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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정전 70년,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여정[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2023-06-06 14:40
[프롤로그]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형제의 상’이 있다. 전선에서 총부리를 겨누던 상대가 알고 보니 헤어진 형제인 것을 형상화했다. 동생이 형의 품에 안겨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생함과 절절함이 절로 느껴진다. 실제로 북한군은 전쟁 중 많은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징발했다. 전투에서 부자, 형제가 총을 쏘다 친혈육인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국군 형의 품에 안긴 북한군 복장 동생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이 상은 국군 8사단 16연대의 형과 북한군 8사단 83연대의 동생이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홍진환기자 jean@donga.com
6·25 전쟁 ‘동족상잔’과 비교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오랜 기간 피와 역사, 문화를 공유했던 땅과 사람에 대한 침략인 점에서 6·25를 닮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후 처리가 ‘전쟁 중 분할된 상태로 정전 체제가 유지되는’ 한반도 모델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한반도 모델’은 따라와서는 안 될 매우 안 좋은 사례다. 오히려 국토와 민족이 갈라진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요일 새벽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 같은 무도한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웠다. 더욱이 북한은 소련제 T-34 탱크와 앵앵거리는 야크기를 몰고 왔다가 미군의 막강한 공군과 화력 앞에 굴복했던 당시와 다르다. 핵무기,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사거리 1만2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다양한 투발 수단을 개발해 남한을 ‘핵 볼모’로 삼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점차 높아지는 한반도의 안보 불안과 지정학적 단층지대의 숙명의 뿌리에는 분단과 6·25 전쟁이 있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전쟁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의 대변인이자 인천상륙작전 기획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로우니는 ‘운명의 1도’ 서문에서 “한국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한국인이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북핵 위협 속 6·25 전쟁 정전 70년을 맞아 몇 가지는 기억하고 되새겨보자는 취지에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착오와 실패 | |
미국 |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 제외해 공산 세력 침략 자극 -전쟁 초기 북한군 과소평가 -중공군 개입 전후 중공군 과소평가 -중공군 불참 오산으로 압록강 돌진 |
소련 | -미국 불참 오판 -미중 적대화 음모 |
중국 | -미국 불참 오판 -압록강 도하 후 능력 과신해 38선 넘어 남진 -소련의 지원 받지 못하고 향후 중소 분쟁에 영향 -참전으로 미국 대만 지원으로 전환 -유엔 가입 늦어지고 국제사회에서 고립 |
남한 | -김일성의 남침 경각심 부족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이 미국 오도 -좌우익 대립과 혼란으로 안보 체제 취약 -미군 철수 요구 여론이 안보 약화 초래 |
북한 | -미국 불참 오판 -남침 후 남한 20만 명 봉기 호응 오산 -전쟁으로 고립, 피폐, 침체 |
“남한군은 북한에 남침할 용기를 줬다” 맥아더의 비판[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2023-06-06 15:00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上)
공격개시 = 전화음어 ‘폭풍’ / 무전 ‘224’
발포개시 = 전화음어 ‘폭풍’ / 조명탄 ‘적색’ / 무전 ‘333’
6·25 전쟁 개전 후 입수한 북한 ‘전투명령 1호’에서 드러난 작전명은 ‘폭풍’이었다. 북한군은 암호처럼 전격적으로 옹진반도~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을 잇는 38선에서 새벽 4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비슷한 시각 강릉 남쪽 정동진과 동해 남쪽 임원진에서는 북한군 육전대와 유격대가 ’순조롭게 상륙’해 동부 전선 8사단의 퇴로를 막았다. (소련 스티코프의 6월 26일자 전문). 하루 전날 평양방송이 “내일 오전 중 중대 방송이 있다”고 남침을 예고한 것처럼 25일 오전 11시 “북침을 해왔다”고 허위 선전을 했다. 북한은 6월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고 평화공세를 폈는데 이는 전쟁 개시 직전 연말술이었다.
휴전까지 1129일 동안 민족과 국토에 길고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아일보 1950년 6월 26일 1면
동아일보가 1950년 6월 26일 1면 머릿기사로 ‘북괴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5일 당일에는 전쟁 발발을 알리는 호외를 수차례 뿌렸고, 27일자까지 발행한 뒤 잠시 휴간했다.
● 비상해제 휴가 외출 외박으로 최전방 구멍 숭숭
분단 이후 산발적으로 무장 충돌이 계속되어 왔지만 그해 상반기에는 유난히 전군 비상 경계령이 잦았다. 4월 11일, 5월 8일에 이어 6월 11일 세 번째 내려졌던 비상 경계령은 24일 0시 해제됐다. 장기간 경계령 발령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누적과 농번기까지 겹쳤다. 춘궁기를 맞아 군부대 알곡이 거의 떨어진 것도 한 요인이었다. 중부전선 6사단은 3월에 비상식량이 하루치였다고 한다. (남도현, 85쪽).
6월 10일 군인사로 전후방 전체 8개 육군 사단 중 5개 사단장이 바뀌었는데 전방 4개 사단장은 모두 교체됐다. 비상 경계령 해제로 전방부대 휴가 외출 외박 병력이 전체의 30%에 달했다. 북한군 주력 1군단이 내려온 의정부와 포천을 담당하는 국군 7사단은 더 높아 비율이 40%였다. 북한군 1군단의 3사단과 4사단, 105전차여단과 국군 7사단만을 보면 병력 차이는 7 대 1, 화력까지 계산하면 18대 1 정도로 열세였다. 전방 4개 사단 중 7사단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당시 유재흥 7사단장은 부임 후 철원 쪽에 적의 신예 전차 부대가 집결 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부대에는 대전차 지뢰도 없었다. 육군본부에 호소했으나 미 고문관들은 “한국 지형은 전차가 활동할 수 없으니 겁낼 것 없다. 2.36인치 로켓포가 어떤 무기냐”고 일축했다. 북한이 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내려왔을 때 2.36인치 로켓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유재흥, 113쪽).
의정부시 자일동의 옛 축석령 고개길에 있는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는 몸을 던져 북한 전차를 막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축석령 고갯길은 지금은 43번 국도에서 벗어나야 갈 수 있는 승용차 2대가 비켜가기에도 좁은 길이다. 7사단이 붕괴된 후 긴급 투입된 포병학교 교도2대대(김풍익 대대)의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등은 곡사포를 직접 조준해 발사하기 위해 북한군 전차 50m까지 접근했다. 이어 전차 캐터필러를 파괴해 주저앉힌 뒤 두 번째 포격을 하려다 적 후속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됐으나 김풍익 소령처럼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조금이나마 진격속도를 늦췄다.
경기 의정부시 자일동 옛 축석령 고갯길에 1988년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 앞에는 김풍익 중령부터 이종현 일병까지 결사대 11명의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50년 6월 24일 밤 용산 육군참모학교 구내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가 열렸다. 50여명의 고위 장성이 참석했고 밤 10시경 끝났다. 10여명의 육군본부 및 미 군사고문단 장교는 명동 카바레로 2차를 가서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김인철, 110쪽).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24일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해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토록 했다. 그만큼 북한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던 때였다. 하지만 정작 채 총장은 용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에 참석해 이튿날 새벽 2시에 귀가했다. (백선엽 2권, 175쪽)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조형물 ‘멈춰진 시계’가 개전 시각을 알리듯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멈춰있다. 구자룡 기자
● 미국, 한국의 전략적 가치 저평가
미국 전쟁부는 1947년 4월 미국 국가안보의 중요성에서 한국이 원조 대상 16개국 중 13위라며 국무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했다. 미 합참도 그해 9월 국무부에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통보했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1948년 3월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산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하면서 한국은 방어선 밖에 두었다. 일본 방어에 필요한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호, 146쪽).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8 문서는 1948년 4월 베를린 사태 등 유럽의 상황 악화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필요하다며 그해 12월 31일로 제시했다. (김철수, 51쪽). 미국은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그해 6월부터 공수작전을 시작하는 등 유럽의 냉전도 점차 긴박해졌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년가량이 지나 병력과 군비를 대폭 축소한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은 한국에 병력을 주둔하며 강한 방어 의지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미 육군 병력(명) | 미 극동군사령부 병력(명) | ||
1945년 | 830만 | 1947년 | 30만 |
1950년 | 60만 | 1950년 | 10만 8천 |
● 주한 미군 철수
주한 미군 철수는 소련이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를 완료한 뒤 압박하고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런데다 미국과 한국 국내에서는 철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1948년 8월 시작된 미군 철수 작전명은 ‘크래버플 플랜(crabapple plan)’. 당초 시한은 그해 12월이었다. 그런데 그해 하반기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고착화한 데다 여순 사건, 북한의 잦아진 38선 도발 등으로 연기돼 이듬해 6월 30일 완료됐다. 한국에는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았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공산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미군 철수를 승인한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 정부는 책임 일부를 돌렸다. 맥아더는 전쟁이 끝난 후에 반박했다.
“내가 동의한 것은 한국군 10개 사단을 현대식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대체한다는 조건하에서 워싱턴 당국의 검토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나의 동의 조건은 이뤄지지 않고 철수만 이뤄졌다. 그 책임은 국무성이 져야 할 것이다”(‘정보’ 6호, 125쪽)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8년 4월 27일 자로 작성한 주한 미군 철수 계획서 ‘크래바플’
● “북한군에 남침 기회와 용기를 북돋은 한국군 수준”
미국은 한국군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개전 시 규모 10만3800명)하고 공군 창설에 반대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은 6만5천명 유지에 필요한 지원뿐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영향을 미쳤다. 미군 철수 이후 북진을 견제한다며 방어무기만 제공했다. 소련제 T-34 탱크와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에 맞서 전차, 155mm 곡사포 등을 요청했으나 산악이 많은 한국의 지형, 도로와 교량 조건상 탱크는 필요 없다고 KMAG는 판단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은 전선에 배치된 군 병력이 아니라 경찰대원이다. 무기는 경화기뿐이고 공군이나 해군은 아예 없으며 전차, 대포 또는 기타 전투부대에 필수적인 무기는 없었다. 한국의 북한 공격을 방지하는 조치라지만 북한군에 남침할 기회와 용기를 돋워준 것이다.”(맥아더, 165쪽)
국군 | 북한군 | ||
육군 | 병력 | 8개 사단 94,974명 | 10개 사단 175,200명 |
무기와 장비 | 전차(탱크) 0대 장갑차 27대 57mm 대전차포 140문 | T-34 전차 242대 장갑차 59대 대전차포 552문 모터싸이클 500대 | |
해군 | 병력 | 6,956(해병대 포함) | 10,297(육전대 포함) |
무기와 장비 | 함정 36척 | 소형경비정 3척, 어뢰정 3척 | |
공군 | 병력 | 1,897명 | 2,800명 |
무기와 장비 | 항공기 22대 | 전투기 84대 등 226대 | |
총병력 | 103,827명 | 188,297명 |
● ‘정보 실패’가 문을 열어 준 북한군 남침
그날의 도발을 막지 못한 것은 적색 조명탄이 올라갈 때까지 잇단 적색 경고등을 무시한 데도 책임이 크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봄 중앙정보국(CIA)은 북괴가 산발적인 습격을 바꿔 언제 전면 공격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언제인지 단서를 제공해주는 정보는 없었다. 더욱이 한국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서 소련측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반복해서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트루먼, 308쪽)
북한군 10개 사단 18만여 명이 공격 개시 3일 전 전방 배치를 마쳤다. 대규모 적병력의 이동이 이뤄져 동향에 대한 첩보와 정보가 쏟아졌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이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경각심이 부족하거나 흘려듣고 과소평가하고 무시했다.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6월 19일 방한해 전방 7사단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북한의 공격을 받더라도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덜레스가 전술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으며 정확한 정보도 없어 한국군이 38선 북쪽 부대에 비해 얼마나 열세인지 알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맥아더는 북한이 한국 측에 공격 준비 사실을 속이기 위해 38선 부근에는 한국군과 거의 같은 정도의 경무장한 병력을 배치하는 기만술도 폈다고 했다. (맥아더, 165쪽).
맥아더가 이렇게 덜레스를 비판했지만 6·25 전쟁이 터질 때 극동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전체를 관할하는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보 실패’가 더 치명적이다.
●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 G-2의 ‘정보 실패’
맥아더는 2차 대전 당시 CIA(1947년 창설)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이나 CIA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전투지역에 CIA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맥아더는 OSS를 좌지우지했던 소위 ‘동부 주류파’(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정재계 핵심 인맥)를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OSS나 CIA의 정보를 소홀히 하고 G-2로 불리는 자체 정보팀을 가동했다. (핼버스탬, 84쪽)
G-2에 1950년 5월 하순 북한군이 탱크 여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중(重) 경(輕) 탱크 180대와 장병 1만명으로 구성되고 대전차포, 야포, 오토바이 등도 포함됐다. G-2 책임자 윌로비는 5월 25일 자 ‘일일정보요약’에서 이런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실정에서 경제적 군사적 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모터사이클 1개 연대와 500대의 모터사이클이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앞서 5월 초 38선에서 2마일(3.2km) 이내 주민을 모두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으나 무시됐다. G-2는 농민들이 지뢰를 피해 자발적으로 피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개전 수개월 내 황해도 사리원에서 38선까지 모든 철도를 폐쇄하고 군사용으로만 사용케 했다. 통신 및 간호를 위한 여성 징집, 10대 소년과 일본군 경험이 있는 자들의 황급한 징발 등 정보도 들어왔다. G-2는 ‘전쟁형 편성’으로 2차대전 전 독일이 한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굴든, 44~46쪽)
OSS 시절 이미 38선 너머로 보낸 요원들이 ‘정예부대를 38선으로 이동시키고 전방의 교량과 철로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보내왔다. 그런데 G-2는 정보원의 신뢰성은 ‘F-6’(A∼F 6단계) 등급, 정보의 신뢰성은 6등급(1∼6등급)으로 최하위 평가를 내리며 깔아뭉갰다.
● 이승만의 항의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전까지 “한반도는 냉전이 아니라, 실제 총격전을 벌이는 전쟁상태다”고 남침 임박을 경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이 오면 즉시 철수할 수 있도록 한 발은 한반도에, 다른 발은 밖에 내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미군은 전쟁 중 불리할 때마다 철수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남침 소식을 보고 받고 26일 새벽 3시 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도 항의했다.프란체스카, 1950년 6월 26일 자)
참고 문헌 |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김인철 지음, 『38선에서 휴전선까지』, 보문당, 1992.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조셉 굴든 지음, 김병조 발췌 번역, 『한국전쟁 비화』, 청문각, 2002. 『정보』 6호, 공보실발행, 1956. |
‘미국 불참전’ 오판한 러시아, 북한 남침을 승인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2023-06-08 17:00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下)
한국과 미국이 ‘정보 실패’로 북한군의 동향과 남침 정보를 소홀히 하고 대비태세도 느슨해져 있을 때 북한과 소련은 강한 남침 의지와 치밀한 준비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스탈린과 만찬을 하고 있다.
● 김일성의 남침 의지와 집요한 스탈린 설득
“1950년 새해 국토의 완정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힘차게 전진합시다. 새로운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선인민에게 영광이 있으라!” 김일성의 1950년 신년사에 남침 도발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이성춘, 75∼87쪽).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에서 공산혁명을 이루는 것을 보고 적화통일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11일 정치국 고위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 회의에서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북한은 개전 후 3주 이내에 승리한다, 미국이 개입을 결정해도 참가에만 50일이 걸린다. 인민군이 내려가면 20만 명의 지하 공산단원이 봉기한다”고 말했다.(김계동, 14∼15쪽).
김일성의 자신감은 1년여 노력 끝에 스탈린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와도 좋다는 ‘남침 반(半)승인’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그해 1월 17일 이주연 주중대사 송별연이 끝나갈 때 스티코프 주북한 소련대사에게 “이승만이 북침하면 공격하라는데 공격하지 않으니 인민의 해방과 통일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스탈린과 만나 나의 행동을 허락받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언제든지 김일성을 만나 회담하겠다. 그를 도울 준비를 하겠다”고 회신했다. (선즈화, 321쪽)
1년 전만 해도 스탈린은 김일성의 잇단 호소와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군사 대결을 우려하는 등 여러 조건을 달았다.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 남침을 반대하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날짜 | 내용 |
3월 3일〜4월 7일 | 김일성 박헌영, 스탈린 면담 시 3가지 이유로 남침 승인 거절. ‘인민군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남한에 미군이 있다. 38선에 관한 미소협정 유효하다’ |
8월 2일 | 북한내 소련 군사시설 모두 철거 지시 |
9월 |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 북한의 옹진반도 점령계획 반대 입장 전달 |
9월 24일 | 소련 공산당 정치국, 북한 남침 반대 결의 채택. “북한 주도의 전쟁이 공격의 빌미가 된다, 남한 사람이 북한 지지한다는 보장이 없다” |
스탈린은 ‘남침 승인’ 첫 사인을 보낸 뒤 2월 북한군 3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탄약을 지원하기 위해 1951년에 계획한 차관 1억3000만 루블을 앞당겨 지원했다. 북한은 금과 은 등 광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2월 말에는 군사고문단장을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교체하고 북한군 각급 조직에 군사고문을 파견해 남침 계획 지도를 시작했다.
광물 | 수량(t) | 금액(만 루블) |
황금 | 9 | 5,366 |
백은 | 40 | 488 |
몰리브덴 정광 | 15,000 | 7,950 |
1억3805 |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3월 30일〜4월 25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가진 면담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4가지 이유를 들며 남침 지원 약속을 받았다. ⓵기습 공격으로 3일 내 승리 ⓶20만 남조선 공산당원 봉기 ⓷남한 유격대(빨치산)의 지원 ⓸ 미국 참전 준비 부족.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중국 지도부가 승인하는 경우 해방전쟁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소련 무기와 장비들이 청진항에 쏟아져 들어와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됐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호군군상. 전쟁을 극복했던 각계각층의 38인을 조각해 전쟁의 고난과 고통의 상처를 표현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호국 정신을 상징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중국으로부터는 병력 귀환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병력을 보강했다. 북한은 국공내전 중 인민해방군에 편입된 한인 병사들의 귀환을 요구했다. 중국은 내전이 끝난 뒤 병력 감축 필요도 있었던 터여서 흔쾌히 동의하고 속속 돌려보냈다. 전쟁 전까지 돌아온 한인 병사 6만3천여명은 북한 병력의 3분에 1에 달하는 데다 국공내전으로 실전 경험도 풍부해 남침의 주력이 됐다.
중공군 소속 및 인원 | 북한군 편성 | ||
1949년 | 7월 | 166사단 10,320명 | 6사단 |
9월 | 164사단 10,821명 | 5사단 | |
1950년 | 1월 | 중국 각 지역 14,000명 | 12사단 |
4월 | 156사단 23,000명 | 7사단 |
5월 25일 찾아간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상류에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이 강을 건너기 위해 건설했던 부교의 흔적이 강 가운데에 남아있다. 조각상은 강을 건너가는 중공군이 가족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다. 단둥=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스탈린 김일성 지원과 마오쩌둥 견제 ‘음모론’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기로 마음을 바꾼 1950년 1월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 이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장기간 머물고 있을 때였다. 스탈린은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마오쩌둥에게는 비밀로 했다.
5월 13~16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 지원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야 알고 마오는 자신과 상의 없이 결정된 것에 놀랐다. 그는 스탈린에게 직접 확인한 뒤 “중국이 먼저 타이완 함락한 뒤 통일에 도움 주겠다”고 했다. 마오는 6·25 남침을 외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에게는 알리지 않고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상황을 두고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다 태도를 바꾼 것은 김일성의 요청이나 설득이 아닌 중국 또는 마오쩌둥에 대한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련의 주요 적국인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가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해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대안이 한반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손튼, 56쪽).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은 한반도 통일 지원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가 되는 것이 스탈린의 목표라는 것이다.
반론도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한 것은 미국이 무력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으로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중미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된 것은 스탈린이 조선 전쟁을 결정한 목적이 아니고 조선전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선즈화, 67쪽)
5월 말 찾아간 경기 파주의 임진각 통일전망대에서 관람객들이 판문점과 북한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다. 외국인들도 상당수다. 파주 =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전쟁 결정 핵심 변수는 ‘미국의 군사적 불개입’ 오판
‘병자국가대사, 불가불찰(兵者國家大事, 不可不察)’. 손자병법 첫 구절은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기 때문에 신중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허술한 대비와 북한과 소련의 치밀한 준비가 균형점을 잃어 오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사’를 결행하면서 공산 측이 더 중요하게 살핀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미군의 불참전’에 대한 믿음 또는 과소평가였다.
마오쩌둥은 195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미국은 이처럼 조그만 국가를 위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군이 참전하면 돕겠다고 하면서도 ‘불참’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해 4월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는 경우 소련은 미국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미군이 개입하면 마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김일성이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남침 유세(遊說)에서 “성공할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미군이 개입 하지 않을 것이다.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낼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말이나 애치슨이 연설에서 ‘한반도를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것만을 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 국가안보회의(NSC)의 1급비밀이라며 거이 버지스 등 영국인 이중 스파이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가 더 작용했다고 한다.(남시욱, 314) 그 정보가 정확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불개입’에 대한 믿음이 북중소 3국 간에 공유되지 않았다면 북한의 남침은 어렵거나 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한 것도 초기에는 ‘북진 통일’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확약, 즉 동맹조약이 없으면 또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은 2만3천여명의 주한미군이 상주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더 이상 야크기와 T-34를 몰고 오던 북한이 아니다. 미 대륙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다양한 중단거리 투발 수단까지 확보했다. 지금의 ‘핵 확장억제’는 그래서 6·25 당시의 ‘미국의 참전 확약’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정전 70년에 ‘왜 전쟁을 알고 막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에 주는 시사점이다.
국가 | 내용 |
미국 | 한국 전략적 가치 저평가(애치슨 라인) 철수 조건 미충족 상태에서 미군 철수 한국군 지원 소극적, ‘무장경찰대’ 수준 유지 북한 남침 및 적화 위험 경고 무시 소홀 |
한국 | 북진통일론으로 미국 경계 초래 좌우 대립으로 사회적 혼란 미군 철수 주장 여론 공비 소탕 등으로 전력 전후방 분산 군 비상사태 해제 |
소련 중국 |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 중국 국공 내전 마무리와 공산화 중소 동맹조약 체결 스탈린, 마오쩌둥 견제 위해 남침 지원 의도 마오쩌둥, 내전 중 북한 도움 부채 의식 |
북한 | 중국 공산화 같은 적화통일 야욕 ‘남로당 20만’과 빨치산 호응 오산 김일성, 스탈린과 마오쩌둥 집요한 지원 호소 소련 중국 북한, 개전 시 미국 불개입 오판 |
한강교 폭파의 파장과 논란 |
1950년 28일 밤 1시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2시 반쯤 한강인도교와 철교 3곳이 폭파됐다.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다리가 끊긴 것이다. 군부대는 무기와 장비, 트럭 등을 대부분 두고 내려와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 중에는 북한군에 학살되거나 납북되는 경우도 있었다. 폭약을 설치해 폭파된 한강인도교 ‘조기 폭파’에 대한 책임이 제기되자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 폭파 2개월 후인 8월 28일 폭파 현장 책임자 최모 공병감(대령)을 전격 구속했다. 이어 최 공병감은 단심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9월 16일 전격 집행됐다. 죄목은 적전비행(敵前非行). 최 헌병감에게 폭파를 명령한 것으로 최 공병감이 진술한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그해 7월 전사해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 못했다. 최 헌병감의 유족은 1961년 재심을 청구해 1964년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법원은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라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사’에는 채 참모총장이 6월 28일 새벽 1시 45분 “적의 전차가 시내로 침입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즉시 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폭파를 명령했다고 기술했다.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채 총장이 전화를 걸었다는 시간에 그를 수행해 한강다리를 차로 건너고 있었다는 당시 육군본부 강영훈 인사국장(전 국무총리)은 다른 증언을 했다. 2008년 5월 펴낸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그와 같은 전화 통화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강 전 총리는 “최 공병감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변론 기술상 강조한 것으로 추측되나, 세상된 기록된 문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했다”고 했다.(강영훈, 154쪽). 강 전 총리는 그와는 별도로 “정부가 100만 명 서울 시민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난 상황에서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하고 총살형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적었다. 한강교 폭파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역사학자 굴든은 “군대와 피란민들이 다리를 건너는 도중 폭파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 군사고문단(KMAG)은 군인과 민간인 500∼800명이 폭사 또는 익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적었다.(굴든, 116). 하지만 폭파 작업에 직접 참가했던 한 장교는 “다리가 폭파된 후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은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월간조선 뉴스룸 2013년 7월). 전쟁에서 파괴되는 시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리다. 6·25 전쟁 중 파괴된 다리 중에는 압록강대교, 대동강철교, 한강인도교와 철교, 왜관 철교 등 적지 않다. 한강교는 ‘조기 폭파’로 후퇴 작전에 차질을 빚고 서울 시민의 피해를 키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만 소련제 T-34 탱크 200여대를 앞세워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잠시라도 늦추는데 한강 다리 폭파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3일간 머무는데 ‘한강교 조기 폭파’도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
참고 문헌 |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이성춘, ‘북한 신년사 분석을 통한 김정은 시대 지속과 변화’, 『융합보안논문지』, 제14권 61 호, 75∼87쪽.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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