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한덕수 국무총리다.
제8회 행정고시로 입직하여, 특허청장, 국무조정실장, 통상교섭본부장, 재정경제부장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참여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국무총리 퇴임 이후 약 14년이 지난 2022년 5월,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두 번째 국무총리 임기를 지내고 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윤석열 정부 5개 정부에 걸쳐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를 가리지 않고 차관급 이상 고위직을 역임한 진기록을 보유한 원로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기에 연속해서 차관급 직위를 지냈고, 참여정부 시기에 장관급으로 영전하고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역대 4번째로 서로 다른 두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제4·10대 백두진 전 총리, 박정희 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제11·31대 김종필 전 총리, 문민정부와 참여정부의 제30·35대 고건 전 총리가 선례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까지 출신 지역을 서울특별시로 밝혀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의혹과 구설수에 휘말린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에는 출신 지역을 서울특별시로 올렸다가 이후 부친의 원적지인 전라도로 고쳐 언급하고 하버드 박사라는 희소성이 더해져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승승장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인사청문회 당시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질의하자, 한덕수 후보자는 “고향을 물었을 때 단 한번도 다른 곳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윤석열 정부 인사 중 사실상 유일하게 야당과의 소통 통로 역할을 해왔음에도, 2023년 9월 중순 더불어민주당에서 한덕수 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발의하면서 정국이 급랭되었다.
한 총리는 참여정부의 국무총리였던 만큼 야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고, 월 1회 이상 야당 의원을 관저나 외부 식당으로 초청해 비공개 오찬 및 만찬을 해왔다고 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한 총리를 찾아가 신분당선 등의 지역 민원을 넣은 적도 있다. 그렇기에 해임건의안이 발의되자 총리실 내부에서는 허탈한 분위기도 상당하다고 한다.
한덕수를 싫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는 최고의 학교를 나와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커다란 구설수도 없었다. 그 만큼 자신을 죽이고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충성을 해 왔다는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소시오페스가 틀림없다.
예측컨대 한덕수는 죽을 때까지 어떤 직책이던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절대 놀지 않고 쉬지 않고 어떤 일이든 계속해서 할 것이다.
나는 한덕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만 쉬고 아내 손잡고 놀러 다녀라. 그만 일해라. 그만 눈치 보고 살아라”
내가 읽은 《장자》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타인의 길을 가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
비록 외롭고 고통스럽더라도 나의 길을 찾아라. 그리고 그 길을 가라. 타인을 위한 삶을 살지 말고, 나의 삶을 살아가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길을 가지 않는 인생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장자는 말했다.
‘남을 위해서 생각할 것인가, 나의 생각을 할 것인가.’
‘남을 위해서 노래 부를 것인가, 나의 노래를 부를 것인가.’
‘남을 위해서 일할 것인가, 나의 일을 할 것인가.’
‘남을 위하여 살아갈 것인가, 나의 삶을 살 것인가.’
장자는 〈외편(外篇) 변무(駢拇)〉에서 말했다.
마치 화살이 날아와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장에 박히는 것처럼.
내가 말하는 선(善)이란 인(仁)과 의(義)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 그대로의 모습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귀 밝음이란 타인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눈 밝음이란 타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무릇 스스로 보지 않고 타인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타인으로 만족하는 자는 타인의 만족으로 만족할 뿐 스스로의 만족을 얻지 못하는 자이다. 타인이 가는 곳으로 갈 뿐 스스로의 길을 가지 못하는 자이다.
장자는 단연코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타인의 길을 가지 마라. 자신의 길을 가라. 지금 타인의 길에 서 있다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라.
타인의 길은 본성을 따르는 길이 아니다. 천명을 따르는 길도 아니다. 왜 그대의 길을 가지 않고 엉뚱하게 타인의 길을 가는가.
인생이란 기껏해야 100년이 될까 말까 한다. 지금부터 50년 뒤면 내가 서 있는 곳이 전부 변한다. 내가 살던 건물은 헐리고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죽음으로,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절반 이상 사라진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사물이나 사상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이 있던 자취조차 감지해 내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길을 가라.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더라도 그 길을 모색하고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동물도 자기 본성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하물며 인간이 그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타인이 듣기 좋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나의 귀로 들어야 한다.
타인이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타인이 만족하는 것을 그대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나의 만족을 얻어야 한다.
타인이 가는 길을 나도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다. 외롭더라도, 힘들더라도, 고통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라도 자신의 길 위에 있어야 한다.
그 길을 찾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내가 간 그 길에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찾아와 걷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자. 살 곳을 걱정하지 말자.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 수 있도록 태어난다. 하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장자》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은 만민을 낳으면 반드시 직분을 줍니다. 자식이 많으면 각각 직분이 주어질 텐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나의 길을 가다가 굶어 죽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몸은 밥 대신 죽을 먹고 좋은 집 대신 초라한 곳에 살지라도 마음은 진수성찬을 먹고 아흔아홉 칸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리라.”
장자는 분명히 말한다.
타인의 길을 가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고.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삶은 비참한 인생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가면 묶이는 것 없이 지낼 수 있다. 묶이는 것이 없으면 바르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 외부의 것이 나의 운명을 어찌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