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의 초상화이다. 영조는 심각한 당파싸움에 대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스스로 학문을 즐겨 문예 부흥기를 이루었다. 이 그림은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로 68㎝, 세로 110㎝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는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있고 두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높은 콧등과 코 가장자리, 입의 양끝은 조각처럼 직선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에 있는 각대 역시 위로 올라가 있고, 옷의 외곽선을 따로 긋지 않는 등 조선 후기의 초상화 양식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1744)에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일류급 초상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비록 원본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원본을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왕의 영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근무한 여자들 중 실제 궁궐 살림을 책임졌던 상궁 이하 실무자들의 품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궁,상의(정5품)⇒상복,상식(종5품)⇒상침,상공(정6품)⇒상정,상기(종6품)⇒전빈,전의,전선(정7품)⇒전설,전제,전언(종7품)⇒전찬,전식,전약(정8품)⇒전등,전채,전정(종8품)⇒주궁,주상,주각(정9품)⇒주변치,주치,주우,주변궁(종9품)
위에서 나열한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오늘날로 볼 때 행정서기보․전기주사…등등에 해당하는 직류․직급별 분류라 할 것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종5품 이하의 궁인직 여인을 말한다. 그러다가 대체로 35∼36년쯤 근무하면 정5품을 제수 받게 되어 이때부터는 ‘상궁’이라 불리었다.
그렇다면, 『무수리』는 어떤 일을 맡은 여인이었을까. 각 처소에서 물 긷기, 불 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 나인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통칭하여 무수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대부분이 기혼자로서, 가슴에 패(牌-출입증)를 달고 주로 궁 밖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궁녀가 정규공무원이었다면 무수리는 이를테면 잡급직 혹은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조 21대 왕 영조는 바로 이런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재임 중 3명의 왕비(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두었으나 슬하에 아들은 한 명도 두지 못했다. 정작 그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주인공들은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등 이른바 ‘창밖의 여자’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경종을 낳은 여인이 장희빈이요, 영조를 낳은 여인이 무수리 최씨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씨는 결혼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경종과 영조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자식들이었다는 얘긴데, 요즘 같으면 만사 재치고 가정법원부터 직행하였을 중차대한 가정파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궐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잔치까지 성대히 벌어졌을 터이니, 세상 참 불공평(?)하단 말밖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각설하고, 영조에게는 이처럼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즉위 초기엔 일부 반대파 - 특히 소론 강경파 - 에서 그를 임금으로 간주하지 않는 행태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임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야 말로 이를 불식시키는 첩경임을 직시하고 평생 근신하는 자세로 국태민안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짐으로써 조선의 발전을 크게 앞당긴 입지전적인 임금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즉위와 함께 영조가 내지른 제일성은 ‘탕평책(蕩平之策)’이었다. 기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붕당의 폐해가 누구보다 뼛골 깊숙이 와 닿았을 것이었다.
영조는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었던 소론의 이광좌․조태억을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세제 책봉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조정의 기강을 다잡는 차원에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만들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 첫 번째 타켓은 뭐니뭐니 해도 ‘7인의 특공대’중 대장 격이었던 김일경이었다. 때마침 노론 송재후로부터 신임사화 조사결과서(교문)에 연잉군 시절의 영조를 음해(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하는 문건이 있으므로 김일경을 단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 이후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처에서 빗발쳤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심문)하였으나, 영조에게 ‘나으리…’ 운운 하며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는 방자함으로 일관하던 김일경은 끝내 공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처형되었다.
또한 노론 역모설을 고변하여 신임옥사의 또 다른 단초를 제공하였던 목호룡도 친히 국문하였으나 같은 행태를 보임에 따라 당고개에서 목을 자른 후 3일간 거리에 매달아놓는 참형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하였던 나머지 6명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의 왕세제 시절 소론이 저지른 행위들이 모함으로 속속 드러나고 공작정치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기를 편 노론이 다시 벌떼처럼 소론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영조는 이광좌, 조태역, 유봉휘 등 소론 핵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 노론측 인사들로 진용을 다시 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아울러 노론의 4대신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임옥사를 ‘거짓으로 죄를 꾸민 것’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신원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과천에 노론 4대신을 기리는 사충서원도 세웠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하지만 노론 측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조를 압박하였다. 이를테면 즉위를 도와준 자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으라는 ‘빚 독촉’이었던 셈이다.(이 정도면 지지세력이 아니라 반 공갈․협박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특히 민진원, 정호 등이 주동이 되어 신임옥사에 대한 보복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국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였던 영조로서는 소론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이 같은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론은 ‘얼음과 숯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빙탄불상용)’는 논리를 내세우며 차제에 소론과 노론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다시 압박하고 나왔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정국이 다시 정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전가의 보도 같은 ‘판엎기(환국)’를 통해 이를 타개하였다.
민진원, 정호 등 노론 대신들을 전격 파면시켜버리고 그 자리에 얼마 전 몰아냈던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을 다시 기용하는 한편 소론세력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그리고 경종 연간에 있었던 세제책봉 상소 건과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 상소 건 등을 모두 불충(不忠)한 행위로 규정하였다. 하여, 을사처분에 의하여 ‘사충(四忠)’으로 신원되었던 노론의 4대신은 졸지에 ‘사역(四(逆)’으로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뜻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났다. 한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과격세력이 경종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의 교체를 기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름하여 ‘이인좌의 난’이었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주군을 잃은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일부 소론 과격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의 급진세력을 포섭하여 영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설의혹이 있으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모반를 정당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박필현 등은 영조 즉위 직후부터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지방의 유력인물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양과 지방에 속속 조직이 만들어졌고 지역별 대표도 선임해놓았다. 아울러 평안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도 구어 삶아 놓았다.
이윽고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의 동생 심유현의 말("주상께선 승하하시기 전 검은 피를 쏟으셨다"는 말)을 빌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곳곳에 이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돌아다녔다. 이들은 이 소문에 동요를 일으킨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동기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동조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용인에 퇴거하여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조정에 고변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김중만 등은 반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모반자들의 색출을 명령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역세력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1727년 3월 15일 청주의 이인좌가 청주성을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이순신의 손자), 군관 홍림 등을 살해한 뒤 성을 접수하였다. 그리고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하며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이고 관의 곡식을 풀어 민심의 동요를 획책하였다. 그는 모든 군사에게 흰옷을 입히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새로 도순무사(변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를 맡기도 하고 지방관들의 비정(秕政)도 살폈던 벼슬)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고 말았으며, 청주성을 지키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성에서 밀려나온 뒤 상당성에서 패함으로써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다는 이유로 인해 이후 소론의 입지와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반면, 영조는 이 사건으로 국정의 제1목포로 설정하였던 탕평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소론측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반란이었고, 영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론을 정책에 반영할 명분이 제공된 고마운(?) 반란이었던 셈이다. 왕을 제거하려 한 반란이 도리어 왕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런 역설이 세계의 반란사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아가자 영조는 당파싸움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노․소 안배의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이었다.
그는 노․소론간의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시비’를 똑같이 인정하고 똑같이 처벌한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편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때까지 노론과 소론 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을 절충해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그리고 소론의 조문명․조현명․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 탕평파 인사를 주축으로 ’노․소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책을 실현하였다.
영조는 관직을 임명할 때에도 반드시 노․소론 관원을 1:1로 배치하는{쌍거호대(雙擧互對)}정책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吏曹)의 인적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을, 참의에 소론 서종옥을 앉히면, 전랑에는 노론 신만을 앉혀 상대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리하여 정국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늘 명치 깨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채증 증세 같은 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종 연간에 자신을 추대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노론측 인사들의 신원(일종의 명예회복)문제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는 영조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을 간곡히 설득하고 이들의 양해를 얻어 점진적으로 노론의 피화(被禍)자들을 신원시켰고, 1740년 노론 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함께 신임옥사가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로써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과 소론은 물론 전 백성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영조는 노․소론 사이에서만 진행하였던 종전의 소극적 탕평을 남인과 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으로 확대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노․소론을 1:1로 배치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정책{유재시용(惟才是用)}을 도입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선조 이후 때론 치열하게, 때론 격렬하게, 때론 사생결단으로 싸워왔던 사색당파가 조선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 역사가 이쯤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흘러왔더라면 이 글도 여기서 끝맺었을 터이고, 조선이란 나라 또한 이즈음부터 강성부국의 토대를 확고히 마련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몸이 근질근질 해진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며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762년에 터진 ‘사도세자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