한 과거―신성화와 신화화 사이를 오가는 어떤 숨겨진 형식으로
존속하기는 하지만―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명된다.
입센의 극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도덕적 딜레마는 그런 과거에 관한 지식이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내버려두어야 하는지 여부이다.
어떤 이상화된, 아마 세속화된 기독교적 선(善) 의식은 인간조건의 유전적 부담을 극복할 수 있을까?
변함없이 그 대답은 아니오인 듯하다.
그렇지만 다윈, 니체 그리고 입센은 모두 멘델 유전학이 현대진화론에 편입되기 전에 살았는데, 그
편입은 193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그들은,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는 낡은 라마르크주의적 관점을 자손은 자기 부모의 친족 형질의
혼합된 판본을 나타낼 뿐이라는 훨씬 덜 목적론적인 관점에 접목시킨, 유전적 전달에 대한 반(半)정합
적인 의식을 지닌 채 작업했다.
그러나 그것의 반정합성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정신분석 행위를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의 미시적 응용으로 이해했다.
프로이트는, 정체성이 부르주아 드라마 도중에 드러나는 불량 조상을 후속 행위를 고정시키는, 환자의
과거에 일어난 불량 사건―예컨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또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원천―으로 대체했다.
계보와 유산에 관한 이전 이론의 견지에서 보면 멘델 유전학은 방대한 역사적 탐구의 필요성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본질주의로의 전회를 구성한다.
멘델의 여파로, 개인의 일생에서 표현되는 특질(즉, 표현형)은 유전 프로그램에 의해 제한되는 한정된
범위의 가능성(즉 유전형)을 반영한다.
달리 말하자면, 한 개인의 유산은 그저 그 개인에 대한 집중 조사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다.
적절한 일례는 유전자 프로파일링의 사용 증가인데, 그것에 의해, 예컨대 범죄나 질병에 대한 취약성이
한 개인이 분명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유전자 서열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정체성의 가상화에 대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관점(즉,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공통의 현실성)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 읽을 책
D. T. Cambell, Methodology and Epistemology for the Social Sciences (1988).
C. Degler, In Search of Human Nature (1991).
G.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1994).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P. Dickens, Social Darwinism (2000).
M. Foucault, The Order of Things (1970). [미셸 푸코, <말과 사물>(이광래 역, 민음사, 1987).]
S. Fuller, The New Sociological Imagination (2006).
D. Haraway, Simians, Cyborgs, Women (1991). [다나 J.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민경숙 역, 동문선, 2002).]
M. Mandelbaum, History, Man and Reason (1971).
R. Richards, Darwin and the Emergence of Evolutionary Theories of Mind and Behavior (1987).
U. Segerstrale, Defenders of the Truth (2000).
H. Simon, 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 (1977). [Herbert A. Simon, <인공 과학의 이해>
(한국체계학회 역, 신유, 1999).]
D. Sperber, Explaining Culture (1996).
과학전쟁(Science Wars)
"과학자(scientist)"가 특정한 직업적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기 시작한 1830년대 전에 과학의 추구는
두 가지 상쇄하는 성질을 지녔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여가가 충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기대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과학의 결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들의 생산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거나 수동적이었지
만, 보편적인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이런 역설은 오늘날에도 지속한다.
사실상 과학은 그것의 신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신들이 믿는 것에 관한 특정한 지식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확실히 종교 또는 심지어 정치와도 대조된다―에서 하나의 지식형식으로서 사회학적으로 독특
한 듯하다.
따라서 아인슈타인(Einstein)이 이십 세기의 으뜸 지성인이었다고 하는 폭넓은 동의가 문화를 가로질러
존재하지만, 이 합의(합의 대 반대를 보라)에서 누가 아인슈타인의 존경받을 만한 통찰을 올바르게 표현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과학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은 과학의 좋음에 대한 더 큰 회의주의와 서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놀랍지 않게도, 오늘날까지 가장 효과적인 과학 비판자들은 과학 공동체 내부에서 나왔는데, 과학의 수행
에 대중의 투입을 요청하는 폭넓게 제도화된 수단은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여전히 인민을 위한 것―그러나 인민에 의한 것이 아닌―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실증주의적 정치체까지, 대중의 과학이해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주의와 보편성(보편주의 대 상대주의를 보라)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철학자
들은, 적절한 과학적 권위들에 대한 복종의 명백한 유형들을 확립함으로써 비강제적인 사회 질서가 세워
질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법률상의 전문가 증인의 다채로운 경력이 예시하듯, 과학자들이 그런 권위를 지니고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의 통일전선을 제시하는 데 의존하며, 그럼으로써 과학적 동의가 대중의 동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불행하게도 과학자들 사이에서 필요한 수준의 동의는 과학 자체를 옹호할 때조차도 드물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냉전의 종식으로 과학자들이 훨씬 더 경쟁적인 연구비 환경에 일단 노출된 후에 그들의 반응은,
자신들의 특수한 연구 방향의 확장으로서의 과학의 다양한 활동이 마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과학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92년에만 해도 과학을 옹호하는 두 권의 뛰어난 책, 즉 미국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와인
버그(Steven Weinberg)의 <최종 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과 영국인 실험발생학자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의 <과학의 비자연적 특질(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과학기술
학은 역사 기록의 그런 해석적 유연성에 의지하여 그런 유산이 오늘날의 과학 행위를 정말로 보증하는지
묻는다.
이런 문제 제기가 과학전쟁을 일으켰다.
불만을 품은 미국인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이 과학적 넌센스와 정치적으로 올바른 참고문헌을
조합한 논문 한 편을 선도적인 문화연구 저널에 출판한 해인 1996년에 과학전쟁은 대중매체에서 보도
되었다.
소칼의 옛 스승인 와인버그가 명명한 대로 "소칼의 사기극" 덕분에 주류 대중은 과학 옹호하기의 경합
하는 특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회학자들은 과학이 여러 목소리로 말한다는 점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반면에, 과학자 자신들에게
이것은 잠재적으로 유해한 폭로였는데, 그것은 과학 예산을 삭감하거나, 또는 아마도 훨씬 더 나쁘게도,
민중의 정신적 욕구와 물질적 욕구 둘 다를 더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비정통적인, 심지어 대안적인
탐구 형식들을 향해 자원을 돌리는 데 필요한 구실을 정책입안자들에게 줄 것이(라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지식정책을 보라).
정치가가 자신의 유권자들을 대표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과학자들은 실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대표한다"고 하는 과학정치학을 묵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과학자들이 깨달았다는 사실은 빠르게 분명해
졌다.
과학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사회학자들의 설명이 함축하는 공적 책임감이라는 더 큰 의식으로부터 과학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반대되는 두 개의 전략이 출현했다.
한편으로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사실상 과학을 소유한다는 와인버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놀랍지 않게도, 때때로―소칼의 사기극에서처럼―그들은 적절한 훈련을 먼저 거치지 않고서 과학
에서 문화적 잉여 가치를 추출하려고 하는 침입자들을 붙잡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과학자들은 월퍼트를 따랐는데, 그는 과학자들을 그들의 능력이 실험실 공간을 넘어
서지 않는 수수한 노동자로 묘사했다.
그들은 과학자들이 인간 유전체의 완전한 지도를 대중의 문 앞에 배달한 다음에 자신들이 수행한 것의
정치적 함의에 개입하지 않고서 다음 연구과제로 재빨리 움직인다고 파악했다.
그렇지만 두 전략 모두 과학전쟁이 그것의 뚜렷한 한 증상일 뿐인 전체적 경향, 즉 과학의 세속화에 정면
대처하지 못한다.
냉전이 끝난 후에 과학 연구와 교육에 대한 공적 자금의 철수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교회와
국가가 공식적으로 분리되었을 때 종교가 사용한 전략들 가운데 많은 것에 의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과학 복음주의"가 등장했는데, 그것에 의해 과학을 뒷받침하는 논증들이 인간 욕구의 충족을 향해
특정적으로 정향된다.
가장 명백한 일반적인 추세는 고에너지 물리학과 우주 프로그램에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와 뉴에이지
의학으로 지적 관심과 재정적 관심이 이동한 사실로 대표된다.
물질의 본성에 관한 2500년 묵은 난제 풀기는 자식의 유전 질환을 제거하는 전망보다 공공 과학 정책에 대
한 설득력이 훨씬 떨어지는 근거를 제공한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세속화를 과학전쟁에 대한 배경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반면에,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은
"안정된 물질적 실천"으로서의 실험실 과학의 미시적 수준에 몹시 집착하여 이런 실천이 "합리적", "실재
하는", "객관적", 기타 등등의 적절한 철학적 표지를 획득한 사실이 지니고 있는 수사학적 의미를 무시한다.
이런 수사학의 구사 능력이 여전히 모든 과학에서 사회적 정당화의 주요 양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적인 보통 사람들이 왜 실험실 현상의 안정성과 일상 사회생활의 안정성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험실의 발견 결과가 한 덩어리의 지식이나 적절한 기법으로 안정화되는 단계들에
친숙한가?
그 수가 많다면 과학기술학은 대단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분야의 결과가 "구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점에 대해 우려하는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의
상황을 특징짓는 지식사회학을 그들의 사회학적 적들보다 더 잘 파악했다.
과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그저 개인적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자신들의 노력의 운명에
관해 걱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과학에 관한 사회인식론은 일단 사회구성주의적 설명이 넓게 수용되면 과학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지 물어야 한다.
과학은 종교처럼 탈신화화된 형식으로 생존할 수 있는가?
과학전쟁에서 공용어로서 역할을 수행한 토머스 쿤(Thomas Kuhn)의 유산(쿤, 포퍼 그리고 논리실증주
의를 보라)은 우리가 이 질문을 다루는 데 적절하지 못한데, 어떤 과학적 패러다임의 실행자들은 일단
자신들의 조건에서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에만 자신들의 탐구의 전체적인 목적을 논의하도록 허용되고,
그래서 "위기"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과학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생산적인 전략이 있다.
첫 번째 전략은 과학 정책 의사결정에서 대중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한 가지 명백한 제안은 때때로 "시민 배심원"이라고 불리는 합의회의를, 어쩌면 미합중국에서 총선에
앞서 개최되는 예비경선과 전당대회와 비슷하게, 정책 과정의 정규적이고 의무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일반 대중에서 뽑는 한 집단은,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규약을 제정하는 법률적 지침을
도출할 목적과 적절히 관련된 다양한 전문성을 표본추출함으로써 나름의 집단적 탐구에 개입한다.
두 번째 쟁점은 과학자들과 대중을 연결하는 의사소통 과정을 포함한다.
과학 연구가 보건과 안전에 대한 대중의 우려와 점점 더 충돌함에 따라 전문적인 과학 단체들은 과학자
들과 과학기자들이 정책입안자들과 대중 전체에 보고하는 절차를 강화하기를 요청해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대학원 과정의 확산은, "대중의 과학이해"를 과학에 대한
대중의 좋은 관계뿐 아니라 탐사 보도가 정치인들을 공적으로 더 책임감 있게 만든 것처럼 과학자들을
공적으로 책임감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개념화하는 새로운 분야의 출현을 가리킨다.
더 읽을 책
H. M. Collins & T. J. Pinch, The Golem (1993).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 골렘: 과학의 뒷골목
S. Fuller, The Philosophy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2006).
P. Gross & N. Levitt, Higher Superstition (1994).
S. Harding, Whose Science? Whose Knowledge? (1991).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A. Irwin, Citizen Science (1995). 앨런 어윈, 시민과학: 과학은 시민에게 복무하고 있는가?
P. Mirowski & E.-M. Sent (eds.), Science Bought and Sold (2002).
A. Ross (ed.), Science Wars (1996).
A. Sokal & J. Bricmont, Fashionable Nonsense (1998).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적 사기
T. Sorell, Scientism (1991).
S. Weinberg, Dreams of a Final Theory (1992). 스티븐 와인버그, 최종 이론의 꿈: 자연의 최종
법칙을 찾아서
L. Wolpert, The Unnatural Nature of Science (1992).
번역(Translation)
번역에 대한 사회인식론의 관심은 쿤(Kuhn)의(쿤, 포퍼 그리고 논리실증주의를 보라) 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y) 테제에서 유래하는데, 그 테제는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이 개념적 도식들, 즉 "패러
다임들" 간의 번역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훈련받은 패러다임을 넘어서 보지 못한다.
신(新)패러다임 개종자들로서 과학혁명을 충분히 인식하는 일은 구(舊)패러다임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
으로 부족한, 더 최근에 입문한 과학자들에게 맡겨진다.
그렇지만 쿤에 따르면, 갈릴레오(Galileo)와 아인슈타인(Einstein)과 같은 진정한 과학혁명가들은 세계
를 이해함에 있어서 신패러다임과 구패러다임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데, 쿤은 이 능력을 이중
언어 사용에 비유했다.
과학기술학은 쿤의 테제의 상대주의적(상대주의 대 구성주의를 보라) 함의―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실질적으로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를 강조하는 반면에 전문 번역가들은 일반적으로 두 세계에 동시에
살 수 있는 과학혁명가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번역은 인식적 혼성물, 즉 이질적인 사유 노선들은 토착 매체로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과학자들 자신이 일반적으로 마주치지 않는 지적 외교의 수행이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뉴턴 역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완전한 의미를 포착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치 있는 것의 대부분은 뉴턴적 견지에서 더 잘 표현될 수 있으며
그렇게 표현될 수 없는 것은 표현할 가치가 없다고 상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관심을 기꺼이
포기한다.
번역가와 과학자 사이의 이런 구별은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이 각각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사후
가정들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쿤은 역사학자처럼 사유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그렇게 사유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려고 노력하면서 통약불가능성 테제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낯선 나라의 손님처럼, 원주민들의 관습을 익히려고 노력하는 과거 사건들의 관찰자나 재연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현재에서 과거로 사후가정을 했다. 반면에, 철학자들은 규칙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사후가정을 한다.
이 경우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적인 성인 학도, 즉 올바른 상황에서 그 자신이 했었을 논리적
추론들과 경험적 관찰들의 조합을 통해서 자신의 물리학에서 우리의 물리학에 이르는 방법을 알게 될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환생하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런 상보적인 사후가정들에 의지함으로써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은 화친 협약을 유지한다.
그런데 쿤의 통약불가능성 테제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기이해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그런 두 가지 사후가정적 여행 모두 각각의 목적
지를 지배하는 규범의 정당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화친 협약은 외래 방문객들이 토착 규범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으로서 고지식
함을 이용한다.
그것은 프리그(Prig)식 역사서술의 특질인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인위적 분리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사회가 내부 갈등을 표명하기 때문에 어떤 균일한 규범적 표현도 그런 갈등의 편리한 해소를
나타내는 공식적인 이야기(아마도 심지어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이십 세기 초 제국주의적 지배 상황이 그런 이야기들의 해석적 기준으로서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외래 방문객들이 이런 내부 갈등에 호소함으로써 토착 규범을 비판할(비판을 보라) 수 없거나
또는 바꿀 수도 없을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사후가정 시간 여행은 왜 비대칭적이어야 하는가?
역사가들은 왜 항상 과거로 이동해야 하고, 철학자는 왜 항상 고대인들을 현재로 데려와야 하는가?
고대인들을 우리의 역사가로 묘사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들을 그들의 세계로 파견된 철학적 선교사로
묘사하면 왜 안되는가?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들의 과학적 기획들 가운데 최고의 것들을 끌어낼(또는 끌어내었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다루기 힘든 방향으로 끌고 간다(또는 끌고 갔다)는 혐의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고대인들에게 납득시켜야만 할 것이다.
사후가정들에 대한 이런 쿤 이전의 호소를 회복하는 것이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규범적 통합에 있어서
가치 있는 첫걸음일 것이다. 여기서 수사학이 중심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과거 인물들로부터 전형적으로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들의 관념들의 내용
보다 그것들을 낳은 맥락이다.
전문 번역가들은 W. V. 콰인(Quine)과 쿤 둘 다에 영향을 미친 성경학자 유진 나이다(Eugene Nida)를
따르는데, 그는 원래 언설의 형식적 등가와 동적 등가를 제공하는 것을 구별했다.
전자는 새로운 맥락에서 원래 언설의 내용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후자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본래 언설의 맥락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때때로 이런 구별은 각각 텍스트의 의미론적 차원과 화용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번역가의 견지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따라서 고어적 표현을 설명하는 주석을 포함하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텍스트는 원전과 형식적 등가물을 제공하는 반면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의 이십 세기 중반 각색본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텍스트는 동적 등가물을 제공한다.
과장되었지만 문학적으로 표현된 <로미오와 줄리엣>과 이해하기 쉽지만 느슨하게 표현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차이는 번역 전략들의 상충관계를 두드러지게 제시한다.
그런데 사회인식론에 더 적절한 작업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플라톤을 생각하자.(철학 대 사회학을 보라.)
현대의 철학 독자들에게 플라톤을 표현하는 두 가지 기본 방식이 있다.
일반적으로 형식적 등가성이 우선한다. 따라서 해석자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순수형상의 존재론에 초점을 맞춘다.
플라톤의 논증이 제시되고, 해설되고, 보충되고 그리고/또는 반박된다.
가능한한 많이, 해석자는 플라톤의 논증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실제 언설에 기댄다.
이 전략이 실패할 때, 플라톤이 특별히 미묘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고,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해석학적 활동의 총체적인 효과는, 일반적으로 독자 자신의 시대에 쓰여진 텍스트에는 기울이지
않는 주의를 기울여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말하자면 고전으로서 "수행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사유에서 그의 원래 맥락의 역할을 제한함으로써, 플라톤은 오늘날의 해석자가 더 이해하기
쉽게도 되고, 동시에 덜 이해하기 쉽게도 된다.
플라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플라톤의 사회역사적 배경에 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거의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기 더 쉽다.
(사실상 플라톤의 동시대인들과 선행자들이 쓴 텍스트들은 플라톤을 "상호텍스트화하는" 데 시용될 가능
성이 높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플라톤은 이해하기 덜 쉽게 되는데, 그의 텍스트는 언뜻 보기에 꽤 이질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확장된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회인식론 학자들은, 플라톤의 위대함은 그의 특정한 언설보다 그의 언설을 낳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주장할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상황은 플라톤이 청년 시절에 목격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은 당대에 아테네의 패장 투키디데스의 연대기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명되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테네인들은 변증술을 공론장에서 무차별적으로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재빠른 기지가 있는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예외없이 처참한 것으로 판명된 방향으로 도시국가를 이끌 수 있었다.(탐구의
자유와 수사학을 보라.)
이런 아테네적 특질을 인식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변증술을 가리키는 사람들, 즉 소피스트들을 미워하게
되었고, "열린 사회"의 어두운 측면의 객관적 교훈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집착했으며, 그리고 법정
보다 수도원에 더 가까운 환경에서 추론의 기예를 발전시키는 학파를 형성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맥락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그의 이상 영역을, 다른 시대에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는,
꽤 다르게 표현되었을 하나의 간접적 화술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 자신의 존재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순수형상에 해당되는 것은 사회적 사실과 사회적
관계의 존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 또는 사회의식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정신을 따르고 싶은 사람은 그를 문자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으
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그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우리 자신의 맥락으로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그리고 앨빈 굴드너(Alvin Goul
dner)는, 그들 자신의 시대에 대해 당연히 서로 다른 이념적 교훈을 도출했지만, 정확히 이런 구속에 충실
했던 플라톤의 해석자들의 본보기이다.
더 읽을 책
S. Fuller, Social Epistemology (1988).
W. Fusfield, "To Want to Prove it ... is ... Really Superflous" (1997).
A. Gouldner, Enter Plato (1965).
T.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70).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T. S. Kuhn, The Essential Tension (1977).
W. V. O. Quine, Word and Object (1860).
J. Rawls, A Theory of Justice (1971). [존 롤즈, <<정의론
L. Strauss, Persecution and the Art of Writing (1952).
S. P. Turner, Sociological Explanation as Translation (1980).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