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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형법서 ^ 흠흠신서^)
다산 정약용
"死因은 지나친 음욕이 부른 情炎의 불길"
정약용은 ‘흠흠신서’ 중 ‘김정룡 사건’에서 남녀의 정염(情炎)이 실제 몸까지 태웠다고 추정했다. 그림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월하정인(月下情人)’. (자료사진)
○ 외도중 죽은 나주 사람 김정룡
● 몸 안의 장기에서 시작된 淫火
비과학적 인체 발화 현상 사례
1814년 12월 12일, 나주에 사는 김정룡의 돌아가신 아버지 대상(大祥·죽은 뒤에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날이었다.
김정룡은 제사를 마친 후, 고기를 포장하더니 대접할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아들을 시켜 술장사하는 김소사의 집에 고기를 보냈다.
그가 말한 ‘대접할 사람’은 반남면에 있는 ‘길가의 여인’(潘南路邊之女人)이었다.
그날 저녁, 김정룡은 아내에게 일이 있어 늦게야 돌아온다며 나가더니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숙박업을 하는 고은옥의 집이었다.
그는 땔감으로 쓸 나무 석 단을 구해 들고는 고은옥에게서 얻은 빈방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서둘러 그 여인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매섭게 추운 겨울, 한 달 넘게 비워 둔 방에 직접 나무를 구해 불을 지펴 훈기를 더하고, 깨진 그릇을 주워 약간의 불을 담아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다음 날, 여자와 밤을 보낸 김정룡은 해가 중천에 닿도록 일어나지 않았고 문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호는 젖어 있는 상태로 방 안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잠겨 있던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연기가 방 안에 자욱한 채, 두 남녀가 꼭 끌어안은 채로 온몸이 불에 타 있었다.
남자의 머리는 여인의 오른팔을 베고 있었고, 여자의 다리는 남자의 배 위에 걸쳐 있었다. 깨진 그릇에 담았던 불은 많지 않았고, 불은 꺼져 재가 이미 싸늘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남자의 오른발이 불을 담은 그릇 위에 있었는데 다리는 불에 데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배로부터 정강이까지가 까맣게 타 있는 상태였다. 여인 역시 몸통이 불에 타 있었고, 두 다리와 얼굴은 성한 상태였다.
초검(初檢)을 시행한 나주 관아는 연기로 인해 의식을 잃고 이후 불에 타 죽음에 이른 것으로 판명했다. 반면 감영의 판단은 연기로 인해 이미 죽은 후에 불이 난 것으로 판단했다. 어쨌거나 나주 관아와 감영은 한동안 비워 놓은 방에 갑자기 불을 때면서 발생한 연기에 의한 질식, 그리고 이후 불이 솜옷에 옮아 붙어 일어난 화재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던 사건은 정약용이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고 깜짝 놀랄 만한 결론을 도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약용은 오랜만에 구들을 덥힐 때 일어나는 흙의 습기와 연기는 독기가 없는데, 어찌 한 명도 아닌 두 사람이나 죽음에 이를 수 있겠느냐며, 불 그릇에 올려놓은 발은 멀쩡한데 몸과 다리가 불탄 것도 이해할 수 없다며 관아의 조사 결과를 부정했다.
그러고는 불에 탄 김정룡 시체의 음경이 발기된 상태인 것을 근거로 지나친 음욕으로 인하여 몸 안의 장기에서 음화(淫火)가 발생해 목숨을 잃고, 이후 불이 밖으로 번져 몸을 태운 것이 사건의 전모라고 주장했다.
‘흠흠신서’에는 이 사건을 드물고 기이한 일로 기록했다. 질식과 화재로 인한 사고사로 정리됐던 사건을 뒤집은 정약용은 이를 통해 간음과 과도한 음욕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남녀가 서로 껴안은 채 죽기에 이르기까지 풀지 않고, 꿈을 꾸는 듯, 자는 듯 죽어 버렸다는 사실에 정염(情炎)의 불길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정약용의 판단이 더해져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되었다. 심지어 비과학적인 인체 자연 발화 현상의 사례로까지 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허원영 연구원ㆍ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