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스무살, 청춘
거친 인파 속에 파묻혀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
매일 밤 청춘을 그리면서도
그 아름다운 청춘들이 흐릿해져 더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을 느낀 적이 있다.
매서운 편의점 사장의 꾸짖음을
인내하면 어느새 밝아오는 아침
그러나,
내 청춘은 여전히 어둠에 갇혀있다.
그런 실의를 느낀 적이 있다.
거친 파도에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흐르는 물결에
흐르는 눈물에
세상은 잠시 고독해져갔고,
난 잠시 고요해졌다.
돌아오는 기차 창틀 너머로
다시 청춘을 그릴 때면
그 청춘은 다시 멀어져가는 창틀 너머의 전봇대처럼
내 시야에서 멀어져만 갔다.
이제 할 수 있는 내일은
병원 안에서 오지 않았다.
심연 속 외로움은 병원 창문에 쌓인
눈처럼 차가웠다.
내 스무살 청춘은 시린 한기 속에
땅에 내려 앉았다.
눈이 녹았다. 내 스무살 청춘은 사라졌지만,
병원에서 창문을 여밀 때
느꼈던 살아있다는 축복이
날 다시 춤추게 했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난 다시 청춘이란 꿈을 그렸다.
그리고 봄.
썸씽녀에 대한 추억.
대학교 때 내 자취방에서 내 작품 회의를 하는데 내 작품에 출연할 여자 동기가 셋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내게 스타킹 마음에 드는 거 사오라고 했다.
다른 남자 같으면 발기찬 일이 될지도 모를 것이지만, 난 아주 괘씸했다.
내 작품에 출연할 배우가 디렉터에게 그런 사소한 것까지 리드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매우 불쾌했다.
그녀가 자취방을 떠날 땐 마치 길고양이가 제 길 찾아가는 걸 보듯 멀찌감치서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하나는 잘 생각 안난다. 아마 그녀하고 나하고는 어떤 이상한 감정조차 싹트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난 그녀가 내 가슴을 만지작대며 만져봐도 되지? 라고 물었을 때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서로 간에 없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나 신체 특이사항을 쉽게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단지 키만 컸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나머지 하나. 그녀는 달랐다. 집에 바래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섭다고 손을 잡아달라고도 했다.
또한, 바보 같이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더니 "나 바보같지?" 라며 밝게 웃는 것이었다.
자취방 구경좀 할까 하고 그녀를 무작정 쫓아가니까 그녀가 창피하다며 날 내쫓았을 때 즈음 뭔가 우리 사이에
이상한 감정이 오고 갔음을 감지했다.
그 뒤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그녀에게 메시지가 많이 왔었다. 미안한 맘에 그녀를 외면할 수 없어 전화했다.
"이제 괜찮지? 다 나았지? 학교 다닐 수 있지? 다시 만날 수 있지?"
난 항상 응이라고 얘기했지만,
그 뒤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그녀는 내게 대학 시절 유일한 썸씽녀로 남아 있다
여름.
그 아이가 그립다.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고, 이기적으로 그것에 익숙해져만 갔다. 작품 회의 때 그녀가 내 발을 툭툭 치면서 새 신발을 자랑하려 안간힘을 써도 애써 모른 척 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음은 그녀에게 비극이었고, 내겐 연민어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가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유일하게나마 나를 사랑해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랑받았던 추억이 유리 파편처럼 가슴에 파묻힌다.
촬영내내 종종 걸음으로 내 뒤만 쫓아다녔던, 유난히 소녀티를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귀찮던 구석이 몹시 사랑스러운 오늘에서야 서러운 마음에 그 때의 촬영장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다시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달라져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이제는 저편에 있는 그녀를 그린다.
그녀는 이제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잊은 것 같아 난 그렇게 그녀에게서 멀어져갔고 나의 이별은 잘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학창 시절 기억 속에 바람이 분다. 그리고 눈물이 흐른다.
그녀에게는 소중했던, 내게 주었던 마음이 내 마음의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시린 한기 속에 그녀는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를 맞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닦는다.
모티브- 이소라 "바람이 분다" & 대학교 학창 시절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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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녀가 보고 싶다.
손 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 가 오늘도 넌 숨 쉬고 있지만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 위엔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너는 떠나며 마치 날 떠나가듯이 멀리 손을 흔들며 언젠가 추억에 남겨져 갈거라고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그녀가 보고 싶다. 어느 날인가의 일이다. 씁쓸한 일이 내 방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며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리며. 그녀의 프리젠테이션, 그 신선했던 충격이 메아리처럼 내 머릿 속에 울리고
난 바보처럼 그녀가 프리젠테이션때 소개했던 영화를 보고 있었다. 3시간 30분짜리 3편.
그렇게 새벽이 되었다. 담배를 피며 그녀를 또 떠올렸다.
그녀와 난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것이 짜증이 되어 목구녕까지 넘어왔다.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나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프리젠테이션을 하면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추억이다.
전혀 화장을 하지 않고, 담배도 태우고. 맨날 검정 레깅스만 입고 다니던 그녀.
어쩌면 그렇게 미치도록 그녀를 애타게 찾는 이유는 내가 그녀의 모습 일부를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사랑했다는 것이 현재 진행형이어서일지도 모르며 그럼에도 난 그녀에게 더이상 다가설 수 없어서일지도 모르며 결정적으로 난 그녀를 찾을 용기가 내 안에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부아가 치미는 일이다. 그녀의 영화는 보는 내내 아름다웠다. 마치 치장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근심과 싸워가며 그녀를 애타게 찾고 그리고 사뭇치도록 그리워하면서 때론 그녀를 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일 지도 모른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실제로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갔다.
우연이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했던 강의실도 무턱대고 들어가봤다.
내가 살던 아파트 내 공간도 찾아봤다. 벨을 눌렀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불길했다.
그녀 또한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날 떠났고, 마치 영화속 주인공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슬픈 일이다.
근데 그런 거 있지. 슬프면서도 기쁜 거. 그녀를 만날 수 없을테니 슬프고 그럼에도 그녀를 만날 걸 꿈꾸니 기쁘다.
잘있습니까. C선배님. 언젠간 추억에 남겨져 갈 사람. 그녀에게 이글을 바칩니다. |
에필로그.
내 첫사랑은 차가웠다.
냉정한 그녀와 열정이 넘쳤던 내 사이에선
기묘한 기류가 오갔다.
눈치없이 그녀를 사랑했는 지도 모르고
그녀 입장에선 염치없는 내가 얄미웠을지도 모른다.
장미 꽃다발을 선물했던 첫고백때의 일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가시 돋은 장미처럼 가슴 미어지는 추억 또한 그때 만들어졌다.
미친 척 그녀의 집에 찾아가 청치마를 선물했다.
남들이 아름다운 그녀를 훔쳐보지 못하게 매우 긴 청치마를 선물했다.
바보 같은 짓이다.
내게 돌아오는 건 냉정한 그녀의 시선이었고,
그렇게 내 첫사랑은 차가워져만 갔고,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난 이제 누군 가의 애인이 될지도 모르고 다른 이와 결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신하건데 역시나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확신하건데 차가웠던 내 첫사랑 또한 쉽게 잊혀지진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 같다.
첫댓글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관찰자일수가 없기에 생기는 비극 때로는 후회 그래서 훗날에가서야 추억으로 얄밉게 자리잡는 이 아이러니라니..
슬프고 힘들어 눈물흘릴때 그 때만큼은 차라리 가슴이 더 아팠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때도 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말야.
진행형이어야 할 사랑의 부재로부터 오는 슬픔은 한없이 아파해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정말 20대에는 그러더라. 뭐 딱히 지금도 다르진 않다. 30대라고 심박이 더 느려지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